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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06화 (106/470)

제106화

106화

그런 상황이니 거기에 벽예월이 하나 더 낀다고 해서 어려울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혹시 안 된다고 하면 저도 참을게요. 그런데 혹시 괜찮다고 하시면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서…….”

“그런데 왜요?”

문득 궁금해서 묻자 벽예월이 대답을 생각해 보려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직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긴 한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전에 여기에 혼자 올 때 여행을 하기는 했네요.”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저기…… 그러면 뭘 준비해야 해요?”

“두 달 정도 걸릴 거로 생각하고 입을 것 정도만 챙겨요. 다른 건 우리가 챙길 거니까요.”

“네. 같이 가도록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벽예월은 신이 나는 듯 꾸벅 인사를 하고 총총 사라졌다.

그 결정으로 인해 여정이 얼마나 험난해질지, 그리고 그로 인해 흑주가 얼마나 폭식을 누리게 될지 아진은 그때까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누가 봐도 표행 같지 않고 정말 허술해 보이는 외형이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 어떤 산적과 비적도 겁낼 것 없는 사람들이 마침내 표행에 나섰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벽예월은 아진이 참 과묵하다고 생각했지만 린린과 소청의 옆에 있어 보니 두 사람에 비하면 아진은 정말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소청은 나이도 어리고 해서 재잘재잘 말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그중 가장 말이 없었다.

시간 대부분을 무공에 대해 생각하며 보냈고 혼자서 답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도저히 스스로는 답을 못 찾겠다고 생각되면 그때에야 겨우 말을 했는데 그러면 린린은 몇 마디를 툭 해 주고 끝냈다.

그래서 벽예월은 소청과 린린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관심이 없었을 뿐.

처음에는 린린도 왜 벽예월이 같이 가야 하는 건가 의아해했지만 나중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천기를 읽어 어설프게나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어서 린린도 벽예월에게는 자신에 대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천마동에 들어갔을 때가 열세 살이었는데 말이야. 나랑 같이 들어간 녀석들이 모두 일곱이었는데 천마동에서 살아 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 거기에서 나왔을 때 내가 열아홉이었고 거기서 나오자마자 소교주가 보낸 놈들한테 죽을 뻔했어. 나쁜 놈들.”

그런 이야기도 세 사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데요. 사고님?”

린린은 그렇게 오래 얘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는데 소청이 관심을 보이면서 그날은 얘기가 길어졌다.

“죽었지.”

“그런데 사고님은 어떻게 살아나셨는데요?”

“그자들의 마기랑 몸을 먹고.”

“아…….”

“내 마기가 가장 약해서 아마 다들 내가 가장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나를 천마동에 들여보낸 놈들은 나를 음식으로 넣어 준 거지. 나를 빼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명문 마가의 자제들이었어. 적어도 한 번은 천마를 배출한 적이 있는 가문의 사람들.”

“사고님은 거기에 어떻게 들 가시게 된 건데요?”

“내가 기재라는 걸 알아보고 신교에서 나한테 귀한 영약 몇 개를 사용했거든. 그 효과를 확인하려고 그랬을 거야.”

“와아…….”

소청은 대단하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내가 먹은 영약이랑 명문 마가 자제들의 마기와 몸뚱어리까지 하면 나는 적어도 300년은 더 살 수 있었는데 어우. 하루를 사는 것도 재미가 없는데 300년을 어떻게 더 살아?”

“그래서 폐관수련을 한다고 핑계 대고 돌아가신 거예요?”

“응. 이번에도 재미없을 줄 알고 구음절맥에 걸린 몸으로 준비해 놓으라고 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재미있네.”

벽예월은 그런 얘기까지는 다 알지 못해서 중간중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는데 아진이 눈치껏 설명을 해 주었다.

벽예월이 있는 곳에서 린린이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설명을 해 줘도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벽예월은 린린이 염라대왕의 권속 중 몇을 죽일 뻔했다는 말을 듣고 기함했다.

“그런데 있잖아요. 천마신교에 약을 팔러 간다는 게 알려지면 정파에서 트집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벽예월이 말하자 세 사람이 모두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능성은 있는 얘기였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그들이 트집을 잡는다고 뭘 어쩔 것인가.

정파 무림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도 정파 무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북리세가와 독고세가에서는 산본의가의 결정을 지지할 터였다.

전쟁이 나서 적군이 크게 다치면 그들이 치료받는 것까지는 막지 않는 법이었다.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그들에게 상비약을 팔러 간다고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이 생긴다고 해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면 될 일이었다.

거기에서 좀 더 귀찮게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자들은 가볍게 처리해 버리면 된다.

결국 아무도 벽예월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그 이유를 몰라서였다.

“점심은 객잔에서 먹을까?”

한참을 가다가 슬슬 배가 고파져 오자 아진이 물었다.

“아니. 육포 먹었어.”

린린이 마부석에 기이하게 널브러져서 말하자 소청이 자기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벽예월은 배가 고팠는데 자기 때문에 멈추자고 할 수는 없어서 자기도 아직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아진은 그런 벽예월을 보고 피식 웃었다.

