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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96화 (96/470)
  • 제96화

    96화

    “린린. 나는 황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당분간 네가 벽 소저 좀 잘 챙겨줘.”

    “거기는 왜? 나도 가면 안 돼? 황도는 나도 안 가 봤는데. 벽 소저는 어머니랑 있는 게 더 편할 거야. 그렇죠. 벽 소저?”

    “아뇨. 저는 서 소저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벽예월은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저 무서운 사람에게 방금 자기가 뭐라고 말을 한 건지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됐다.

    그러나 천기를 읽는 자로서 사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린린의 곁에 있으면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것을 직접 볼 수 있게 됐는데 그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겁이 나는데.

    피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죽일 놈의 호기심이 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린린이 말없이 벽예월을 바라보았다. 아진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표정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데 벽예월은 자신이 지독한 심연에 내던져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 위에 성벽이 무너져내린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벽예월은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고 아진은 벽예월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벽 소저.”

    린린은 뒤에서 입을 삐죽거리고 고개를 돌렸다.

    벽예월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린린을 힐끔 보았고 아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진이 린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심술을 부리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황도에는 동생분이랑 같이 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요? 그렇기는 할 거예요. 내 동생이 함께 지내기에 편한 녀석은 아니거든요. 앞으로도 내 동생한테는 관심을 안 가지는 게 좋아요.”

    아진은 진심 어린 충고를 하고 일어섰다.

    * * *

    아진은 오랜만에 온 가족의 앞에서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혼자 다녀오는 거면 모르는데 린린이 함께 가는 것이라 사실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너 지금 황제 폐하를 뵙겠다고 한 거야. 아진아?”

    아진이 말을 하자 도종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이리 와 봐. 열 있나 좀 보자.”

    그러면서 침착하게 아진의 이마에 손을 댔다.

    조금 있으면 진맥까지 하려 들 것 같아서 아진이 몸을 뒤로 쭉 뺐다.

    “이번에는 임시방편으로 불을 끈 것뿐이야. 악진혁이 다시 와서 또 설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그래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산본의가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씀드릴 거라고? 누가 너를 들여보내 주기는 한대? 만나주겠다고는 하셔?”

    도종은 아진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듯이 걱정하며 바라보았다.

    “그러면 형님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그 말에는 도종도 할 말이 없었다.

    “거봐. 그 방법밖에 없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알현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황제 폐하께서 네 말을 믿어 주실 리가 없잖아.”

    “북리세가는 고관대작들과도 연이 닿아 있어.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 스승님께 말씀드리면 해결해 주실 거야. 적어도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게는 해 주실 수 있을 거야.”

    “그다음엔?”

    “폐하가 악진혁을 총애하는 이유가 뭔지 몰라? 내가 훨씬 더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 드릴 거야.”

    “비라도 내리게 할 생각이야?”

    도종은 말을 하고 나서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진에게 그것이 불가능하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강호에 알려진 수많은 무공.

    아진은 그 외에 이상한 것도 곧잘 해 보였다.

    그건 무슨 무공이냐고 하면 “무공?” 하고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런 아진이라면 그게 어렵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도종은 어느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떠날 생각이냐. 아진아.”

    아버지의 말에 아진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너. 시간 필요해?”

    “전혀.”

    “그래. 그럼 일찍 가자. 스승님도 뵈어야 하고. 나를 보면 누구냐고 하실지도 몰라.”

    아진의 말에 모두 웃으며 정말 그러실 거라고 말했다.

    “이제 자주 좀 찾아뵈어라. 너는 애가 너무 무심해서 탈이야.”

    어머니의 책망에 아진이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린린이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린린은 두 번째 삶을 사는 아진이 어머니의 순한 아들이 된 채 그런 말을 듣고 있는 게 웃겼던 것인데 따지고 보면 자기도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산본의가의 가주와 가모야말로 대단한 사람들인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SSS급 헌터와 천마를 꼼짝도 못 하게 쥐어 잡는 것을 보면.

    * * *

    다행히 아진은 산본의가를 떠나기 전에 금의위 부천호가 보낸 곽유천을 만날 수 있었다.

    곽유천은 부천호의 명을 받고 급히 이곳에 오느라고 내공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자기가 맡은 임무를 먼저 수행하기 위해 조금도 쉬지 않고 아진에게 말을 전했다.

    “부천호께서 전하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듣겠습니다.”

    “부천호께서는 악 대인이 왜 무리하게 이번 일을 진행하신 건지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유를 알아내셨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산본의가에 있는 북리소은 의원이 천살성이라는 별을 타고 태어났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운명이라며 북리 의원을 죽이려고 했다고 합니다. 산본의가를 공격하는 것의 이면에는 북리 의원을 죽이려는 목적이 있었고 말입니다.”

    아진은 잠시 눈을 감고 분을 삭이려 애썼다.

