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95화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말을 걸어 주었고 벽예월이 모르는 얘기도 많이 해 주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오셨어요? 산본에는 처음인가 보네요?”
푸짐하게 생긴 중년의 부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네.”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그냥 여기저기가 좀…….”
“에그. 젊은 사람이……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특별히 중한 병이 아니면 의원님을 택하지는 못하고 순서에 따라서 배정된 분께 진료를 받게 되는데 다들 잘 보시니까 그것도 걱정할 건 없어요. 뭐. 그래도 신의님이나 두 분 서 의원님이 봐 주시면 더 좋기는 하지만. 북리 의원님도 잘 보시고요.”
벽예월은 그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과 긴장감 없이 얘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기다리다 보면 배가 고파져서 다른 사람들은 먹을 걸 갖고 오기도 하고 번호표를 가지고 객잔에 가서 기다리기도 하고 그래요. 처음이라 그런 걸 모르셨나 보네. 그래도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그냥 돌아가 버린 사람들 순서에 미리 진료를 받을 수도 있고. 꼭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들이랑 세상 돌아가는 얘기 듣는 것도 재미있고. 무사님들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그러면서 품에서 주섬주섬 떡을 꺼냈다.
“저는 괜찮아요.”
“아휴. 사양하지 말고 먹어 둬요.”
벽예월은 그 시간 동안 산본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게 됐다.
산본의가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절대적이라는 것도.
산본의가는 단순히 의가가 아니라 산본 전체를 아우르는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는 같다는 것도.
“나는 하북성 진주에서 왔어요. 알죠? 진주 언가.”
“들어 봤어요.”
“아이고…….”
중년의 부인은 자기가 할 말이 정말 많다는 듯이 먼저 한숨을 쉬더니 그때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가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거기는 무사님들이 우리 같은 것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아요. 길을 가다가 시비 걸고 행패를 부리는 건 아주 당연한 거고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다녀도 속도도 줄이지 않고 험하게 말을 타고 다니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누가 다쳐도 오히려 다친 사람한테 소리를 지른다니까요? 나는 그런 게 다 당연한 건 줄 알았지 뭐예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웃으며 그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랬으니 여기에 와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자그마치 북리세가의 무사님들인데 저분들은 얼마나 더 무서울까 했단 말이죠? 그런데 세상에. 다들 얼마나 친절하신지.”
이야기는 북리세가 무인에서 시작해서 여러 사람을 지나 가주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고 그 후에는 다시 두 공자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줄이 너무 길어서 오늘 안에 진료를 볼 수는 있을까 했던 벽예월은 어느덧 앞에 있던 환자들이 전부 사라진 것을 깨달았고 이제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준비했다.
아프지도 않은데 왜 환자 줄에 끼어서 기다렸냐고 타박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는데 지금껏 사람들이랑 대화 자체를 거의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일에 자신이 없고 먼저 걱정부터 들었다.
안내를 하는 사람이 한 사람씩 의원 앞으로 데려가고 마침내 벽예월을 향해 다가왔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다고 했죠?”
“아. 그게…….”
“아. 북리 의원님께 가시면 되겠습니다. 이리 오세요.”
북리 의원이라는 말을 듣고 벽예월은 안내하는 사람의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자리에는 당당해 보이는 여자 의원이 앉아 있다가 웃음을 지으며 벽예월을 맞았다.
“죽립이랑 면사를 쓰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네? 아. 어…… 네.”
“무슨 이유일까요? 괜찮으시면 벗어 주시면 좋겠는데. 벗으면 안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진맥만 할게요.”
“아뇨. 그건 아니고…… 사실 저는 서도진 의원님이 가 있으라고 하셔서 온 거라서…….”
“네?”
북리소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아. 아진의 손님이세요? 아진의 개인적인 손님이 본가에 찾아온 적은 없는데. 와…… 아진이랑은 어떤 사이세요?”
북리소은은 흥미가 생긴 듯 물었고 벽예월은 귀까지 붉게 물들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 그러면 진료를 보러 오신 건 아니네요?”
“네.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른 용무로 오신 분은 그냥 들어오실 수 있는데 새치기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러시는 건지 바로 오지 못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북리소은이 벽예월을 내원에 데려다줄 사람을 찾고 있을 때 마침 린린이 소청을 데리고 그곳에 나타났다.
“큰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는 아직도 안 왔어?”
시침을 하고 있던 도종은 고개도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때 되면 들어오겠지. 뭘 그렇게 걱정해?”
“걱정하는 게 아니라.”
린린을 발견한 북리소은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린린을 향해 손을 들었다.
“린린. 이리 좀 와 봐. 아진의 손님이 오셨어.”
벽예월은 그들을 따라가야 하는 건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은 오라버니 손님요?”
린린이 소청의 손을 잡고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
벽예월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고 숨이 멎을 듯했다.
천살성을 갖고 태어난 사람…….
소청을 본 벽예월의 눈빛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답답한 듯 자신의 목을 잡아 뜯을 듯 움켜쥐고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괜찮으세요?”
