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104화
‘그런데 그때 내가 산본의가에 대해서도 말을 했나?’
절대로 안 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놈들은 역겹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으니까.
‘그런데 정말 악진혁 그놈이 그자들을 공격하려다 이렇게 됐다고? 그리고 그 일을 지시한 게 나라고 했다고?’
악산철은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그 웃음이 황상을 향한 조롱 같은 것은 절대 아니었는데 오해했는지 순간적으로 검집이 날아와 그의 머리를 때렸다.
머리를 부숴 버릴 생각이었던 것처럼 박력이 넘쳤다.
머리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뼈를 뒤덮은 살가죽이 짓이겨졌다.
피가 비산한다.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악산철을 참하라.”
전령은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참.
하라.
악산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거야말로 비현실적인 말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럴 수도 있는 건가? 한 사람이 한 말만 듣고 정말 그냥 이렇게 해 버리겠다는 건가?’
악산철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그는 적어도 기회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이 일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말을 할 시간이 주어질 줄 알았다.
잘하면 결백을 증명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악진혁을 잘 알지도 못합니다. 만난 적도 거의 없고 저희 가문의 아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외에는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악산철. 천응문의 문주, 하나의 거대한 문파의 수장이라는 자가 그걸 모르는 것처럼 말하는군. 우리는 개인의 진실에 관심을 가질 만큼 한가하지 않다. 너도 그랬을 것 같은데 그런 눈을 하지 마라.”
“아닙니다. 안 됩니다.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제발 제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무림맹에 가서 말을 하면 제가 무고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무림맹을 돕느라고 악진혁과는 만날 일도 거의 없었고 저는 개인적으로 산본의가와 나쁜 관계도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거기에 온갖 것들이 다 휘말리는 것이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으면 너는 목숨을 내놓고 폐하의 지엄하신 명이 이루어지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악산철의 귀에 들려온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옆으로 휙 기울더니 머리와 함께 세상이 굴렀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나는 그냥 내가 가질 수 있는 걸 가지려고 한 것뿐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됐다는 것인가.
악산철의 생각은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흐른 피를 보며 천응문의 문도들은 뒷걸음질을 쳤다.
문주가 이렇게 된 마당에 나서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덤비고 싶은 놈이 있으면 덤벼도 좋다. 중원 제일의 의문이라는 천응문이 아닌가. 기세가 왜들 이러는가.”
그러나 천응문의 문도들은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더 도망치려는 생각 외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 도망가는 것이냐. 너희는 의문이 아니냐. 너희 스승을 살려 보려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
누군가 소리치며 웃었다.
그러나 그 말대로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그것이었을지 몰랐다.
서도진은 죽은 사람을 마주했을 때 그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 외에 주위의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들을 살려내는 것이 다른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지, 이들을 살리는 것이 어떻게 보일지, 정치적인 영향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들을 살려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그 후에도 생각할 시간이 있었지만 이미 끊어졌던 생명을 다시 이어 붙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더 허락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무서운 결단력이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악산철의 제자들은 그렇게 슬금슬금 사라져버렸다.
이곳에 남아 있다가 자칫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황군이 밀려들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면서 그 구심점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 * *
일단 한 사람의 죄인이 나타나면 그와 연관되었던 자들에게 파급효가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악진혁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직위를 잃거나 가문이 위협을 당했다.
황제는 그 소식을 들으면 아진이 감격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연일 산본의가로 소식을 전해 왔다.
새로운 천문관으로 누구를 천거할 것인지를 같이 묻기도 했다.
아진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단은 최대한 대답을 미뤄 놔야 귀찮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일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가모의 의지는 환생 후 천마직에서 은퇴하고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둔 고수로 살아가려 했던 린린의 계획까지 바꿔 놓았다.
아진과 린린은 틈만 나면 모여 앉아서 어머니가 너무 하는 것 같지 않냐고 투덜댔다.
그럴 때는 정말 죽이 잘 맞았다.
어차피 말만 그렇게 하고 손으로는 열심히 표물을 차곡차곡 실어 올리고 있기는 했어도.
“그런데 린린. 만약에 정마대전이 벌어지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 거냐? 내 스승님은 차기 무림맹주가 되실 분이고 천마신교는 네 세력이잖아.”
둘만 있을 때는 그런 것을 묻기도 했다.
만에 하나, 우연히 지나가다가 듣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기감을 펼쳐서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돕고 싶은 곳을 위해서 싸우면 되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고. 나 때문에 천마신교를 돕겠다고는 안 해도 돼. 어차피 이제 상관없어.”
린린은 짐을 싣다가 귀찮아진 듯 마부석 옆에 기대어 앉아서 졸음에 반쯤 넘어간 눈을 하고 중얼거렸다.
“왜 상관없어? 네가 죽은 걸 모르고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없어.”
“네가 어떻게 장담해?”