    “산본의가는 왜 같이 공격을 하려고 했다 합니까?”

    “그건 본인의 입으로는 말을 하지 않았고 저희가 따로 알아본 결과 천응문주 악산철과 악 대인이 혈연관계였습니다. 북리 의원을 처리하는 김에 천응문주의 일을 수월하게 해 주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천살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서 확실치도 않은 근거로 사람을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서 사사로운 정 때문에 산본의가를 공격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아진은 분노를 참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부천호께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화가 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황제 폐하를 직접 알현하고 그 일을 아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자가 부천호께 왜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까?”

    “천기를 읽고 하는 일이라고 하면 반박하지 못하고 따를 거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악 대인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닙니까? 전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악 대인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가 하는 말이라고 무조건 휘둘리거나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부천호께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대신해서 그 이야기를 꼭 전해 주십시오. 그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 일을 위해서 황도로 가려고 했습니다.”

    “서 의원님이 직접 말입니까? 어떻게 하시려는 생각인지…….”

    곽유천은 아진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설사 유발제의 일이 워낙 강렬하게 박혀 있어서 그 말에 깊이 신뢰가 갔다.

    “악 대인이 전대 천문관의 명성을 깎아내린 그 방법으로 그자를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릴 것입니다. 천문관은 황제 폐하의 신임을 잃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시간이 되지 않으면 증명할 수 없는 말.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

    곽유천은 아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제야 곽유천이 안심을 한 듯 웃음을 지었다.

    “의원님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의원님을 알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로 걸음을 해서 그 사실을 알려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곽유천이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이 있는 듯 아진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그…….”

    “뭔데 그러십니까. 뭐가 됐건 마음 편히 말씀하십시오. 들어 드리기 어려운 거면 제가 안 된다고 말씀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저…… 설사 유발제를 좀 얻어올 수 있으면 얻어와 보라고…… 그게 효과가 좋아서…… 그리고 만약에 양이 넉넉하다면 저도 좀…….”

    곽유천은 수줍게 자신의 사리사욕을 내비쳤고 아진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 말씀을 그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그걸 만드는 법은 약방 분들도 아시니까 지금 약방에 있는 건 전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새로 만들어서 쓰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하셔도 될까요? 너무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닌지.”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마다, 고마움을 크게 느끼는 대목이 다른데 설사 유발제의 효과를 눈앞에서 본 곽유천에게는 그걸 주겠다는 말처럼 고마운 것도 찾기가 어려웠다.

    아진은 그 때문에, 조금 전까지 온몸이 덜덜 떨릴 만큼 분노에 차올랐던 것도 잊은 채 크게 웃을 수가 있었다.

    악진혁의 의도를 알고 서둘러 떠나게 되면서 아진은 도종에게 그 일을 부탁했고, 도종은 북리소은에게 부탁을 했는데 북리소은은 다시 그걸 벽예월에게 부탁했다.

    갑자기 발작 환자와 열상 환자가 급히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을 치료하는 일에 급하게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벽예월은 북리소은이 말한 대로 곽유천을 데리고 약방으로 향했다.

    약방에 있는 설사 유발제를 전부 챙겨서 함께 가는 금의위 대원에게 주라고 했다.

    곽유천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소저를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소저와 함께 설사 유발제를 받으러 가는 중이었고 그 소저는 곽유천이 두 가마니나 되는 설사 유발제를 받아 오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마는 것이, 도대체 두 가마니나 되는 설사 유발제가 필요할 정도면 이 사람은 얼마나 힘이 들까 하고 걱정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수치스러운 것도 처음이었다.

    결국 그는 지상에 강림한 선녀 같은 소저를 보고 한 마디도 붙여보지 못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가 된 채 돌아서야 했다.

    * * *

    린린과 아진은 내내 툭탁거리면서 북리세가에 도착했다.

    “너는 대체 경공을 언제 연습할 건데? 그동안은 할 수 없어서 못 했다고 해도 이제는 할 수 있잖아?”

    “내가 무거운 것도 아니고 그거 좀 업고 왔다고 그게 그렇게 억울해?”

    “내가 억울해서 그러냐?”

    “맞잖아.”

    그들이 툭탁거리는 걸 멀리에서 지켜보던 북리세가의 위사들은 도대체 이게 누구냐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두 분 모두 좋은 말씀을 듣지는 못할 겁니다. 장로님께서 아주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어떻게 제자가 한 번을 찾아오지 않느냐고 정말 서운해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싱글거리면서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린린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 가득한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다 알 듯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린린도 그들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누가 오라고 하더냐. 여기가 어디라고 와!!”

    노성을 발하며 북리의천이 나타나자 아진이 그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큰일 났습니다.”

    “수작 부리지 마라. 이놈. 내가 네놈의 잔꾀에 넘어가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큰일이 났어요.”

    아진은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을 개의치 않고 말했다.

    “천문관이 소은 누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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