제112화
112화
“소월검수는 이것을 보관하고 있거라.”
“예. 련주님.”
“그것이 죽으면 너도 죽는다.”
“명심하겠습니다.”
소월검수는 이내 벌레의 주위에 강기를 형성했고 허공섭물로 항아리를 끌어와 벌레를 그곳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뇌혈검의 몸을 같은 수법으로 끌어다가 항아리를 채웠다.
살과 피가 섞인 곳에서 벌레는 다시 편안해진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련주는 말이 없었고 함께 모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련주가 만들어 내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이럴 때 련주의 분노가 폭발하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련주는 화를 내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그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무상도가 자신 없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정파 후기지수 중에 으뜸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련주님. 그러면 구파 일방 장문인의 후계자가 아닐지……”
“명문세가의 소가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 중에 이형환위를 하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사용하는 무공과 공력의 크기로 보면 지금까지 알려진 자들과 다릅니다.”
“무공도 특이했습니다. 한 문파의 무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확실하게 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그 무공들이 어느 정도 변형을 이루어서 그렇습니다.”
모여있던 이들이 각자 자기들이 느꼈던 것들을 말했다.
“그러면 혹시 그자가 북리의천의 제자는 아닐지요. 련주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한 사람은 소월검수였다.
그곳에 있는 누구보다 신중하고 련주의 심중을 잘 헤아리는 자였다.
그가 그렇게 말을 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련주는 소월검수에게서 그 말이 나오기 전부터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북리의천의 제자라면 그 산본의가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월검수.”
“그렇습니다. 그자가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에게서 무공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북리의천이 소림의 무공도 몇 가지 전수했다고 했고 말입니다.”
소월검수는 그 정도로 말을 하고 련주를 바라보았다.
련주만 이해시키면 될 일이었다.
련주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가 뼈아팠다.
‘또 그놈이라는 말인가.’
탈혼단이라는 살수단을 이용해 거의 다 성공한 일이었다.
독고세가를 완전히 멸문시켰는데 갑자기 그 일이 없었던 것으로 되어 버렸다.
마치 시간을 거스른 것처럼, 죽은 자들을 모조리 살려낸 놈이 있었다.
그것이 북리의천의 제자 서도진이었다.
‘한동안 무림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다시 본가로 돌아가 의원 일만 하고 있다던 놈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설마 정말 그놈이란 말입니까? 그러면 그놈이 결국 그 일을 알아냈다는 말입니까?”
누군가 당황한 목소리로 경박하게 외쳤다.
“연가장이 멸문당한 곳에 그놈이 나타났다고 하더니 정말 그놈이 저희에 대해 알아낸 것인지요. 련주님.”
그러자 소월검수가 눈짓을 해서 그를 조용히 시켰다.
련주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그들을 부른 것이지 추궁을 받거나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려고 부른 게 아니었다.
눈앞에 뇌혈검이 쏟은 피가 그대로 있는데도 경거망동하는 자를 보면서 소월검수가 주의를 시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행히 그자도 아주 눈치가 없는 자는 아니라 곧 입을 다물었다.
소월검수는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든 련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 * *
련주의 선택을 받은 십삼대제가 사도련에 모여든 것은 19년 전이었다.
그들을 십삼대제라고 칭한 사람은 련주였다.
련주가 불러들였을 때 그들은 대부분 절정에서 초절정의 고수였고 각자가 방파의 방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파는 정파와 천마신교가 양분하는 무림에서 거의 존재감 없이 지내 왔다.
좁은 지역에서 활개 치는 왈패.
정파의 이름있는 무가가 나서면 반나절 만에 쓸어서 흔적도 없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련주가 남만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벌레를 독과 술법으로 키워 십삼대제의 몸에서 기생하게 한 후에 그들의 무위는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파 무림에도 고작 두 명밖에 없다는 절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련주는 드디어 사파가 무림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너무나 순진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힘을 갖게 되고 십삼대제는 사분오열되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가진 힘으로 연합해서 세상을 사파의 천하로 만들자는 것은 그리 끌리는 말이 아니었다.
세상은 열세 명이 다스리기에는 너무 좁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은 열세 명도 아니었다.
십삼대제의 위에 다시 련주가 있으니 그들은 련주의 아래에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 같았고 그 사실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 중 몇은 련주를 배신하면서 자기들이 사도련을 장악하려 했고 그때부터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련주를 배신한 자와 련주의 곁에 남은 자.
십삼대제는 둘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다.
역사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어 온 정마대전보다도 더 처참하고 참혹한 일이 사파 내에서 벌어졌고 마침내 그 싸움이 끝났을 때 십삼대제 중 남은 이는 이제 고작 넷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련주에게서 돌아서는 이가 많아졌고 이미 승기가 굳어 가는 것 같았지만 련주는 자신의 편에 선 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자신을 지키는 동안 그들에게서 벌레를 회수해 그것을 개량했다.
