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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03화 (103/470)

제103화

103화

자격과 능력만 두고 본다면 벽예월만큼 적격인 사람이 없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벽예월의 미모를 황제가 탐할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벽예월은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사느라 사회성이 부족했고 임기응변 능력도 없었다.

산본의가로 돌아오는 동안 아진은 린린과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린린은 아진이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린린은 그저 어차피 사람은 상황이 닥치고 나면 다 하게 돼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천마를 할 때도 그랬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할 말이 탁 막히기는 했다.

천마까지 성공적으로 해낸 여동생에게 천문관은 껌인 것 같고, 그게 벽예월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 아니겠냐고 말해 봤자 이 인간이 이해를 할 것 같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실익도 없는 얘기만 나누다가 돌아왔는데 벽예월이 당장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걱정이 됐다.

린린은 오히려 벽예월의 표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안 하면 되는 거고 좋으면 와, 좋다 하고 즐거워하면 되는 거지 왜 저렇게 복잡한 얼굴을 하는 건가 해서였다.

“모르겠다. 나는 소청이한테나 가 볼래.”

린린은 흑주를 꺼내 높이 던져 올렸다가 받으면서 그 자리를 떠났고 아진은 벽예월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벽 소저? 나는 벽 소저가 그 일을 하고 싶을 줄 알았어요.”

“네…… 하고 싶기는 해요. 저에게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데 뭐라는 건지.

벽예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벽예월은 다른 삶을 제대로 꿈꿔 본 적이 없었다.

자기가 들여다본 다른 삶이라는 게 거의 없어서였다.

그런데 요즘.

그녀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새롭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 세상의 주인공은 가모였고 벽예월은 가모를 따라 하면 그녀처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삶에 소박하게 욕심을 내고 있었다.

비단 가모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산본의가에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행복이라는 게, 웃으면서 살아가는 게, 그렇게 어렵고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닌가 보다는 생각을 그녀는 요즘 자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천문관이라는 말을 듣자 가슴이 턱 막혀왔다.

‘그래. 내가 행복해한 삶이 이렇게 길게 이어진 적이 없었지.’

벽예월은 어느새 체념하고 있었다.

자신의 몫이 아닌 행복에 넋을 잃고 그것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고마워요. 저를 생각해 주셔서요. 좋은 기회인데 사양하지 않을게요. 스승님을 이어서 스승님처럼 훌륭한 천문관이 될게요.”

벽예월이 말했다.

아진의 눈에는 벽예월이 애쓰고 있다는 것이 전부 다 보였다.

‘훌륭한 천문관.’

그래서 아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빴다.

왠지 그 말을 하는 벽예월의 모습에 훌륭한 헌터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아서였다.

“훌륭한 천문관이 돼서 뭐 하게요?”

아진이 묻자 벽예월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기왕 될 거면 훌륭한 천문관이 돼야 하는 게 아닌가.

벽예월은 이럴 때 뭐라고 대답을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오해를 할 수도 있을 텐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어서 입을 열긴 했지만 의미 없는 말들이 조각조각 열거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벽예월을 보면서 아진은 확신했다.

그나마 편하다고 생각할 자기 앞에서도 이렇게 말을 못 하면 정쟁의 중심에서는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까 걱정이 됐다.

‘나도 참 오지랖이 넓어.’

아진은 그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황궁 대신들의 가운데에 서서 그들이 모여 소곤거리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채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불안하게 걱정하는 벽예월의 모습이 꼭 연구관들의 입에서 나올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예전의 자신 같아서 화가 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하지 마요. 천문관 구하는 게 폐하 일이지 내 일도 아니고. 나한테 천문관을 천거하라는 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건데 그런 명령을 들었다고 내가 머리를 싸맬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네?”

벽예월의 눈이 한층 더 동그래졌다.

그것은 황명을 거역하겠다는 게 아닌가 해서 벽예월은 불안해졌다.

그녀는 지금껏 그런 삶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남이 내린 명령을, 그것도 황상의 명령을 무시하겠다니.

심장이 쿵쿵거렸다.

미친 듯이 거세게.

아진처럼 말해본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게.’

아진의 말과 생각이 너무 위험해서 그런 생각에 동조한다는 것도 위험하게 느껴졌지만 그러면서도 속이 시원해졌다.

‘여기에 있고 싶다. 천문관이 돼서 황궁에 틀어박혀 밤하늘만 보면서 살고 싶지 않고 여기에서 살고 싶다. 가모님이 세우신 표국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고 선화 부인이 만든 앞치마도 보고 싶고. 혈천방과 비룡채의 사람들이 정말 표사가 될 수 있는지, 그들의 표행이 성공적일지 그것도 보고 싶다.’

그런 욕심들이 하나씩 하나씩 벽예월에게 생겨났다.

산본의가에 오기 전만 해도 누군가 벽예월에게 너는 뭘 바라냐고 했다면 그녀는 할 말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하고 싶은 것들이 제법 생겼고 욕심도 부리고 싶어졌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벽예월은 그동안 그 말에 순종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자기가 원하는 곳을 돌아보면서 버틸 힘이 생긴 것 같았다.

