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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05화 (105/470)

제105화

105화

‘나한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기는 한데. 그런데 정말 없을까?’

헌터가 되기 전 아진은 그냥 평범하게 살았다…….

응. 없을 거야.

생각하지 말걸. 생각하고 나니까 괜히 더 비참했다.

그리고 그 벌로 천마신교가 있는 십만대산에 가기로 마음을 굳혀버렸다.

“가야 해. 꼭 가는 거야. 거기에 가서 네가 숨겨둔 보물이랑 영약만 가지고 와도 우리 살림살이는 그냥 펴는 거야.”

아진이 계속 말을 하자 린린이 지겹다는 듯이 아진을 노려보았다.

“우리 살림살이는 걱정할 정도 아니라고 봐.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잘 살아 왔잖아.”

“야. 그래도 사회적 지위라는 게 있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마 오라버닌데 내가 이렇게 입고 다녀서야 쓰겠냐?”

왜 이렇게 깐족거리는 걸까 하면서 린린은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휙 불어 올려버렸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맞아. 잊어버렸어.”

“웃기시네. 이 만두야. 네가 아무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이 오라버니는 안 속으신다. 이전 삶에 다시 연관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그래도 재물은 찾자. 영약이랑. 비급까지. 그것만 하고 손 씻자.”

“…….”

린린은 정말 그래야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아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아아. 너. 혹시!”

아진이 린린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는 천마신교에 아무 미련이 없는 것처럼 하면서 사실은 애틋하고 절절하고 걱정되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서 네가 그걸 가져와 버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해서 걱정되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헛소리하지 마. 그놈들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고.”

“정말? 정말 지금 당장 정마대전을 일으켜서 그 사람들을 다 쓸어 버린다고 해도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럴 수는 있고? 웃기고 계시네.”

도발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린린이 노려보면서 말하자 아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맞네. 그런 거네. 이 오라버니가 그걸 몰랐네. 그래. 바닷가에서 잠깐 놀면서 쌓아 놓은 모래성도 파도에 쓸려 무너지면 속이 상하는 법인데. 그래. 그건 놔두자.”

“…….”

린린은 이건 또 뭔가 하는 듯이 아진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진에게 휘말리면 또 앞날이 얼마나 복잡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모른 척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무슨 놈의 삶이 천마일 때보다 더 피곤한 것 같냐? 이 인간 옆에 있으면 왜 아무것도 안 하고도 이렇게 지치지?’

그거야말로 린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해맑은 모습으로 웃는 아진의 얼굴을 보고 더 열이 받아서 린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 * *

비룡채의 약방 앞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들었다.

각지에서 모여든 약초꾼들이었다.

“기한은 보름을 드릴게요. 구절초, 금불초, 벌개미취예요. 아셨죠? 구절초, 금불초, 벌개미취. 여기로 가져오시면 전부 다 살 거예요. 싸우는 건 안 돼요. 남이 뜯은 걸 뺏는 것도 안 되고요. 그러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비룡채의 막내가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다 걸리면 두 팔, 두 다리 다 뽑히는 거예요.”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그가 웃었는데 다들 당연한 얘기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아예 사람들이 안 몰리는 다른 곳으로 가서 구해 오시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요. 다른 데서 파는 걸 사 온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요. 그런데 얼마에 사 왔건 우리는 정해진 만큼만 줄 거고 상태가 안 좋으면 안 받아요. 여러분에게 손해가 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느니 새로 캐오는 게 낫겠죠?”

사람들은 막내가 말한 세 가지 약초를 입으로 되뇌었다.

“그거랑 효과가 비슷한 다른 약초는 안 됩니까?”

“네. 안 돼요. 정확히 그것들이어야 돼요. 성분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그것들이 선별된 거거든요. 단일 약재로 사용된다면 말씀하신 대로 해도 되겠지만 이건 특별한 약을 제조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들이라는 걸 기억하셔야 해요.”

사람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나둘 사라졌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물으면서 같이 가자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잠시 주위를 서성이며 각자가 어디로 방향을 잡을 건지 대충 의견을 나눴다.

특별히 남이 물어 보지 않아도 자기들이 갈 곳을 큰 소리로 말해 두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어느덧 그들 사이에 불문율과 비슷하게 자리를 잡았다.

필요 없는 경쟁을 처음부터 피하려고 약초꾼들 사이에서 자리 잡아 간 방식이었다.

“그렇게 살벌하게 말하는데 아무도 안 놀라네요.”

벽예월이 신기해하면서 부채주를 찾아가 말을 하고 가주의 심부름이라며 종이를 내밀자 부채주는 거기에 적힌 약초들을 찾았다.

“벽 소저는 이곳 생활이 힘들지 않아요? 적응을 잘해서 다행이기는 한데. 그래도 만만치 않죠?”

벽예월은 부채주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약초를 하나하나 직접 챙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웬만하면 그런 식으로 일을 했다.

아무리 확실한 사람을 시킨다고 해도 자기가 직접 하는 것만큼 믿음이 가지는 않아서 그런 듯했다.

벽예월은 그냥 웃어 보일 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부채주가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약초를 다룰 때는 그게 아무리 사소한 작업이라고 해도 말을 시키지 않게 되어 있었다.

