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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09화 (109/470)

제109화

109화

“그런데요…….”

한 아이가 옆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린린에게 말을 걸었다.

“응?”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들이 맞는 거죠? 의원님은 신선님이시고 두 분은 선녀님이시고 저분은 선동님이세요?”

아이는 정말 너무너무 궁금하다는 듯이, 그것만 좀 알려 달라는 듯이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건 비밀이야.”

“아아. 네. 그럼 말씀하시지 않아도 돼요.”

아이가 자기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쩌면 며칠 후에, 화선에 신선과 선녀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쫙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 아이까지 모두 치료를 하고 나서 아진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이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희미한 희망의 불꽃을 지키고 있는 동안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워서 머리를 오래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았으면 아진은 조금 더 오래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오라버니도 대단해. 흑주가 도운 거 알고 있었어?”

린린이 다가가 묻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도 처음 흑주를 봤을 때 녀석이 자신의 마나 보급고가 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의 흑주와 지금의 흑주는 같은 구슬도 아니고, 오랫동안 그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그 일이 일어났다.

“흑주의 진기는 오라버니가 가진 힘이랑 잘 통하는 거야?”

“응? 응…….”

아진도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흑주의 진기.

린린이 진기라고 말한 그것이 자신의 마나와 정말 너무 잘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상태야? 지치지는 않아?”

“응. 괜찮아.”

흑주가 아니었다면 아마 도중에 멈춰야 했을 것이다.

아진도 흑주가 고마워서 구슬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런데 애들은 어떻게 하지?”

아이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 툴툴대는 것 같기만 하던 린린이 요리까지 해서 아이들을 다 먹인 것을 아진도 알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여기에 두고 가면 전보다 더 큰 일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편월방 놈들이 죽었어도 사도련에서 와서 데려갈 수도 있고……. 그냥 본가로 데려갈까?”

“응. 내 생각에도 그러는 게 좋겠어. 천마신교에 가는 건 급한 것도 아니잖아. 이 근처에서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마차에 있는 약은 여기서 팔아 버리고 빈 마차에 애들을 태우고 돌아가면 되겠다.”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놓았던 것처럼 린린이 술술 말하자 아진이 웃었다.

“무슨 천마가 이렇게 착하냐?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산본의가의 호구력에는 못 당한 거야? 산본의가는 정말 대단하네.”

“남 말 하시네. 내공을 싹싹 끌어서 애들을 다 고쳐 놓은 게 누군데?”

“나도 산본의가의 호구력에 당해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나도 부정은 못 하겠네. 너무 무서운 곳이야.”

린린이 웃으며 말하고 아진에게도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소청이만 데리고 갔다 올게. 너는 여기에서 애들을 지키고 있어. 다른 곳이라고 사정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아.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 다른 애들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마음이 편하질 않다.”

“그래. 그럼. 흑주도 가져가.”

“당연히 그래야지. 흑주 포식시키러 가는 거야.”

아진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흑주를 챙긴 채 소청만 데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린린이 남아 있어서 이곳의 전력(戰力)도 무시무시하지만 아이들은 린린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아진과 소청이 사라진 걸 알면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벽예월이 아이들을 잘 돌봐서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벽예월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청수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사도련. 한 번은 부딪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용케 피하더니.’

린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그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편월방만큼 아이들을 심하게 다룬 곳은 없었다.

그러나 허리를 펴고 앉아 있지도 못할 만큼 낮은 상자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은 곳도 있고 저마다 다른 형태로 학대가 이루어졌다.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게 너한테는 행운일 거다. 소청아.”

무림에 발을 들이지 않고 끝까지 순수한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모를까, 일단 발을 들였다면 끝을 보는 게 나았다.

그리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강해져야 한다.

아진은 그것을 목표로 소청을 가르쳤다.

소청은 아진이 가르쳐 준 초식을 극성으로 펼쳐 사파의 무리들을 쓰러뜨렸고 흑주는 아진에게 주었던 진기를 다시 보충하느라 바쁘게 날아다니며 진기를 흡수했다.

일이 끝나면 아진은 아이들에게 편월방이 있는 곳을 알려 주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곳으로 가 있으라고 말했고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기운이 쇠한 아이들에게는 마나를 불어넣어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 일은 계속되었다.

아진은 도중에 린린과 벽예월을 시켜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숨어 있으라고 했다.

사도련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서로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는 곳이라면 지금쯤 방파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화선에 있는 방파만 해도 여러 곳이 당했으니 사도련이 나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도련이 저지른 악행을 그냥 놔둘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더 급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너희가 알려 준 곳에는 우리가 거의 다 가 본 것 같은데 혹시라도 빠진 곳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라.”

방파끼리 교류가 활발했고 아이들도 심부름을 하러 다른 방파에 다녀오는 일이 잦아서 어디에 어느 방파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빠진 것이 없는지 고심을 거듭하던 아이들이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전부예요. 의원님.”

“그렇구나. 그러면 떠나도 되겠다. 우선은 쉬어라. 며칠은 가야 할 테니 말이다.”

