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94화 (94/470)

제94화

94화

성주와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그의 측근이 된 이들은 다시 전장을 누비는 것 같은 흥분을 느끼며 성주와 똑같은 모습으로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특히나 성내에 있던 간자들은 그 소문을 듣고 재빠르게 성에서 도망쳤고 누구보다 열심히 소문을 퍼뜨렸다.

산본의가의 의원들이 우연히 성 안에 머물고 있다가 성주를 도와 원인을 찾고 있다는 말 역시 같이 퍼지며 사람들의 혼란은 어느 정도 선을 지켰다.

아진은 일이 재미있게 됐다고 생각하며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 * *

악진혁이 소문을 들은 것은, 반의반 쪽이 된 얼굴을 하고 간신히 객잔을 떠났을 때였다.

객잔을 나갔다가 마차를 급히 멈추며 객잔 변소로 달려 들어가기를 벌써 몇 번이나 하자 이제는 마차를 출발하라고 해도 마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차피 마차를 출발해도 금방 다시 세울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악진혁은 화를 내면서 마차를 당장 출발시키라고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다급하게 마차를 두들겨댔다.

그 정도가 되자 그가 천문관이고 뭐고, 마부와 금의위 대원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저러다가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겠는데? 그런데 이제 슬슬 냄새를 참아 주기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악 대인이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됐을까요?”

금의위 대원들은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말을 했고 곽유천은 폭소를 터뜨리다가 혼자 고개를 저었다.

설사 유발제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짓궂은 장난 정도로 치부했는데 그게 사람 하나를 엉망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악 대인이 누구인가.

그 자신이 행동거지를 늘 빈틈없게 해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고 칭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 만에 아주 꼴이 우스워졌던 것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웃고 있지만 악진혁은 변소를 오고 갈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거의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굴었다.

그 생각은 부천호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기회가 되면 자기도 그 약을 얻어 놓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변소에 간 악진혁을 기다리며 금의위가 길에 서 있을 때 한 사람이 지나갔다.

급히 경공을 펼치는 것을 보고 부천호는 뭔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불러세웠다.

경공을 전개하며 쉬지도 않고 멀리서부터 온 것 같았는데 그자에게 시간이 촉박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꼭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것이다.

“나는 금의위 부천호다. 무슨 일이냐.”

“……!”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금의위 부천호를 속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급하게 말을 꺼냈다.

지체하지 않고 빨리 길을 재촉하려면 그냥 얘기해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의개성에 난리가 났습니다. 성내에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사실을 빨리 전해야 해서 가는 중입니다.”

“전염병이라니?”

“죄송합니다만 시간을 지체하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혹시 괜찮다면…….”

“알겠네. 어서 가게.”

부천호는 그를 보내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우연일까?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오고 갔다.

“먼저 가 보아라.”

부천호가 곽유천에게 말하자 그가 경공을 펼쳤다.

‘설마. 그 공자가……? 그건 아니겠지?’

전염병이라는 것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미 며칠 전부터 증상이 나타났을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지만 그 생각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수록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고 부천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중에는 피식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러면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대장님?”

“악 대인이 나오면 얘기를 해 봐야겠지.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오늘 내로 이 객잔을 떠나기도 어려워질 것 같기는 하지만.”

마침 그때 악진혁이 나왔다.

걷는 동안 그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악 대인.”

“알았네. 객잔으로 가서 방을 잡게. 오늘은 거기에서 묵을 것이네.”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급히 지나가기에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의개성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듣고 급히 전하러 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악진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짠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그게 오늘이라는 말이냐!”

부천호는 악진혁이 그러는 것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산본의가에 대해 어떤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황상의 총애를 믿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결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금의위 부천호인 그도 황상이 가끔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니 만약 황상이 다시 부른다면 그때는 위험을 각오하고라도 오늘 일을 세세히 보고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악진혁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뭔가가 잘못돼 가고 있었다.

잘못될 여지가 없는 일이.

‘대체 어디에서 틀어졌다는 것인가.’

악진혁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손을 꼭 쥔 채 다시 종종걸음을 쳤다.

뱃속에서 다시 천둥이 쳤던 것이다.

* * *

산본의가의 사람들은 아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도록 알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도록 그랬다.

그러다 의개성에서 전염병이 돈다는 말을 들었고, 성내에 산본의가의 의원들이 머물고 있다가 성주를 돕고 있다는 얘기까지 전해 들었을 때 혹시 그곳에 있다는 의원이 아진인가 했다.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아진이라 새삼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거기에 간 거지? 전염병이라는데 위험한 건 아닌가?”

