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01화
“저분들은 정말 환자가 맞는 걸까요, 의원님?”
의녀가 천막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북리소은에게 물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격부에서 온 자들로, 격부는 산본에서 이틀 거리에 있는 도시였다.
의개와 반대쪽에 있다고 보면 되었다.
그리 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가깝다고도 할 수 없는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순전히 벽예월 때문이었다.
벽예월의 미모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산본의가에 더욱 모여들었고, 가주는 이러다가 정말 치료가 급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겠다며 벽예월을 내원에 머물게 하고 특별한 일이 있어 밖에 나올 때는 면사와 죽립을 쓰게 했다.
가주의 명령이니 그 말을 따르기는 했지만 풀이 죽어 축 늘어져 있는 벽예월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 그곳에 와서 린린과 소청을 보고 기절했던 벽예월은 이곳이 절대 만만치 않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긴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특유의 분위기에 녹아들어 갔다.
산본의가의 사람들도 벽예월의 아름다운 용모를 보고 좋아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던 것처럼 육욕이나 색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희귀한 약초를 발견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반갑게 대했다.
벽예월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고 산본의가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눈이 마주쳤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격했다.
아는 사람.
자기가 알고 자기를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주위에 수도 없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벽예월은 그것 때문에 요즘 매 순간이 설레고 새로웠다.
그런데 산본의가에 찾아드는 가짜 손님들 때문에 다시 문제가 생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벽예월은 자신의 용모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며 찾아드는 사람들 때문에 산본의가의 일이 복잡해지는 것이 미안했다.
정말로 가주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고, 쓸데없는 사람들이 자리와 시간을 뺏는 것 때문에 정말 치료가 급한 사람들이 뒤로 밀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오래 걸리지는 않으니까 그냥 참아요.”
북리소은이 웃으면서 도종 쪽을 돌아보자 도종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진맥하고 무서운 속도로 시침을 해 나갔다.
도종 역시 그 문제를 알고 있었고 벽예월이 괜히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도종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그 문제를 처리해 주고 있었다.
도종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벽예월을 보러 온 꾀병 환자들로, 도종은 그들이 전혀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건강에 해가 없는 시침을 하며 진료비를 넉넉히 받아 챙겼다.
남아도는 돈으로 할 짓이 없어서 이곳까지 원정 온 사람들에게 그 정도 돈은 뜯어내도 된다는 게 도종의 지론이었다.
원래는 도종도 서종욱과 비슷하게 청렴하고 사업 수완도 없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아진과 함께 자라면서 아진에게 물들어 이제는 제법 영악하게 머리를 굴릴 줄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모아진 돈은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한 중증 환자들의 치료비에 충당됐다.
막연한 사명감과 직업 정신 때문만은 아니었고 자신들의 수련을 위해서도 중증 환자의 치료를 꾸준히 이어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들도 벽예월을 보러 온 이들을 판별해 내는 눈을 갖게 됐고 환자들 사이에 끼어 줄을 서 있는 이들 중에 그들을 먼저 색출해 내 도종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러면 멀리서 온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침을 맞고 떠밀려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도종의 앞에는 늘 길이 줄게 서 있었지만 그 줄은 순식간에 줄어들곤 했다.
침을 맞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약간 긴장을 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치료가 다 끝났다며 등을 떠밀리고 있었다.
핑계 댄 일이 끝났으니 그들도 더 이상 그곳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면서도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침을 놓던 도종에 대해 말을 했다.
“그런데 침을 이렇게 빨리 놓는 게 가능한 건가? 요혈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말할 것도 없고 깊이와 각도랑 힘도 정확하던데.”
“나도 그 생각을 했네. 우리를 빨리 쫓아내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조금 괘씸하기는 했지만 실력이 좋은 건 분명한 사실이지.”
“그러고 보면 산본신의도 그렇고 대공자도 그렇고 이런 촌구석에서만 썩기는 아까운 사람들인데. 산본신의라면 황의보다도 실력이 뛰어날걸?”
“그건 정말 그럴 걸세. 둘째 공자는 죽은 사람도 살린 적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아마 황상께서도 산본신의에 대해 알고 계실 것 같기는 하네. 장차 황의가 될 사람들에게 우리가 먼저 진료를 받은 게 될 수도 있겠군.”
그들은 어느새 벽예월에 대해서는 다 잊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돌아갔다.
벽예월은 소청의 주위를 자주 얼씬거렸지만 소청은 아진이 특별히 만들어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느라 식사 때가 아니면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다.
이리저리 부초처럼 떠다니고는 있었지만 전처럼 심심하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신기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은 듯했다.
벽예월이 심심할 거라고 생각한 가모가 그녀를 불러 모임에 끼워주곤 했다.
가모의 모임에는 가모와 소청의 어머니인 선화 부인이 있었고 일이 끝나면 북리소은이 함께 했다.
다른 때는 린린도 낀다고 했는데 지금은 황도에 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산본의가의 중요한 일들이 결정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친목 모임인 줄 알았던 벽예월은 그곳에서 산본의가의 중요한 사업들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가모는 가장 손이 많이 가던 린린까지 병을 털고 일어나서 제 앞가림을 하자 스스로 산본의가의 총관 역할까지 떠맡으며 가세를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전방 표국(鏢局)이 본가의 가루약을 전국의 약방에 운반하는 일을 맡았으면 한다는 뜻을 표했고, 만전 상단은 가루약의 독점권을 주면 자기들의 몫은 최소화로 하겠다고 하더군요.”
