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99화 (99/470)

제99화

99화

“그래. 그렇지. 누구 동생인데.”

아진은 동각대학사를 따라 나갔고 린린은 동각대학사가 마련해 준 곳에서 그를 기다렸다.

“검신 대협이 보내오신 서찰은 읽어 봤네.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천문관과 대결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 같던데.”

“맞습니다. 대인.”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큰 도박을 하는 거네. 검신 대협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부탁을 했다면 들어 주지 않는 건 물론이고 아마 크게 화를 냈을 거네. 천문관은 우리에게도 쉬운 사람이 아니네. 자네가 이기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얘기야.”

“책임지겠습니다. 대인.”

이런 말에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고 아진은 자기도 확실한 대답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동각대학사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과연 소문대로군. 명불허전이야. 청출어람이라더니 자네가 아니면 누가 검신 대협의 제자에게 그런 말을 듣게 하겠나. 스승이 너무 뛰어나면 그 명성에 가려져서 제자가 충분히 자라지 못하게 되기도 하는 법인데 자네는 그 우려를 뛰어넘었군.”

동각대학사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좋네. 이 정도는 돼야 우리도 같이 운명을 걸어볼 만하지. 이미 시작은 됐지만 말이야.”

아진은 자기가 모르는 동안 일이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동각대학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천문관은 무서운 사람이네. 우리는 한편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검신 대협이 어제 소식을 전해 왔을 때 모두 그 자리에서 뜻을 같이했지.”

“믿어 주신 것에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동각대학사가 툭 내뱉듯이 웃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말. 다시 돌아오는 자리에서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

동각대학사가 손을 뻗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폐하께서는 나름대로 공정한 분이시네.”

그러면서 함께 후원에 들어섰을 때 무가의 대연무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터무니없이 넓은 후원에 몇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아진은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황제.

모두의 위에 우뚝 서 존재하는 이가 그곳에서 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하지 말게. 폐하는 모든 것을 아시네.”

동각대학사가 해 준 말이 아진에게 도움이 되었다.

아진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이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동각대학사와 아진이 들어서는 것을 본 이후 계속해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이미 아진에 대해 얘기를 들은 듯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서 오라. 그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진은 북리의천에게 미리 들어 두었던 대로 예를 갖추었다.

혹시나 자기가 실수하는 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미칠까 하는 생각에 잠시 긴장이 됐지만 행동을 당당히 했다.

“저기 천문관도 오는군. 화가 난 얼굴이야. 그럴 만도 하지. 자존심이 상할 테니 말이야. 생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텐데. 나는 오늘 아주 기대가 되는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말이야.”

황제가 말을 하는 동안 악진혁이 다가왔다.

그는 황제에게 예를 올리고 나서 아진을 노려보았다.

아진은 태연한 얼굴로 악진혁에게 인사를 올렸다.

“다시 뵙습니다. 악 대인.”

“네놈이 뭐라고 이곳에 있다는 말이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같이 천한 것이! 네가 검신 대협의 제자라고 간이 부은 모양이구나.”

“제 간은 지극히 정상이라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진의 말에 악진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천문관. 사사로운 말은 하지 말라. 천문관이야말로 지금부터 말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곳은 짐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는 말이다.”

“소, 송구합니다. 폐하.”

악진혁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천문관의 재능을 아낀다. 그러니 짐의 앞에서 내가 천문관을 계속 아껴야 할 이유를 알게 하라.”

악진혁은 다시 아진을 노려보려다가 황제가 한 말이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렸다.

“누가 먼저 하겠는가. 그래도 주인이 먼저 하는 것이 낫겠지.”

황제의 말에 악진혁은 긴장하는 기색이 없이 바람을 불러들였다.

아진은 신기한 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악진혁이 그것을 하는 방식이 신기했던 것이다.

무공보다는 주문과 법술에 능한 모산파에서 특이한 술법을 전수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늘에 널리 흩어져 있던 구름이 빠르게 모여들면서 물기를 머금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곳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었다.

낮게 깔린 풀들이 몸을 눕히며 위이잉, 윙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과연……!”

어느새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처음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을 구경했다.

황제의 곁에 시립해 있던 이가 특이한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우산을 펼쳐 황제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바람이 제법 세서 두 사람이 우산의 기둥을 나눠 들었다.

동각대학사의 얼굴은 기묘하게 변했다.