사람들이 걱정하는 동안 서종욱은 산본의 약방에서 약초를 사들여 의개성으로 보냈다.

가는 길에 약초를 뺏길 수도 있어 특별히 북리세가의 무인들에게 마차를 지켜 달라고 부탁도 했다.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그날 저녁에 의개성에 이르렀다.

의개성의 성주는 혹시 정말 천문관이 올까 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산본의가에서 약초를 보내왔다는 말을 듣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이 일이 아진이 독단적으로 꾸미고 벌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산본의가에서 약초를 보낸 것이 아무 계산도 없는 순전한 선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본의가는 장래가 밝구나. 계략에 능한 아들에, 인품이 훌륭한 가주까지. 이러니 사람들이 산본의가에 충성을 할 수밖에 없구나.’

그는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산본의가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그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흥미로운 것은, 처음에 산본의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곳들이 지금은 가장 열성적인 후원자이자 동료가 되어 산본의가를 안팎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 성주는 그동안 산본의가를 둘러싸고 나오던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 공자.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이 있건 산본의가를 도울 것이오. 의개에 전염병이 돈다는 말을 듣고 약초를 실어 보낸 것은 산본의가의 진심일 것이오. 전염병은 돌지 않았지만 나는 이 마음을 받겠소. 그리고 갚겠소.”

“감사합니다. 성주님.”

아진 역시 아버지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성주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깊은 파문을 일으킬 거라고는 알지 못했는데 때로는 아버지의 진심이 자신의 계략보다 훨씬 더 크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고 여겼다.

“서 공자에게도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이것은 단순히 보면 산본의가를 구해달라는 말 같지만 이 일로 나는 의개의 많은 사람을 살렸소.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서 공자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소만 오늘 아침에 그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소. 나야말로 서 공자에게 고맙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제 나가서 본가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내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시오. 기쁜 마음으로 도우리다. 주저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주 기대가 크오.”

아진은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곳을 나섰다.

가져온 약초를 내리고 성문 밖에서 돌아선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아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으이이익! 지금 어디에서 오시는 겁니까, 의원님?”

“저요? 성주님이랑 같이 있다가 왔는데요. 왜요?”

그러면서 아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들에게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하자 모두 기겁을 했다.

“의원님. 지금 이렇게 나와서 돌아다니시면 안 되잖아요?”

“아아.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아진이 태연하게 말을 하고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깍지를 낀 채 웃자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씀드린 대로죠. 다 거짓말이에요. 전염병은 없었어요.”

“네에? 그러면 그 약초는…… 괜히 주고 온 거네요?”

그러나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천금으로 살 수 없는 성주의 마음을 샀으니 아까워할 건 없어요.”

아진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그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의원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얘기가 그렇게 쉽게 하실 말씀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면 악 대인이 황명을 받고 온 거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리고 그 황명이 산본의가를 치라는 거고요?”

“그건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어쨌건 악 대인은 의개성에 가지 못했고 성주님은 산본의가에 고마워하고 있는 상태예요. 그게 현재 상황이죠.”

“…….”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진은 큰 소리로 웃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악 대인이 계속 설치지 못하도록 한 번 손을 봐 줄 거니까요.”

“제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건데요. 의원님? 의원님은 절대로 이런 문제를 그냥 넘어가시지 않잖아요. 아…… 그동안 살만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수련을 더 열심히 하셔야 할 거예요.”

아진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고 북리세가 무인들은 누가 저 사람 좀 말려 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간절하게 지었다.

* * *

산본의가에 나타난 벽예월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벽예월이 누구인지, 벽예월이 왜 그곳에 온 건지 알지 못한 사람들은 그녀가 환자라고 생각하면서 잘해 주었다.

면사에 죽립까지 쓰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벽예월은 산본의가의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진은 벽예월을 산본에 떨궈놓고 이동 마차를 잡아 준 후에 산본의가로 찾아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벽예월은 그 말에 따로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대답을 했다고 하더라도 말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이미 그의 모습은 저만치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벽예월은 아진을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차에서 오는 내내 산본을 구경했다.

그런 풍경이 그녀에게는 전부 다 낯설었다.

산본의가에 도착하자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고 벽예월은 혼자 앞으로 나설 용기가 없어서 줄에 끼어서 기다렸다.

줄은 그래도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의원의 수가 많기도 했고 이곳의 의원들은 속침으로 유명하다는 말도 듣게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