“내가 그렇게 살아왔거든. 내가 떠난 후에 나를 그리워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놈들이 있을까 봐 모두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서 살아와서 나를 그리워하는 놈은 아마 하나도 없을 거야.”
“대단하다.”
아진은 린린이 그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자기도 원래 살던 곳을 떠올리면 미련 남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린린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네가 여자인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응. 음양인이라고 하니까 거의 다 믿던데? 신교에는 음양인들이 꽤 있었어.”
“음양인이면 여자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한 거지? 그 사람들한테는 그럼 그게 두 개가 다 달려있어?”
“그렇다고 하는데 나도 보지는 못했어. 음양인이라는 사람한테 대뜸 그거 좀 보여 줄 수 있냐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는 게 맞는 거지만 왠지 린린이라면 그런 소리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아진은 린린의 천마신교를 떠올려 보려고 했다.
상상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천마신교는 어느 정도야? 교주가 지내는 곳은 황궁만 했냐?”
“황궁보다는 조금 작나? 비슷하려나?”
“그래? 그렇게 커, 천마신교가?”
“응. 아아. 오라버니는 아직 거길 못 가 봤구나?”
린린이 말을 하고 한쪽 눈을 뜨고 아진을 보았다.
어디 구경 한 번 시켜 줄까? 하는 것 같은 얼굴 같기도 했다.
“린린. 우리 이거 다 팔면 다음에는 천마신교에 가서 팔까?”
아진의 말에 린린은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아진은 자기가 한 말에 마음이 동했다.
* * *
가모는 사업에 중점을 맞추면 그때부터는 일을 확실히 했다.
아무 때나 마냥 퍼 주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몇 번의 표행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가모는 산본에 큰 표국을 세웠고 원래의 계획과 달리 북리세가의 대주 천이재를 국주로 임명했다.
표국의 영업력은 얼마나 강한 표사를 얼마나 확보했느냐 하는 것에도 크게 좌우가 되는데 다른 무가도 아닌 북리세가의 대주가 국주로 있고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데다 대부분 혈천방과 비룡채의 사람들이 표사로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표국에 일을 의뢰하는 곳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요즘에는 표국에서 처리하는 물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벽예월이 늘 가모의 곁을 따라다니며 비서나 총관처럼 일을 처리했는데 갈수록 수완이 좋아진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벽예월은 외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신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는 것은 산본의가만의 특성이라는 것을 자주 깨달았고 다른 이들과 마주하게 될 때는 면사와 죽립을 늘 착용했다.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도 면사를 손으로 들고 먹느라 불편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곳곳에서 표물을 실은 마차와 수레가 떠났고 표행에 나갔다 돌아오는 이들도 자주 눈에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규모를 이루고 표행을 떠났지만 아진과 린린은 그렇지 않았다.
둘만 다니거나 소청을 데리고 함께 가거나 했는데 남들보다 더 많은 물건을 가져가도 그것을 팔아치우고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머니한테 말씀을 드려 봐야겠어. 어차피 어머니는 그런 일에 정사마의 구분을 두실 분이 아니잖아. 야. 너도 생각해 봐. 본가의 약이 얼마나 효능이 좋은지 알잖아. 마교도들도 우리 약을 먹을 권리가 있어.”
돌아오는 길에 아진은 린린에게 다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진짜! 됐다니까 왜 이러시나 모르겠네? 오라버니는 오라버니가 살던 곳에 갑자기 가자고 하면 좋겠어?”
“아니. 절대로 안 되지.”
“그렇지? 나도 그래서 그런 거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그런데 나는 나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면 너 혼자 내 살던 곳에 갔다 오는 거 상관없거든? 그러니까 나도 거기에 우선 한 번 가 볼게. 강호에 발을 담갔으면 십만대산에는 한 번 가 보는 게 예의지.”
“하, 진짜!”
“돈도 숨겨 놨을 거 아냐. 아니야?”
“…….”
“아. 맞네! 야. 천마가 돈도 없이 돌아다녔다는 게 말이 되냐? 보고가 따로 있었지? 아아. 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만약고 같은 것도 있지 않았어? 영초랑 영약을 모아두는 곳. 무공 비급을 모아둔 비고도 있었을 거고. 와아.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헛짓거리만 하고 있었던 거네. 내 동생이 초재벌인데 그걸 모르고 다른 데서 삽질하고 있었던 거잖아?”
아진은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거의 광분했다.
린린이 움찔하자 아진은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맞네. 그거네. 어머니한테 말씀드려야지. 네가 돈이 있는 곳을 알면서 말하지 않는다고.”
“닥쳐봐, 좀!”
린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진은 더 떠들어 댔다.
“린린. 그건 네 거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가 찾아와야지. 그걸 왜 다른 놈들이 쓰게 하냐? 그리고 말이야. 너를 그리워하고 있는 놈이 하나 정도는 있을 수 있잖아. 후회하고 있는 놈이.”
“그래서 뭐?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고 싶어?”
아진은 가만히 생각했다.
생각해 보지도 않은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