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107화
흑주는 진기를 흡수하려고 나왔지만 한발 늦었다.
설마하니 소청이 그렇게 단호하게 처리를 해 버릴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잘했어.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게 끝이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 꼬마야?”
린린은 도망쳐 오던 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아이는 마차 뒤에 숨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소청보다 고작 몇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
아이가 소청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들은 누구지? 네가 도망쳐 나온 곳에 다른 사람들도 있니? 그 사람들도 도움이 필요해?”
린린의 질문은 계속됐고 아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가 온 곳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말을 못 하니?”
아이가 주저하느라 그러는 게 아니라, 말을 못 해서 그런 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린린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벌렸다.
순간적으로 린린의 얼굴이 찡그려지더니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린린의 표정을 보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혀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절단된 것도 아니고 안에서부터 뽑혀 나온 것 같았다.
아진은 자기가 제대로 본 게 맞는 건가 하면서 아이의 뺨에 손을 얹고 안을 잘 살피려고 했는데 그 동작에 놀랐는지 아이가 웅크렸다.
“괜찮아. 겁먹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의원이야. 내가 잠시 좀 볼까?”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아진을 보았다.
의원이라고 해도 이미 치료하기에 많이 늦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잠시 좀 볼게.”
아진은 자신의 움직임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태양이 있는 쪽으로 아이를 조금 돌려세우고 입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저놈들이 그랬어?”
아이는 아진의 손에 잡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참았다. 용감하네.”
잘 될지 어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 본다는 생각으로 아진은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이는 아진이 뭘 하는지 알지 못했고 가만히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어색한 듯 꼼지락거렸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볼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전혀 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 전달이 잘되지 않고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저에게서 나는 소리가 무서워서 말하지 않은 지 오래됐고 이제는 소리 내는 것마저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대답을 하기보다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상했다.
처음에 그것이 사라졌을 때는 거기에 적응이 되지 않더니 이제는 혀가 있던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아이는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의원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안 아픈데.
의원이 혀가 없는 걸 보고 놀라서 아직도 아플 자신이 아픈 줄 아는가 하고 아이는 안타까워했다.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말해 줄 수 없어서.
글이라도 쓸 수 있으면 글을 써서 알려 줄 텐데 글을 쓸 줄도 몰라서 자기 뜻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모양을 가진 것은 손짓 발짓으로 비슷하게 그려서 알려주기라도 해 볼 텐데 아프지 않다는 것은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의원이라는 사람이 계속 손을 얹고 있어서 저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조금 의문이 들었다.
자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걱정할지도 몰랐다.
같이 맞고 같이 얻어터지면서 걱정해 주는 아이들.
으, 으 하고 소리를 내며 아프냐고 물어 주는 아이들.
가족은 아니었고 그냥 그곳에서 만나 알게 됐는데 같이 지내면서 시간이 되면 소매치기를 했다.
‘오래 걸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지루했지만 계속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기분에 아이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도진이다. 서도진. 사람들은 나를 서 의원님이라고 부른단다. 너도 그렇게 부르면 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분을 서 의원님이라고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혀가 뽑힌 이후 누구의 이름도 불러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너도 그렇게 불러봐라. 서 의원님이라고.”
“…….”
아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좀 전에 세 명의 남자를 해치웠던 아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소청이야.”
소청.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이름도 나한테 불러 보라고 알려준 건가?
아이는 조금 난처해졌다.
내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건가 해서였다.
이제는 그 소청이라는 아이가 싸우는 동안 이것저것 가르쳐 주던 분까지 왔다.
“나는 린린. 해 봐. 린린 누님이라고.”
“…….”
“응?”
“린린 누님…….”
윽박이라도 지르는 듯한 말투에 말을 해 버렸다.
“……?”
어쩐지 말을 하지 않으면 맞을 것 같아서 그런 거기는 했는데 이상했다.
아이는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보았다.
혀를 있는 대로 쭉 빼고 그 혀를 보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봤자 혀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혀를 스스로 보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며 아이는 혀를 잡아봤다.
만져졌다.
“어……!”
혀가 어떻게?
아이는 놀라서 혀를 계속 만졌다.
끄트머리를 조금 잡아 꼬집어 보자 아프기까지 했다.
“혀가…… 혀가 생겼어요.”
아이는 혹시나 하면서 말을 해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정말 혀가 생긴 것이다.
말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가 해서 아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저는 청수예요. 고아고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아닌가? 부모님이 기억나지 않기는 해요.”
청수는 떠들어 댔다.
자기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그리고 입을 다무는 순간 또다시 말을 못 하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쉬지 않고 말을 해댔다.