그것은 북리의천의 부탁을 받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재미있게 됐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천문관이 비를 내렸구나. 그럼 이제 그대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아진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악진혁이 나섰다.

“소신이 모아놓은 구름으로 비를 뿌리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으니 비구름을 모두 거두고 이곳의 빗방울을 모두 말려 버리게 하는 것은 어떻겠는지요. 폐하.”

순간적으로 아진의 표정이 굳었다.

린린과 함께 연습한 것은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불러 모으고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내리는 것이었지 그것을 거두게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만. 어찌 생각하느냐.”

아진은 린린이 알려주었던 구결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응용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송구하나 저는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폐하.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저의 힘으로 구름을 불러들이고 비를 내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제 재주를 보여 드릴 수는 있습니다.”

황제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것을 허락하고 말고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듯 도도하게 아진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게 한 그 시간은 일부러 아진을 애태우기 위해 그런 듯했다.

“하오나 폐하.”

악진혁은 그 처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황제는 그의 말을 막았다.

“시작하여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진은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바르게 섰다.

린린이 가르쳐주었던 구결이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고 들어 올린 두 손으로 마나가 빠르게 치달았다.

이미 빛을 잃었던 하늘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흑암에 잠기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것이 충분한 어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손짓에 천공에 남아 있던 빛이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소멸해 가기 시작했다.

* * *

“저, 저게…… 저게 대체 어떻게 된……!”

누군가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 나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굉음에 저마다 몸을 웅크리며 움찔했다.

뇌성벽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고 모두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폐하. 여기에 계셔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황제의 곁에 시립해 있던 자들은 갑자기 불어닥치기 시작한 광풍에 우산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기둥마저 부러지자 황급히 나서며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볼 것이다. 보아야겠다. 계속하라.”

황제의 말에 아진은 두 손을 힘껏 들어 올렸다.

변형에 변형을 거듭했던 무공이 다시 한번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구름 가득 뇌기가 번쩍였고 구름 위에서 신선들의 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샛노란 빛이 번쩍거렸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런 것도 빗방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굵었다.

처음에는 감격하며 이것이 가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올려다보던 황제와 측근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맺힌 것은 그때였다.

가뭄에 대한 대비가 되겠다면서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폭우에 휩쓸릴 일을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만! 그만하라!”

황제가 소리쳤고 아진은 서서히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형식적으로는 경쟁이었고 황제의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이는 거였지만 그는 그 순간 깨닫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 단계 위로 올라갔다고.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 다른 생각을 했겠지만 아진은 린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천마라는 녀석이 다시 살게 됐는데 그 힘을 되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저는 우두커니 물러서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아진에게 전수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체념한 것 같지는 않고 묘하게 설레는 듯했다.

제가 가진 힘으로 아진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에 아진도 웃었다.

‘나는 운이 좋아. 나는 운이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어쩌면 한순간도 그런 적이 없었던 건지도 몰라.’

무림 세계로 오기 전 실망스러운 사람들을 만났던 것도 불평만 할 일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세상과 인간에 안주했을 것 같으니까.

그랬다면 어느 날 덜컥 상태 창이 나와서 무림 세계로 가고 싶냐고 했을 때 흔쾌히 그러겠다고 마음을 정하는 게 어려웠을 테니까.

그런데 그 세상이 뭣 같았기에 그 순간에 바로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서도진이라 했느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 폐하……! 저, 저자가 사특한 방법으로!! 저자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지금 사악한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저런 힘을 사용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악진혁이 소리쳤고 황제가 그를 막았다.

“닥치거라. 악진혁. 내가 네 놈을 곁에 둔 것은 네가 실력으로 너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너는 졌고 서도진은 너를 눌렀다.”

서도진은 너를 눌렀다.

그 말이 악진혁의 머릿속에 박혔다.

왠지 그 말을 들으면서 천살성을 누른 별이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 내가 생각한 게 틀린 거였던 건가. 북리소은은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가 아닌 건가?’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천기를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 별의 주인인지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폐하. 소신에게…… 소신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 자를 믿으시면 안 됩니다. 부디 혜안을 가리지 마옵소서!”

“그 입을 다물라고 하였다. 어찌 너 따위 놈이 짐을 능멸하려 한다는 말이냐. 짐의 말이 들리지 않은 것이냐. 아니면 내 말 따위는 듣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냐!”

황제는 참을성이 많은 자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시립해 있던 이의 칼을 뽑아 들어 악진혁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악진혁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살려 주시기를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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