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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00화 (100/470)
  • 제100화

    100화

    아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황제가 노린 것이 그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힘을 갖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가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기가 가진 힘에 사람들이 벌벌 떨며 굴복하는 것을 봐야 비로소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진은 그런 황제가 부럽지도 않았고 그런 황제에게 좋겠다고 축하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너는 더 이상 천문관이 아니다.”

    황제의 말에 악진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진은 이 일이 어떻게 치달을지 알지 못했다.

    황제가 자신의 재주를 봤다고 그 자리에서 천문관을 교체해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일에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겠느냐. 옷이 젖었고 한기가 들려고 하는구나. 나는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고 들어가서 쉬다가 서도진을 다시 보도록 하겠다. 서도진. 짐의 곁에서 짐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늘의 비밀스러운 것을 보고 짐에게 알려 주도록 하라. 이 나라의 길흉화복을 미리 점치고 짐이 태평성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하라.”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아진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너를 새로운 천문관에 봉하노라.”

    그리고 쐐기를 박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폐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저자의 산본의가는 천살성을 갖고 태어난 자를 숨겨 두고 있습니다. 산본의가를 조사하셔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현혹되셔서는 안 됩니다. 폐하. 부디 소신의 충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폐하. 폐하!”

    악진혁의 말은 오래 이어지지도 못했다.

    황제의 명이 내려지지 않아도 그런 패악한 말을 하는 자에게는 즉시 호위가 나서게 되어 있었고 악진혁은 눈두덩이가 터지고 부어오른 채 뒤로 나자빠졌다.

    “한 마디만 더 지껄인다면 그때는 목을 벨 것이다.”

    음산한 경고가 들렸고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은 얼굴로 아진을 보았다.

    “다시 없을 기재가 났다고 하더니 이런 재주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황제는 자기가 본 것만 가지고 너무 많은 것을 확대하며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아진이 그 자리에서 큰비를 내렸다고 해서 가뭄이 올 때마다 비가 오게 할 수는 없을 텐데 그는 진실을 정확히 알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어 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알고 싶지 않은 진실들을 알게 될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돌리려 하는 것 같았다.

    “나와 함께 가자. 서도진.”

    “폐하. 소인은 천기를 읽을 줄 모릅니다. 그 자리에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올라가야 나라가 평안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진이 말하자 황제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 자격을 갖춘 이가 너이니라. 자격을 갖추는 것은 황제에 의해 완성된다. 내가 너에게 그리 말했으니 너는 그리하면 되는 것이다.”

    “송구합니다. 폐하. 소인은 의원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소인이 가진 미천한 재주로 천문관의 직분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노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진을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세력들이 떠올랐다.

    하나하나가 전부 함부로 할 수 있는 곳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진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득달같이 달려들어 미친개처럼 덤비고 버틸 자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가만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네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면 악진혁을 유임시키기를 바라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폐하. 악진혁은 천기는 읽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집과 편견대로 행동해서 폐하의 혜안을 가리고 무고한 백성을 죽이려 했던 자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 보아라.”

    황제의 말에 아진은 악진혁이 의개성의 병력을 동원해서 산본의가를 치려 했던 사실에 대해 소상히 밝혔고 악진혁은 자신의 계획이 그 자리에서 드러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한 듯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가셨다.

    “그것이…… 그것이 사실이냐!”

    황제는 기가 막힌 듯 악진혁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너를 믿었거늘! 내가 너를 믿고 일을 맡겼거늘 내 믿음을 담보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폐하. 저자가 간사하게 혀를 놀리며 하는 말에 넘어가지 마시옵소서! 저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옵니다. 저자가 하는 말은 그저 폐하를 속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하는 말일 뿐입니다!”

    악진혁은 이제 차근차근 생각할 정신도 없는 듯했다.

    황제의 얼굴을 보며 그 말이 옳다고 하는 게 두려울 뿐이었고 어떻게든 빠져나가겠다는 생각 밖에는 하지 못했다.

    “폐하. 소신의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저자의 말을 듣지 마옵소서!”

    그럴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그 자신일 뿐이었다.

    “금의위 부천호를 불러들이도록 하라.”

    황제가 태감에게 명하자 태감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사라졌다.

    악진혁의 말이 온통 거짓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데는 고작 일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짐을 능멸하려 한 것이냐. 악진혁!”

    다른 모든 죄보다,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난 듯 황제가 악진혁을 노려보았다.

    “저자가 천응문의 문주를 위해 산본의가를 치려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천응문의 문주도 취조를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아진이 고삐를 더욱 쥐듯 말하자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같던 아진이 그 말을 하자 기분이 한결 풀렸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다른 것도 바라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을 해 보아라.”