린린이 한달음에 다가오는 것을 보고 벽예월은 기함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천공에 흑암을 뿌려 자신의 존재를 감추었던 거대한 존재.
그 미지의 어둠이 벽예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소저. 소저?”
북리소은의 다급한 목소리에 도종과 서종욱이 거의 동시에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소은아.”
“그게…….”
북리소은은 린린을 보고 쓰러졌다는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자신 없어 하면서도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
서종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자리로 돌아가 시침을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벽예월은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이들이 그 두 사람이라서 어차피 금방 다시 기절해 버리기는 했지만.
* * *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꿈결처럼 아득해졌다가 어느 때는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해졌다.
“너를 보고 기절했다며. 그게 뭐가 이상해? 나는 딱 듣는 순간 그럴 만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평소에 얼굴에 신경 좀 쓰고 다녀. 이 만두야.”
그건 아진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왜 그렇게 안심이 되는지.
“정말 그런 건가?”
린린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것 같았고 아진은 확신에 차 있었다.
“분명해. 그릇 위에 얌전히 있어야 할 만두가 걸어 다니는 걸 보고 놀란 거야.”
“그런데 소청이 보고도 놀란 것 같던데.”
“소청이를 보고도? 아. 그러면 기절하는 게 취미라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기절하면 재미있거든. 사람들이 걱정하면서 괜찮냐고 물어봐 주니까 그걸 노리고 자꾸 기절하는 사람도 있어.”
“그래? 그런 것도 있어?”
“당연하지. 너는 오라버니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환자를 쉬라고 하는 건지, 깨우려고 하는 건지.
벽예월은 시끄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이 드나 봐.”
린린이 먼저 알아차렸고 아진이 벽예월에게 다가왔다.
“정신이 들어요?”
린린이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바람에 벽예월은 아닌 척할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는데.
눈을 뜨자 린린의 모습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쓰러질 때는 면사와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벽예월은 린린의 시선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아진도 그러더니 벽예월의 살인지소가 린린에게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한 집안에 두 사람이나 있는 거야? 아…… 그래서 천살성을 품은 자를 누를 수 있었던 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벽예월은 소청이 어디에 간 거가 하면서 두리번거렸는데 린린은 죽립을 찾는다고 생각했는지 그걸 들어 보였다.
“이건 여기에 있어요.”
“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쓰러지셨어요? 아버지가 기가 허한 건 아닌 것 같다고 하시던데. 정말 저를 보고 놀라신 거예요?”
린린을 보면서 벽예월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러나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죄송한데 조금만 더 누워 있어도 될까요?”
벽예월이 말하자 린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쉬세요. 얼굴이 창백하고 안색이 안 좋아요. 그런데 작은 오라버니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소저는 누구세요?”
쉬라고 했지만 정말 쉬게 해 줄 생각이 있긴 한 건지는 의문이었다.
“천기를 읽는 분이야. 전대 천문관이 몰래 키운 제자래. 벽예월 소저고.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갔는데 여기에서 지내라고 모시고 왔어.”
“아아. 멋지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악진혁이 꾸미는 일을 막지 못했을 거야. 아참. 야! 린린. 내가 엄청난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그러다가 아진이 벽예월의 앞에서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린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린린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이 둔탱이가 드디어 알게 된 거군. 내 존재에 대해서. 그걸 알기 위해서 천문관의 제자까지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린린은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된 게 어디냐고 생각하며 아진의 말을 기다렸다.
“벽 소저가 그러는데 하늘에 별이 몇 개가 나타났었다는데 그게 나인 것 같아.”
“……뭐?”
린린은 얘기가 잘 나가다가 왜 그렇게 빠지는 건가 하면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 별이 나타난 날이 네가 태어난 날이야.”
“그럼 내 별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아?”
그러자 아진이 거만하게 웃었다.
네까짓 게 뭘 알겠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겠지. 그런데 아니야. 잘 생각해 봐. 그날 그 별이 나타난 건 주인공의 동생이 태어난 날이라서 그런 거야.”
린린은 아진이 장난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라…… 버니?”
“너도 맞는 것 같지? 그래. 맞다니까? 나도 벽 소저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어우. 별이 막 나한테 집착하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치더라니까? 좀 짜증 나기도 하고. 왜 내 일거수일투족을 하늘에 대놓고 알려?”
린린은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약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심으로 경이로웠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확실히 오라버니가 평범하지는 않으니까.”
“악진혁이라는 천문관은 그런 구체적인 건 모른 것 같았고. 그래도 대단하기는 대단하지. 자기가 본 걸 가지고 산본의가까지 찾아온 걸 보면 말이야.”
“큰일 날 뻔한 거네. 잘했어. 오라버니.”
아진은 벽예월을 혼자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방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자기가 이곳에 있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이 돼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답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기를 읽는 것과 별의 주인을 알아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것을 놓쳤지만 벽예월은 이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을 자기가 알아본 것이 아니라 진실이 그녀의 앞에서 제 모습을 보여준 거라는 것을.
그것은 린린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서 조금씩 더 확신에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