산본의가에서는 그게 더 철저히 지켜졌는데 약재를 다루는 작업을 할 때는 아예 색깔이 다른 앞치마를 둘렀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게 했고 그것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소한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미리 주의를 기울이는 거였다.

부채주는 종이에 적혀 있던 약초를 전부 다 챙겨서 넘겨 주며 벽예월에게 말했다.

“천마신교에 가서 팔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 서 의원님 아니면 그런 일은 상상도 못 할 텐데. 천마신교라니. 나는 마도랑 마주치는 걸 상상만 해도 무서운데.”

“천마신교요? 거기에 가신대요?”

벽예월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아. 벽 소저는 몰랐어요? 이번에 들어오는 약초로는 따로 약을 만들어서 전부 천마신교에 가서 팔 거래요.”

“그러면 위험할 수도 있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어요. 천마신교에서도 그동안 산본의가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을 거고 여기에서 직접 만든 약을 구할 수 있다면 멍청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마도들은 무섭고 잔인할 텐데…….”

그러자 부채주가 큰 소리로 웃었다.

“벽 소저님이 우리 서 의원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이네. 하긴. 서 의원님이 실력 발휘하시는 걸 본 적 없죠?”

“네?”

“마도들이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우리 서 의원님 앞에 서면 고양이 앞에 쥐 같을걸요? 사람들은 아직도 서 의원님의 진면목을 모르죠.”

부채주는 흐뭇한 얼굴을 한 채 벽예월을 재촉했다.

“어서 가세요. 가주님 기다리시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벽예월은 서둘러 산본의가로 돌아가며 자기가 들은 얘기에 대해 생각했다.

천마신교…….

‘린린 소저도 같이 가시겠지? 소청이도 가려나?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해볼까? 보나 마나 안 된다고 하시겠지?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데려가 달라고 하면 화를 내시려나? 진짜 화가 나면 무섭다고 했는데…….’

벽예월은 고민을 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그러고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천문관이 되지 않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 같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고 마음에 들어서 하루에도 그 생각을 몇 번이나 하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모님의 옆에서 배우는 일도 좋았고 모든 게 다 좋은데.

그래서 다른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아진이 천마신교에 갈 거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는 봄바람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살랑거렸다.

‘철딱서니 없는 생각인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그러나 어느덧 벽예월은 마음을 굳혔다.

이번까지만 폐를 한 번 끼쳐보기로.

* * *

린린은 결국 아진의 고집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사실 아진이 고집을 부렸다고 할 것은 없었다.

아진은 혼자서라도 천마신교에 갈 생각을 끝내 놓았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그 계획을 밝혔다.

어머니는 그동안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반겼고 소청은 남다른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마공을 익혀 온 소청이 천마신교에 간다는 것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마치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고향에 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린린은 소청의 눈빛을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진은 솔직히 린린이 같이 가든지 말든지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냥 십만대산에 한 번 가 보고 싶은 게 전부였으니까.

준비는 착착 진행됐고 떠나기 며칠 전에 황궁에서 다시 사람들이 나왔다.

천문관은 아직이냐는 말에 당당히 아직이라고 말하자 황상께서 내달에는 천문관을 새로 임명하고 싶어 하신다는 말이 돌아왔다.

정말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다가 아진은 린린에게 물었다.

“린린. 천마신교에는 그런 사람 없어? 천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

“몰라.”

그래놓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뭔가 아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천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린린이 다시 태어난 걸 알지 않을까 하며 아진이 말을 해 보았지만 린린은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식. 떨리나 보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요즘 가는 곳마다 벽예월이 눈에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온 건가 했지만 그건 아닌지 그냥 지나쳐가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조금 전에 마주쳤다가 다시 또 마주치곤 했다.

이 정도로 우연한 만남이 반복된다는 것은 정말 의심스러운 일이었고 결국 아진이 먼저 벽예월에게 물었다.

“할 말 있어요?”

“네?”

벽예월은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가는 곳마다 그렇게 나타나 놓고 이제 와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게 황당할 뿐이었지만 아직 적응하는 기간이라서 서툰 거로 생각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할 말 없으면 그냥 가고요.”

“있어요. 할 말.”

이대로 놓치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벽예월이 큰 소리로 말했다.

“뭐죠?”

“그…… 저도 데려가 주셨으면 해서요. 천마신교에요.”

벽예월은 말을 해 놓고 너무 큰 폐를 끼쳤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진은 잠시 생각을 했다.

어차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짐 마차에 약을 싣고 린린에게 마차를 몰게 하고 자기와 소청이 마차를 지키면서 갈 것이다.

마부석에 같이 타고 가라고 하거나 짐을 실을 때 사람이 탈 자리를 조금 만들어 놓으면 될 것 같았다.

그 자리가 안 나오면 짐을 다 싣고 그 위에 올려 줘도 될 것 같고.

아진에게는 그런 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기에 벽예월이 불편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해요.”

린린의 비밀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은 아진이 린린과 소청을 데리고 간다고 하면 아진과 소청이 린린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린린과 함께 가는 게 더 기대되는 것은, 심심해질 때마다 린린이 천마신공을 하나씩 꺼내놓아서였다.

그렇게 해서 아진이 새로 배운 천마신공만 해도 몇 개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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