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102화 (102/470)

제102화

102화

“외출하십니까. 가모님.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천 대주님. 멀리 가지도 않을 건데요.”

“멀리 가지 않으면 금방 돌아오겠네요. 가시지요.”

천 대주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고란 그렇게 방심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거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그라서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때로는 답답하고 깐깐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 북리세가의 무인들 덕분에 지금껏 산본의가가 안전하게 지켜졌고 아진도 마음을 놓고 외부의 일을 보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가모도 알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대주님.”

“고맙기는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에 가십니까, 가모님?”

천이재는 가모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아진의 가족 모두가 좋았지만 특히나 자기는 가모와 말이 더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의술에 박식해서, 얘기를 하다 보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너무 많이 나와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가모는 그렇지도 않았고 생각하는 규모가 엄청나서 얘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표국을 하나 세울까 한다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가모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표국에 혈천방과 비룡채 식구들을 고용하려고 길을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생각인 것 같기는 합니다. 가모님. 얼마 전에 들었는데 혈천방 인원이 전보다 네 배 넘게 늘었다고 하더군요. 비룡채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대주님은 표국에 대해서 잘 아세요? 우선 소소하게 오십 명 정도로 시작하면 될까요?”

“의뢰를 한 번에 많이 받을 생각이 아니면 쟁자수와 표사를 전부 포함해서 오십 명이면 충분합니다. 조그맣게 시작해서 키워나가면 되는 거고요.”

벽예월은 신기해하면서 그 말을 들었다.

보통 그런 얘기가 나오면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얘기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없으니 사업 계획을 접으라고 조언하기 마련일 것 같은데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가모의 제안에 선화 부인이 얘기를 보탰고 북리세가의 무인은 그 계획을 이미 구체화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돌아올 때는 산본의가 산하에 표국이 하나 만들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그것은 헛된 망상이 아니었다.

가모는 혈천방을 만나러 가면서 말을 타지 않고 걸어갔는데 천이재와 걸으면서 같이 얘기를 나누고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그들을 반기며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닭이 막 낳았다며 달걀을 가져오기도 했다.

천이재는 그들이 주는 걸 덥석덥석 받아서 먹기도 하고 가모나 벽예월에게 나눠주거나 자기 입에 넣기도 했다.

북리세가에 대해 들은 일이 있던 벽예월에게는 그 모습이 참 신기하게 보였다.

명문세가의 무인들은 무서운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으로 벽예월이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천이재가 고개를 숙였다가 자기가 먹으려던 걸 내밀었다.

“이거 먹고 싶었어요, 벽 소저?”

“아.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로요.”

벽예월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게 서툴렀고, 그럴 필요가 없는 가모가 부러웠다.

그녀는 사실 산본의가에서 가모가 가장 부러웠다.

누가 되고 싶냐고 한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냐고 한다면 벽예월은 주저할 것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본의가의 가모님이라고.

천살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도, 천공을 흑암에 물들인 이도 모두 가모님의 앞에서는 꼼짝도 못 했다.

그만 자고 빨리 일어나라고 하면 다들 빨리 일어나야 했고 식기 전에 밥을 먹으라고 하면 당장 밥을 먹어야 했다.

천살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가.

천공을 흑암에 물들인 이가.

가모님의 말 한마디가 떨어지면 귀찮아하면서도 결국은 그 말을 들었다.

‘나도 꼭 가모님처럼 돼야지.’

벽예월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가모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혈천방에 대해서 들어 봤어요, 벽 소저?”

“네?”

“내가 얘기해 줄게요.”

가모는 혈천방과의 인연부터 시작해 비룡채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긴 얘기였고 그 얘기가 끝났을 때는 혈천방의 본거지에 가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벽예월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고 현실에서 그 사람들과 마주했다.

‘세상에……!’

벽예월은 가모에게 진심으로 반했다.

소청과 린린을 호령하던 모습은 아 것도 아니었다.

수십 명의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얼굴을 사납게 구긴 채 누가 온 건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가모를 발견하고 일제히 우다다다 달려 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해바라기가 따로 없었다.

“가모님. 여기에는 어쩐 일이세요? 혹시 작은 공자님이 오셨습니까?”

“저희가 필요해서 오셨습니까, 가모님? 의가에 왈패 놈들이라도 나타났는가요?”

“아니지. 그런 일이면 대주님이 처리하셨을 텐데 대주님도 같이 오셨네? 예쁜 아가씨도 같이 오셨고?”

혈천방 사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가모님이 도대체 왜 오신 걸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추측하는 것 같았다.

벽예월은 이런 식으로 남의 관심에서 완벽하게 밀려난 경험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희한하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될지도 몰랐다.

“표국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요. 표사가 필요하거든요.”