그게 좋은 건지.

좋은 변화가 맞는 건지 확신은 없었지만 일단은 그랬다.

“저는 여기에 있고 싶어요. 여기에서 하고 싶은 게 많아요. 하늘은 이제 그만 보고…….”

벽예월은 그 말을 하고 잠시 멈췄다.

제 귀에 들려온 그 말이 섬뜩해서였다.

천기를 읽을 수 있는 자.

그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하늘이 준 그 엄청난 힘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그게 싫다고 투정 부리는 것 같은 자신의 목소리에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그녀가 다 맺지 못한 말을 아진이 이어 주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야죠. 본가가 좀 심하게 재미있어요. 여기에서 며칠 있어 봤으면 알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 그렇게 해요. 천문관이 꼭 황궁에만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밤하늘이 황궁에서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너무 귀찮게 자주 부르지만 않으면 내가 천문관 하겠다고 하면 되겠네요.”

“……네?”

벽예월은 세상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답을 찾아내는 사람은 이 집안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 계획이 없는 것 같고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이 집안사람들이 말을 하면 며칠 후에는 그 일이 실제로 뼈대를 갖추고 살이 붙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걸 몇 번이나 봐 왔기에 벽예월은 아진의 말을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혹시 저 때문에 폐가 되지는 않을까요?”

벽예월이 묻자 아진이 희한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뭐요? 그러면 어쩔 건데요? 남에게 폐가 되니까 벽 소저의 인생을 포기할 거예요? 사람은 자기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잖아요. 혼자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미안해해서 어쩌겠어요? 미안하면 그 기간을 최대로 단축하고 그동안 내가 폐 끼쳤던 사람들한테 갚으면 되죠.”

벽예월은 멍하니 아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뻔뻔해도 되는 건가?

그러면서도 벽예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분간은.

당분간은 좀 더 폐를 끼쳐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벽 소저는 천문관이 되고 싶지 않은 거로요.”

“네.”

그 말은 흔들리지도 않고, 말이 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때 나온 대답만큼 벽예월의 바람을 정확하게 대변해 준 말은 없었던 것 같았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벽예월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천문관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문관이 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후련했다.

벽예월의 얼굴에 지어진 희미한 웃음은 점점 선명해졌다.

‘가모님처럼 될 거야. 가모님처럼 돼서.’

벽예월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깨워야지. 천공을 흑암으로 물들인 사람에게 밥을 남기지 말라고 잔소리도 해 보고.’

벽예월은 피식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그날부터 당분간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로 결심을 했다.

* * *

천응문의 제자들 몇이 급히 산문으로 들어왔다.

“문주님. 문주님. 관군들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관군이? 관군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다는 말이냐.”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아마 반 각이 되지 않아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관군이 여기에는 왜…….”

천응문주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이유를 생각해 보려고 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차라리 무인들과는 접점이 있지만 관과는 이제껏 특별히 부딪힐 일이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잡혀가지는 않겠지.”

천응문주 악산철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내 몇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관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악산철이 생각한 것은 현청에서 나온 사람이었고 고작해야 성주가 보냈을까 했다.

설마하니 황상의 명령을 받든 이가 자신을 찾아올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

“네가 악산철이냐.”

“……!”

천응문의 문도들은 문주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에 발끈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말을 하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황상의 명을 전하는 이에게는 황상을 대하듯이 해야 했다.

악산철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전령이 내용을 전하는 동안 그대로 있었다.

악진혁과 산본의가라는 말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산본의가를 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내가 악진혁에게?’

가문의 방계라며 악진혁이 찾아와서 도움을 부탁한 일이 있었고 그에게 돈을 몇 푼 쥐여 준 기억이 났다.

영민하니 잘만 키우면 가문을 영화롭게 할 거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지만 오래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악산철은 천응문을 키워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잊고 있던 악진혁이 다시 찾아와 인사를 했다.

천문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아직 된 것도 아니면서 자랑을 하러 온 거냐고 하자 조금만 도와주면 천문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황궁 안에 있으면 황도 밖에 비가 와서 마을이 떠내려가는지 가뭄이 드는지 알 방법이 없지요. 사실을 전하지만 않으면요.

문주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다그쳤고 악진혁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다른 일은 전부 자기가 할 테니 그에게는 돈만 대 주고 사람들 몇 명을 포섭해 달라고 했다.

만약 잘만 되면 천문관을 측근으로 둘 수 있는 건데 괜찮은 제안이 아니냐는 말에 악산철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부담될 정도의 돈도 아니었고 악진혁이 부탁한 일들이 전부 간단해서였다.

그리고 천문관이 바뀌었다.

정말 그 정도의 속임수로 황상의 눈을 가릴 수 있을까 했는데 그렇게 되었다.

그 후에는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도움이었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복수였다.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복수를 해 왔다.

그냥 말만 하면 간단하게 이루어지는데 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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