다른 곳에서 사업 제의가 들어오면 가모가 일차적으로 그것을 결정하고 어느 정도 결정이 된 것을 가지고 가주나 의가 사람들과 의논을 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오가는 이야기가 중요했다.
“가루약을 팔기로 하신 모양이네요. 가모님.”
선화 부인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손을 쉬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는 목에 걸어서 입는 긴 앞치마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염된 부위를 빨리 알 수 있어야 세탁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밝은색 천으로 새로 만드는 중이었다.
“약초를 말려서 분말로 만든 가루약은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더 유익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긴 그래요. 오래 보관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본가의 약을 사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런데 가모님. 혹시 본가의 재정 상태가 어려운가요?”
선화 부인이 묻자 가모가 웃었다.
“사실 그래요.”
가모의 말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겉에서 보기에 산본의가는 산본의 돈을 쓸어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박리다매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은 좀 그렇겠지만 환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진료비를 많이 받지 않아도 돈을 많이 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산본의가에서는 의학당을 통해 의원을 계속 배출했고 의학당에서 배출한 의원 중에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의원이 없는 곳에 가서 개원을 하도록 했다.
그럴 경우에는 초기에 드는 비용이 많고 자립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그 돈을 산본의가에서 부담했다.
아진의 스승인 북리의천이 오랜 투병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들의 소중한 린린이 구음절맥을 앓지 않았다면 산본의가도 그런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겠지만 치료받을 곳이 멀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며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목숨을 구한 이들이 자라서 산본의가에 와서 의녀나 의생이 되기도 했다.
굶주림에 허덕이면 아무리 치료를 잘한다고 해도 회복이 더디고, 굶주림 자체가 생명을 위험하게 하기에 산본의가에서는 자체적으로 많은 구휼미를 풀었는데 그런 일에 모두 돈이 들었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돈이건 노동력이건 어떤 방식으로든 갚았기에 손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받아야 할 것을 나중에 받기로 미루는 만큼 경영이 어렵기는 했다.
“표국에 맡기면 이윤을 어떤 식으로 나누는데요?”
선화 부인이 다시 물었다.
“표물 운반을 부탁하고 돈을 주면 표사들을 고용하는 건 표국에서 알아서 하겠죠?”
“그런데 본가에는 북리세가의 무사님들이 상주해 계시잖아요. 가모님.”
“하지만 그분들은 본가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분들이에요.”
“그렇기는 하죠……. 아쉽네요. 그런 분들이 계신데 표사들에게 따로 돈을 주고 그 일을 맡겨야 한다는 게요. 다 피 같은 돈인데…….”
그런 얘기가 오고 가는 동안 벽예월은 부지런히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벽예월에게는 온통 신기한 얘기들뿐이었다.
“벽 소저. 바느질할 줄 알아요?”
선화 부인이 묻자 벽예월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바느질감을 바라보았다.
“여기 이 부분만 해 줄 수 있겠어요? 목에 거는 부분인데.”
“네…….”
어렵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벽예월은 바느질감을 끌어다 놓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선화 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멀뚱히 앉아 있으면 그것도 불편하겠다고 생각해서 벽예월을 챙긴답시고 시킨 일이었다.
선화 부인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었을 때 너무 불편했기에 벽예월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벽예월이 해 놓은 것을 보고 그녀는 기함했다.
선화 부인은 처음부터 바느질을 잘했기에 세상에 바느질을 이렇게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땀이 규칙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선을 완전히 넘어간 것도 있고 매듭도 엉망이었다.
“얼굴은 예쁜 분이…….”
선화 부인은 뭐라고 수습을 할지 몰라서 말을 잇지 못했고 벽예월은 얼굴을 붉혔다.
가모는 크게 웃으면서 자기도 바느질은 못 한다고 했고 그것 때문에 벽예월은 가모가 더 좋아졌다.
“아아. 혈천방 분들도 계시잖아요. 그분들은 요즘 뭘 하나요? 혈천방이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분들로 본가에서 표국을 만들어도 되는 것 아닌가요. 가모님?”
선화 부인의 말에 가모의 눈이 빛났다.
“혈천방요? 아. 그분들이 있었죠. 비룡채 분들도 원래 힘을 쓰던 분들이었고요. 아아…… 비룡채 분들이야말로 이 일에 적격일지도 모르겠어요. 산적 출신이니까 산채가 있는 곳을 지나갈 때 유리하지 않을까요? 당장 그분들을 만나봐야겠어요. 역시 선화 부인과 얘기를 하다 보면 저절로 문제가 풀리는 것 같아요.”
가모가 일어나며 벽예월을 바라보았다.
“같이 갈래요. 벽 소저?”
“네?”
혈천방과 비룡채라고 했다.
그냥 딱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사람들인 것 같았는데 가모는 무서워하지도 않는 듯했다.
산적이었다면서 전혀 무섭지 않은 걸까?
그러면서도 벽예월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올게요. 선화 부인.”
가모가 나서자 선화 부인도 따라 나왔다. 그사이에 완성한 것을 의생과 의녀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가모와 벽예월이 나가자 천이재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