“벽 소저.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다고 말해야 해요. 이 사람들은 절대 배가 고프다는 말을 안 할 거예요. 왜냐면 배가 고프기 전에 스스로 먹을 거거든요. 벽 소저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벽 소저는 가다가 쓰러질 거예요. 그거야말로 민폐예요. 알았어요?”

“……”

벽예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 앞으로 뭔가를 먹을 때는 벽 소저에게도 주고 먹어. 그리고 끼니때가 되면 배고프다고 말하고.”

린린은 허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귀찮은 일을 시키는 건가 하면서도 보통 사람들은 다 그러나보다고 생각하며 수긍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린린에게 이번 생은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을 탐방하는 의미가 컸기에 린린은 웬만하면 아진이 하라는 대로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귀찮지 않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소청아. 전에 알려 준 초식은 어느 정도나 됐어?”

객잔으로 향하며 린린이 물었다.

“삼성까지는 올라간 것 같아요.”

“삼성? 지금쯤 육성은 됐을 줄 알았더니.”

린린의 말에 소청이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청아. 린린은 원래 저러니까 상처받을 것 없어. 지금은 이 성까지 올렸어도 충분해. 너라서 삼성이 된 거야. 알았어?”

“네. 스승님.”

훌쩍거리는 소청을 보면서 아진은 어쩌다가 그 역할이 자기 차지가 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가면 화선이다. 화선에 가 본 적 있어. 소청아?”

린린 때문에 상처받은 소청의 마음을 풀어 주려고 아진이 말하자 소청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가 본 적은 없고 위에서 내려다본 적은 있었던 것 같아.”

아버지와 형님을 구하러 갈 때.

그날의 일이 떠올라서 잠시 말이 없이 가다가 마침내 화선에 이르렀다.

상단과 전장, 낭인이 많다는 곳.

창루도 많고 기루도 많고 주루도 많고, 그래서 그런 건지 고아도 많다.

그리고 또 그래서 그런 건지 사파 방파가 다른 곳보다 유독 많고 이곳은 정파가 유난히 힘을 못 쓰는 곳으로 유명했다.

한마디로 말해 무법천지.

평소에 사파에 대해서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화선에 들어선 순간 그 생각이 바뀌었다.

마차가 달려가는 방향에서 한 아이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혹시 소매치기가 아닌가 했지만 표정을 보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라도 의심을 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도대체 누구에게서 저렇게 도망치는 건가 하며 뒤를 보자 세 남자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경공까지는 전개하지 않고 보법을 밟고 있는데, 고급 보법은 아니고 길거리 삼류 보법 같았다.

무공의 수위는 그럭저럭 이류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런 자들이 셋이나 한 아이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재미 삼아서 그러는 거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이를 놓치는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해서 그러는 걸 수도 있고.’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아이를 죽이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진은 소청의 실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소청에게 눈짓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청은 이미 검파에 손을 얹은 채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것처럼 내내 아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말 등 위로 올라가 서서 몸을 날렸다.

벽예월은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하라고 했던 대로 당장 몸을 숨겼다.

“이 애가 누군데 쫓는 거죠?”

소청이 묻자 남자들이 같잖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많은가 보네. 나는 네놈 피가 무슨 색일지 궁금한데 내가 확인 좀 해 봐도 될까?”

그러고는 무턱대고 검을 휘둘렀다.

소청은 적어도 상대를 잘못 알고 싸우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점에서 안심할 수 있었다.

오는 동안 내내 졸음에 굴복하는 것 같던 린린도 어느덧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아 팔짱을 낀 채 소청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청은 그동안 린린이 알려주었던 검술을 펼쳤는데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말라고 했던 거였다.

그것을 펼친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그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하나씩 차례대로 끝내려고 하지 말고 두 팔과 두 다리로 동시에 공격해 오는 커다란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해봐. 동시에 방어해. 소청아.”

린린이 다소 난해한 주문을 했지만 소청은 용케 그 말을 알아듣고 공격을 해 나갔다.

놈들은 린린이 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난 듯했다.

도대체 자기들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했을 것이다.

“이제 됐다. 그건 그렇게 두고 다른 걸 해. 소청.”

린린의 말에 소청이 놀란 듯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소청은 그들을 향해 비수 몇 개를 날리려 하고 있었다.

조준하는 데 시간이 걸렸는데 린린이 그 상황을 얼른 알아차리고 다른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그 정도로 하라고.

소청은 아직 정확하게 조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린린의 말대로 했다.

그리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소청의 손을 떠난 비수가 놈들의 요혈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아진은 소청이 다음 공격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진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내리는 게 아직 부족한 소청을 위해 린린이 가르쳐 준 방법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냥 던져 버리고 다른 걸 하라는 주문에 소청은 다음 것을 수행하기 위해 손을 비워야 했고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은 꼭 필요하면서도 나이 어린 소청에게는 어렵고 아직 숙련하기가 어려운 것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소청은 세 사람의 숨통을 순식간에 끊었다.

소청 자신도 세 사람을 오로지 자기만의 손으로 처리했다는 것에 놀란 것 같았다.

소청이 놀란 얼굴로 린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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