아이들은 꿈을 꾸는 것처럼 아직 현실감을 되찾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진은 린린과 벽예월을 불렀다.

소청은 내공도 많이 사용하고 지쳐서 먼저 재운 다음, 아진이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수가 팔십 명이 넘어. 마차가 두 대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린린. 벽 소저와 함께 마차를 몰고 가서 약을 팔고 올 수 있겠어? 소청이 깨면 소청이도 데리고 가.”

“응. 나한테 맡겨.”

“한 곳에서 다 못 팔면 다른 데로 가서라도 다 팔고 와야 해. 마차를 사야 하니까.”

“응. 걱정하지 마.”

린린이 너무 자신만만한 게 조금 걱정이 됐지만 아진은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혹시 돈이 남으면 아이들 옷도. 아니다. 그건 여기에서 사면 안 되겠다.”

“맞아. 그렇게 많은 옷을 사면 금방 의심을 사니까 그건 우선 조금 뒤로 미뤄.”

린린이 말하고 먼저 출발을 하겠다고 말했다.

벽예월도 의욕을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약을 파는 거라면 자기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동안 폐는 정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끼쳤으니 이번에야말로 그 모든 걸 한 번에 만회하겠다고 생각하며 벽예월이 의지를 불태우자 린린이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람이 너무 잘하려고 하면 실수가 생기는 법이 아닌가.

“벽 소저. 그냥 대충 하면 돼요. 산본의가의 약이잖아요. 그 말만으로도 알아서 팔려나갈걸요?”

“산본의가의 약이라고 해도 돼요?”

벽예월이 묻자 린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도련에게서 아이들을 빼돌릴 때까지는 그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그러나 이 정도 일에 작은 오라버니와 자기까지 나섰는데 사도련을 겁먹을 것은 아니었다.

“말해도 될 것 같아요. 아니. 말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이게 산본의가에서 만든 약이라는 걸 알고 다음에도 본가의 약을 사죠.”

“아아. 정말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벽예월이 자학을 하듯이 말하고 자기 머리를 콩 때렸다.

손가락도 가늘어서 저렇게 해 봐야 별로 아프지도 않겠다고 생각하며 린린이 먼저 말을 몰았다.

벽예월은 어쩌다가 린린과 대화 상대가 되었다.

평소에는 거의 아진이나 소청이 린린의 옆에서 얘기를 해서 벽예월이 린린과 말을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벽예월은 지금이 린린과 친해질 기회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서 소저에 대해서 멋대로 오해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잘못 본 것도 아니잖아요. 천기를 봤고 그게 나라는 걸 알았으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죠.”

오히려 그걸 알면서도 그런 반응을 안 보이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지.

린린은 제 오라버니를 생각하면서 웃었다.

벽예월은 린린이 자기를 보고 웃어준 거로 생각하고 감격했다.

“서 소저. 서 소저는 쉬고 계세요. 약은 제가 다 팔게요.”

“어디에서 팔 건데요? 약을 팔아 본 적은 있으세요? 약초의 효능에 대해서도 잘 모르잖아요.”

린린은 벽예월을 주눅 들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사실을 말해준 거였는데 벽예월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언제 먹으면 되는 건지 알려주면 사람들이 알아서 먹지 않을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약초가 들어갔는지, 각각 어떤 효능이 있는지 그런 걸 듣고 싶어 하거든요.”

“아…….”

“뭐. 일단은 해 보세요. 막히는 것 같으면 그때는 제가 나설게요.”

“고마워요. 서 소저. 정말 고마워요.”

그동안 폐를 끼쳤던 걸 만회하려고 한 건데 이래서는 더 폐만 끼치겠다고 생각하며 벽예월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아진이 말한 구역을 어느 정도 벗어났다 싶은 곳에서부터 약 팔기에 돌입했다.

벽예월이 먼저 나섰다.

“약 사세요. 약을 사세요. 산본의가에서 만든 약이에요. 좋아요.”

린린은 기가 막혔다.

약방에 가서 팔아야 그나마 알아듣고 사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렇게 해야 한 번에 많은 양을 넘길 수가 있을 텐데 벽예월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동이 서서히 터오는 중이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있을 리가 없…….

‘어? 사람이다.’

린린은 일단 벽예월이 어떻게 하는지나 보자고 생각하면서 마부석에 대충 기대어 앉아 있었다.

린린이 생각한 것은 정해져 있었다.

벽예월이 약을 사 달라고 간곡히 애원한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지나간다.

벽예월이 낙심한다.

다시 의지를 불태운 벽예월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약 좀 사달라며 소리를 높인다.

대충 그런 순서로 무한 반복이 될 것 같았다.

린린은 기다리고 있다가 벽예월이 스스로, 자기 힘으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면 그때 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벽예월의 일을 뺏는 것 같지도 않고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였다.

오는 동안 린린은 벽예월이 별 것 아닌 것으로도 상처를 받는다는 걸 알았다.

정말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각종 의미를 부여하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벽예월을 보게 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린린은 오해나 막자고 그때부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청도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 소청에게도 미리 그렇게 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린린은 벽예월을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웬만하면 벽예월도 자기가 잘하는 걸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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