그렇게 개량된 벌레에 련주는 충독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다시 대제들의 몸에 넣었다.
충독은 지속적으로 공력을 배가시키고 무위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충독이 가진 효과는 따로 있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충독은 숙주의 몸속에서 서너 개의 알을 낳는데 알을 깨고 나온 벌레는 어린아이의 장기를 파먹고 자라 영약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일시적으로 네 배에 이르는 공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고 유한한 육신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과 강한 힘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충독을 가진 네 명의 대제들은 련주를 배신한 대제들을 모두 죽이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충독의 알을 다른 사람의 몸에 넣어 순간적으로 이지를 잃은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서였다.
열세 명의 대제가 네 명으로 줄어들었지만 련주는 후회하지 않았다.
남은 그들이라면 사파의 천하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꿈을 함께 이루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독이 알을 낳으면 그때마다 련주는 일을 벌였다.
벌레가 알을 까고 나오도록 도우며 그것들을 살수단에 집어넣기만 하면 끝이었다.
멸문.
멸문.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정파 무가를 지워나가는 것은 그에게 희열을 안겼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사파 천하로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눈을 감은 련주의 얼굴에 골이 깊게 파였다.
넷이었던 대제 중 뇌혈검이 련주의 손에 죽으며 이제 대제는 셋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강해지길 바라고 힘을 주었는데 그것을 믿고 수련을 도외시한 결과인가.’
련주는 뇌혈검조차 싸움에서 밀리는 것을 보면서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충독을 몸에 가진 뇌혈검이 속절없이 당해 버린 것이다.
서도진의 손에 죽는 것은 어찌어찌 피했다고 하지만 련주는 뇌혈검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충독을 그에게 두었다가는 아까운 충독을 잃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를 죽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어떻게……!’
잘못될 이유가 없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충독이 알을 까고 나오도록 어린아이의 싱싱한 장기를 공급하는 것이 조금 까다로웠지만 그 문제도 금방 해결이 되었다.
련주는 화선에 있는 사도련 소속의 방파에 명해 주기적으로 아이들을 바치게 했고 그 아이들의 몸에서 충독의 알을 키웠다.
다른 곳에서 아이들을 데려오다 보면 자칫 관부의 눈에 띄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 화선의 아이들만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아이들이 와야 할 날이 됐는데도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편월방에 사람을 보낸 련주는 그곳에 아이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편월방의 무인들은 모두 죽었다.
그것만 해도 믿기 어려운 일인데 다른 곳에 갔던 자들도 똑같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편월방주가 편월방에 갇혀 있던 아이들 몇 명에게 추적향을 뿌려놔서 그것으로 흔적을 찾아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이 오히려 해가 되었다.
아이들을 쫓는 걸 포기했다면 서도진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렇게 끔찍한 패배를 겪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련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이들 역시 련주를 보며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적막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무게를 더해 가고 있었다.
* * *
드디어 마차가 산본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서 마차 안에서 먹게 하며 식사할 시간도 아껴가면서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렸다.
산본에 이르자 그제야 마음이 놓여서 아진은 한숨을 쉬었다.
선두에 달리는 아진의 마차 뒤에는 벽예월이 모는 마차가 따르고 있었는데 벽예월은 산본을 떠날 때의 모습과 다르게 제법 햇볕에 그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청수가 같이 앉아서 벽예월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있잖아. 청수야. 사실 산본에 오기 전에 나는 오랫동안 혼자 살았어. 그래서 산본에 올 때 굉장히 떨렸는데 산본의가 분들이 전부 다 좋아서 이제는 다른 곳에서 사는 건 상상하는 것도 싫어. 너희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청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조심스럽게 벽예월을 보며 물었다.
“저희도 산본의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저희는 너무 어린데…… 지금까지 소매치기밖에 안 해 봤어요. 그건 나쁜 일인데……. 그리고 저희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싫어하실지도 모르는데…… 누님 한 분이 오는 거로는 산본의가 분들도 부담을 느끼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저희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혹시 저희를 데려온 것 때문에 도진 의원님이 혼나시면 어떡하죠?”
그러자 벽예월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곳 분들이 다 마음이 좋기도 하지만 서 의원님은 남에게 혼난다고 풀 죽는 분도 아니야. 그리고 거기에는 너희 같은 아이들이 할 일도 아주 많아. 약초를 말리고, 해 가 지면 다시 거둬들이고 하는 것 정도는 너희도 할 수 있잖아.”
“그런 건 할 수 있죠.”
청수가 생각을 해 보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는 그런 일을 하면 돼. 산본의가랑 약방에는 할 일이 정말 많거든. 이제는 표국까지 있어서 일할 사람이 정말 많을 거야. 그렇다고 아직 어린 너희한테 너무 어려운 일을 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다른 마차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아이들은 이런 곳에서 자기들의 삶이 다시 시작될 거라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서로를 꿈꾸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