    황제가 말했지만 아진은 딱히 더 생각나는 것이 없었고 이 자리에서 잘못 대답하면 그게 오히려 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한을 늘려 주시면 어떠시겠습니까. 폐하. 바라는 게 있을 때 폐하께 청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크게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서도진. 너는 참으로 희한한 놈이로구나. 네놈은 짐이 무섭지 않은 것이냐. 그동안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고 살아남은 놈은 한 놈도 없었다. 아니. 살아남았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런 식으로 말을 한 자 자체가 없었다.”

    아진은 움찔했다.

    황제.

    명문세가의 가주나 구파일방의 장문인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

    게다가 인권의식도 없어서 이곳의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많았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곧 법이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가문을 멸할 수도 있는 것이 황제였다.

    누구도 황제의 결정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시대였다.

    시대에 따라서 황권이 약한 시기도 있고 무림이 통제되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황제는 정사마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고 무인들은 황군을 두려워했다.

    그 정점에 선 황제.

    그가 지금 아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간청드립니다. 폐하.”

    “그러면 너는 무엇을 해 줄 것이냐.”

    “…….”

    아진은 진심으로 당황했고 급히 머리를 굴렸다.

    떠오르는 생각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반드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계속 아진을 바라보았고 아진은 침을 꿀꺽 삼킨 후에 말했다.

    “제가…… 기인들을 많이 압니다. 가끔 폐하를 찾아뵙고 그 기인들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것은 어떠실지…….”

    황제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아진을 보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어. 혹시 그 기인 중에 너의 스승인 검신도 들어가느냐.”

    “예. 폐하. 저희 스승님에 대한 얘기는 정말 많이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 스승님은 정말 재미있는 분이어서 말입니다.”

    황제의 폭소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 정도가 됐으면 그는 아진이 천문관 자리를 어지간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믿기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다. 그러도록 하지. 천문관은 네가 천거하는 인물로 정하겠다. 내가 너를 보니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은 죽도록 싫은 것 같지만 그래도 책임진 일은 끝까지 완수할 것 같구나. 네가 천거한 자는 인질이다. 가뭄이 오거든 그자를 대신해서 네가 비를 내리고 홍수가 오거든 하늘을 막아라.”

    “그것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폐하.”

    그 당연한 것을 자기 입으로 말을 해 줘야 하는 건가 했지만 황제는 웃었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누구를 천거하건 상관없다. 내가 그자를 천문관에 봉하는 것은 너의 천거 때문이니 말이다. 실제로 이 나라의 천문관은 너라는 것을 명심하라. 그리고 네가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네가 천거한 자는 죽게 될 거라는 것을 명심하라.”

    “악진혁 대인을 천거합니다. 폐하.”

    황제는 아진을 보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는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음이 나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곧 웃음을 거두고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아진을 노려보았다.

    “일주일 후에는 그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어야 할 것이다. 가 보아라.”

    “…….”

    아진은 자기에게 섭섭하게 했던 사람들을 전부 떠올리면서 누구를 천거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황제가 먼저 자리를 떠나자 동각대학사를 비롯한 북리의천의 지인들이 일제히 아진에게 다가와 그를 둘러쌌다.

    “소협. 잘 했네. 정말 대단했네.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과연 검신 대협의 제자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대인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본가가 큰 곤궁에 처했을 것입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황상이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아진이, 그리고 그 황상의 앞에서 뻣뻣하게 굴던 아진이 그렇게 나오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북리의천이 그들에게 지급을 보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서로 난처해하며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결론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용은 까다로웠지만 지급을 보낸 이가 북리의천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었다.

    북리의천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별별 수를 다 써서라도 그 자리를 피했을 것이고 아진은 황상을 알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대가 북리의천이었던 것이 아진에게도, 그들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대인들은 혹시 천문관으로 천거할만한 사람을 알고 계시는지요?”

    아진이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아진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다시 나왔다.

    그럼 자기는 어디서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건가 하며 동각대학사와 함께 터덜터덜 린린에게 돌아가자 린린이 아진에게 달려왔다.

    “오라버니. 어떻게 됐어?”

    “엄청났다네. 여기에서도 보이지 않던가? 바닥이 쓸려 내려갈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지. 뇌성벽력이 몰아치고 나무가 뽑혀나갈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고.”

    동각대학사는 자기가 먼저 나서서 설명해 주었고 린린은 신이 난 얼굴로 아진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제 걱정할 일은 다 끝난 거네?”

    “아니야. 나한테 천문관을 천거하래.”

    “……왜? 아는 사람 있어?”

    린린의 말에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누굴 알겠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린린 역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기뻐해야 할 때인데 천거 문제가 고민이 되기는 하는 모양이군.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오늘은 그냥 마음 놓고 기뻐하도록 하시게.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

    “예. 대인. 오늘 일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동각대학사의 말에 두 사람은 그에게 다시 한번 깊이 고마움을 표하고 그곳을 나섰다.

    린린의 얼굴이 밝아진 것은 두 사람이 황궁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아아!”

    “왜? 생각난 사람 있어?”

    린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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