“그래. 청수야. 이제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줘. 가면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고. 저자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너를 쫓아왔는지. 너랑 같이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저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서 의원님. 린린 누님. 소청아.”
생각난 김에 이름을 쭉 불렀더니 소청이 자기는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서로 나이를 확인해 보니 청수가 형이었다.
소청은 미안해하면서 바로 청수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화산에는 일찍부터 사파가 득세했고 그중 한 사람이 나서서 사파 연합을 만들었다고 했다.
정파의 무림맹과 비슷한데 사도련이라고 이름 붙은 그곳은 각 방파에 대한 권한을 조금 더 크게 갖고 있었다.
사도련에 소속되지 않은 방파는 활동이 어려웠고 다른 방파들이 연합해서 그곳을 공격하곤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도련에 가입을 해서 활동을 해야 했고 사도련에 내는 돈이 부담되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납치해서 소매치기로 키웠다.
청수가 잡혀있던 곳은 편월방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 갇혀 있는 아이들의 수는 사십 명이 넘었다.
가끔 사도련에서 나와 아이들을 주기적으로 데려갔는데 그 아이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자리가 비면 편월방의 패거리들은 그 수를 채워 넣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아무 집에 쳐들어가서 그곳의 아이를 훔쳐 오기도 했다.
늘 이유는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죽을 거라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
살기 위해 버틴 그들을 향해 아진의 일행이 탄 마차가 가고 있었다.
편월방의 거처가 가까워질수록 청수는 겁이 났다.
그러고 보면 그때 도망칠 생각을 했던 건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빈틈이 보였고 ‘어쩌면?’이라는 조그마한 가능성이 떠올라 그때부터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렸다.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잡히면 이제는 정말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아…….”
청수는 겁이 나는 것을 참기가 힘든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벽예월이 청수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누나는 처음 봤는데 그보다 더 신기한 건 그때까지 어디에 있다가 나온 건가 하는 거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는 정말 잘 하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청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청수야. 일단은 같이 들어가자. 그래야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으니까.”
아진이 말하자 청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를 낫게 해 준 이 사람들을, 다른 아이들에게도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벽예월이야말로 이만저만 겁이 나는 게 아니었다.
분위기를 보니 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마차에 숨어 있는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아진이 벽예월을 떠올린 듯 그녀를 보았다.
“벽 소저는 여기에 있어요.”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여기에 있으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아서요…….”
“이번에만 여기에 있어요. 여기가 더 안전해요. 안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몰라서 벽 소저를 따로 지켜 주지 못해요.”
벽예월은 민망하고 창피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네.”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벽예월은 누가 오더라도 마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완벽한 위장을 시작했다.
자기가 들키면 다른 사람들이 귀찮아진다는 생각으로.
저벅저벅.
아진과 린린의 걸음 소리였다.
그들은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서 걷고 있었다.
소청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청수의 발소리는 자박자박 울렸다.
밖을 내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떠드는 아이도 없었고 편월방 패거리들이 모여있는 건물에서 가끔 커다란 웃음소리와 고함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너랑 같이 지내던 사람들.”
아진이 물었지만 이미 알 것 같았다.
나무 기둥이 여러 개가 박혀있고 그 위에 거적때기가 여러 겹 쌓여 있는 곳이 보였는데, 바로 그 안에서 바람을 피하면서 누군가가 지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요.”
아니나 다를까 청수가 가리킨 곳도 그곳이었다.
거적때기를 조금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둡고 퀴퀴한 곳에 아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도망도 못 칠 것 같은 아이들 수십 명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으으으으으…….”
그들은 모두 청수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분노가 치밀어 세 사람은 그대로 있지 못했다.
“그놈들이 그런 거지?”
“네.”
“그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줘. 너는 같이 갈 필요 없다.”
“…….”
청수는 그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다시 겁이 나기도 했다.
“금방 다시 올 거다.”
아진이 청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청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수는 편월방 패거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거적때기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자 수많은 아이가 청수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는 것 같던 모습이었지만 그들도 분명히 청수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의원님이신데 나를 고쳐 주셨어. 혀가 다시 생겼어.”
거적때기 아래에서 청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진은 소청과 린린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소청아. 아직 어려울 것 같으면 너는 린린이랑 함께 있어. 그래도 일단은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하다.”
“안 어려워요. 스승님. 이런 놈들을 죽이는 건 전혀 안 어려울 것 같아요.”
소청은 거적때기 아래에 갇혀 있던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린린이 소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목숨까지 네가 전부 끊을 필요는 없어. 그러면 너는 흑주한테 미움을 받아.”
“아아. 네. 사고님.”
흑주는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듯 아예 소청의 어깨 위에서 둥둥 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