가모는 여러 말로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표국을 만들려고 한다는 말을 개집 하나 만들려고 한다는 것처럼 하는데도 그걸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표사요? 표사요. 그렇죠. 가모님. 잘 찾아오신 거죠. 저희가 딱 표사지 않습니까. 표물은 뭔데요. 가모님?”

혈천방의 패거리들은 가모를 둘러싸고 의욕적으로 물었다.

목소리는 크고 말투는 거칠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가모를 윽박지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가모는 그 많은 질문에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가루약요? 정말 그렇겠네요.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그런 건 꽤 멀리까지 보내도 되기는 하겠네요. 표국에 맡기느니 저희가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혈천방은 서로 말을 하고 방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모님이 하라고 하시는데 어쩔 거요?

그 정도의 의미가 담긴 얼굴.

벽예월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가모의 힘이 이곳에서 얼마나 막강한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렇게 해야지요. 몇 명이나 필요할까요?”

방주도 순순히 말했다.

어차피 자기들은 그때 아진이 살려 주지 않았으면 지금껏 살아 있지도 못할 텐데 살려 준 것만도 감지덕지하는 자기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산본의가에 협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어요. 물량이 어느 정도나 확보가 될지도 잘 모르고요. 사실은 조금 전에 생각한 일이거든요.”

가모가 말하자 다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생각했으면 내일 표국 만들고 모레 표행 나가면 되죠.”

웃자고 하는 말인 줄 알고 웃었는데 벽예월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벽예월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이 순조로울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가모는 비룡채에도 말을 해 볼 거라고 했다.

“우선은 바로 팔 수 있는 약이 얼마나 있는지 봐야 하니까 알아보고 사람을 보내서 알려 줄게요.”

“번거롭게 오지 마세요. 저희가 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일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걸어서 오신 모양입니다, 가모님? 저희 말을 타고 가세요. 저녁에 저희가 가서 가져오면 되니까요.”

방주가 말하고 눈짓하자 이내 세 필의 말이 대령되었다.

그래서 가모의 일행은 혈천방의 말을 타고 비룡채로 향했다.

벽예월은 일이 진행되는 속도를 다 따라잡는 것도 벅차다고 생각하면서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한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서 가모는 표국의 이름을 뭐로 정할지, 국주는 누구를 세우는 게 좋을지 그런 것들을 얘기했다.

정말 표국이 세워졌다.

건물은 없었지만 표국의 표사들이 혈천방과 비룡채 사람들이었기에 표국에 볼 일이 있으면 그리로 가면 되었다.

벽예월은 일이 이렇게도 되는 건가 하면서 신기해했다.

저녁에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 가모는 가주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고 특별히 자리에 함께한 천이재와 선화 부인이 옆에서 설명을 거들었다.

“잘됐군요. 부인. 잘 팔려서 돈이 많이 벌리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국주는 누구죠? 부인이 국주 일까지 맡으면 나하고 놀아 줄 시간이 더 없어질 것 같은데.”

여전히 깨가 쏟아지는 가주와 가모는 그런 말을 과감하게 나눴고 가모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국주 자리를 포기했다.

“국주는 비룡채의 채주나 혈천방의 방주에게 알아서 고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되겠군요. 오늘 정말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가주가 꿀 떨어지는 눈으로 가모를 보자 벽예월은 이런 게 사람 사는 모습인가 하며 감동했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밖이 시끄러워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환호성이 들려와서 벽예월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자 아진과 린린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느라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도 벅차 보였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벽예월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진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심장이 왜 이렇게 정신없이 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덧 아진이 다가와 있었다.

그 옆에는 린린도 있었다.

“자, 잘…… 다녀오셨어요? 가신 일은…… 잘 되었고요?”

벽예월이 조심스럽게 묻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이 이어졌다.

“벽 소저. 부탁할 게 있습니다. 들어 주면 좋겠어요.”

간절한 눈빛.

제발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것 같은 표정.

벽예월은 마른 침을 삼켰다.

뭔데 이러지?

혹시.

혹시……

벽예월의 머릿속에서 망상이 시작되려 할 때 린린이 선수를 쳤다.

“무슨 뜸을 그렇게 들여? 그냥 말해 버리지. 벽 소저. 폐하가 오라버니에게 천문관이 되라고 했다잖아요? 오라버니가 싫다고 했더니 그럼 다른 천문관을 잡아 오라고 했대요. 오라버니는 벽 소저가 적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린린이 쉬지도 않고 말을 한 후에 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말을 못 하고 버벅거리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벽예월은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했다.

“천문…… 관요?”

천문관.

그녀의 스승이 그토록 그녀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던 자리였다.

그러나 벽예월의 재능이 드러나면 오히려 생명이 위태로워질 거라고 생각하며 끝내 스승은 그녀를 세상에서 숨겼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천문관이라니.

벽예월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리를 원했냐고 하면 벽예월 자신도 단번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천문관 자리에는 여전히 애증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어려웠다.

벽예월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것을 보고 아진은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