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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92화 (92/470)
  • 제92화

    92화

    기대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손님을 기다리며 솜씨를 발휘해 좋은 것을 만들고, 한 번도 열지 않은 술도 꺼내 두었다.

    ‘저 사람이 천살성을 누르는 자일까?’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소저께서 아시는 걸 전부 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공자께서는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벽예월은 그렇게 말했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아끼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스승을 떠나온 후, 혼자 이곳에 살면서 다른 사람의 방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스승이 보내준 사람이 주변에 뇌기가 흐르는 진을 만들어 주어 이곳에는 산짐승도 함부로 찾아들지 않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하늘에 세 개의 큰 별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에 나타난 것은 천살성이었는데 천살성을 품고 태어난 자는 수많은 사람을 죽일 운명을 가진다고 여겨졌지요. 그런데 처음 나타난 별은 사라졌습니다. 별을 품고 태어난 자가 별을 버렸지요.”

    “별을 버렸다고 하시는 것은…….”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는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운명을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사람을 죽이지 않게 됩니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강호의 명숙들은 수백, 수천의 악적들을 죽이지만 살인마라고 불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무고한 생명을 죽이지는 않아도 여전히 살인은 많이 하는 운명일 수도 있겠고요.”

    “다른 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는 천살성이 사라지고 얼마 후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나타났던 어떤 별과도 달랐어요. 그 별이 나타나고 하늘의 모든 별이 일시에 빛을 잃었죠.”

    “그 별이 너무 밝아서입니까?”

    “제 생각에는…… 그 별이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해요.”

    “그런 별도 있습니까?”

    아진은 그 별이 자기 별이었으면 했다.

    그게 자기 별이건 아니건 상관은 없는 거지만 그래도 사람 기분이 그렇지 않은가.

    자기 존재를 숨기기 위해 다른 별들이 빛나는 것을 금지하다니.

    별이 그럴 정도면 그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걸까.

    “그게 나타난 게 언젠데요?”

    아진은 꼭 그게 자기 별이라고 확인하려고 묻는 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벽예월은 웃으면서 그 별이 나타난 일시를 알려 주었다.

    “그런 별은 그 별을 품고 태어난 사람과 함께 나타나나요?”

    “그런 별이라는 말이 그 별에는 적용이 되지 않을 거예요. 천살성은 그런 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가능하지만 그 별은 동류가 없었어요. 스승님께서는 수많은 기사를 말씀해 주셨지만 스승님께서 해 주신 말씀 중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거든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되지 않았지만 아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별이 나타났다는 날이 언제인지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 버렸던 것이다.

    * * *

    “흑주야. 지금쯤은 오라버니가 알았을까?”

    린린은 턱을 괸 채 얼굴을 비스듬히 하고 서탁 위에 흑주를 올려놓은 채 앞뒤로 굴리며 말했다.

    “알았겠지? 알았을 거야. 바보만 아니면 다 알 수 있을 거야.”

    흑주는 그저 린린이 굴리는 대로 이리저리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 바보가 이번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떡하지?”

    린린은 흑주를 멈춰놓고 노려보았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번에는 알겠지?”

    린린 자신에게도 얼마 전에야 떠오른 전생의 기억이었다.

    50년째 폐관 수련에 들었다는 천마가 실은 훨씬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한 가지는, 마교사상 최초의 음양인 천마라고 알려졌던 천마가 사실은 여자라는 거였는데 이제 그 일을 알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기 전 천마가 자신의 몸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린 탓이었다.

    전생은 성공적이었다.

    천마가 새로운 생에서 바란 것은 별것이 없었다.

    이번에는 오지랖 부리지 않고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고 인간답게 딱 적당히 짧고 굵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죽은 후에 사후 세계에서 만난 염마에게 요구를 말하자 염마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천마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그는 천마의 뜻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염마의 부하 중 악복조판관과 도사조판관이 천마에게 나가떨어지고 주선동자까지 가루가 되는 것을 보고 대나리차귀왕이 염마의 앞에 납작 엎드려 제발 천마의 뜻대로 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결과였다.

    염마는 구음절맥에 걸린 여자아이의 몸을 준비하라고 했고 천마는 흡족해하며 환생을 준비했다.

    산본의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모조리 잃었고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아진과 함께 한 여정 동안 곳곳에서 기억의 조각을 발견했다.

    결정적으로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은 소청의 아버지가 소청에게 전수하려고 적어놓은 구결들을 보면서였다.

    그 구결이 왜 그렇게 익숙한 건지 알 수 없었던 린린의 머릿속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겼고 한 번 생겨난 균열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거의 모든 기억이 회복되었다.

    ‘뭐. 별것도 없네. 우리 오라버니는 힐러였는데. 그것도 SSS급.’

    SSS급이 뭔지 정확하게 감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하면서 잔뜩 뻐기던 아진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흑주야.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나한테 물을 텐데 아는 척을 하는 게 좋을까,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까? 내가 천마라고 하면 나를 대하는 게 어려워지려나? SSS급 힐러랑 천마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내가 이기겠지?’

    린린이 혼자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벽예월의 처소에서는 길고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진은 벽예월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그 날이면 우리 린린이 태어난 날이잖아? 내 동생이 태어난 날이라고 별이 나타난 거야? 미치겠네. 내 인생 주기에 맞춰서 별이 한 번씩 나타나는 모양이네. 내가 동생을 얻은 날. 내가 성년이 된 날. 그런 식인가? 맞네. 정말 맞는 것 같아. 내 생일이 며칠 안 지났잖아. 그래서 이번에 별이 나타난 거야! 뭐야. 스토커야? 이 정도면 무서운데?’

    아진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제 턱을 문질렀다.

    벽예월은 아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설명을 이어 나갔다.

    “네?”

    천살성이 다시 나타났고 다른 별이 그 별을 눌렀다는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뭐지? 그건 누구 얘기지? 하긴. 내가 하늘에 있는 별을 다 상관해야 하는 건 아닌데. 그런데 악진혁이 왜 우리 산본의가에 나타났냐는 말이야.’

    아진은 끝내 해답을 찾지 못했다.

    벽예월도 그 사실을 알았고 아진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미안해했다.

    그러면서도 벽예월은 그날의 만남이 소득 없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진과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본 그 별이 아진인 것 같다고 여겼다.

    원래 별은, 그 별을 품은 사람이 태어난 날 하늘에 뜨는 것은 아니고 며칠에서 몇 달까지도 차이가 나기도 하니 그것이 아진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벽예월은 할 얘기를 마치고 미련 없이 가려는 아진에게 말했다.

    이대로 인연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서였다.

    이런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사는 것은 너무 외로웠다.

    인생의 황혼에 이른 것도 아니고 같이 어울려 이야기도 하고 웃고 떠들고도 싶은데 남들에게는 쉽게 허락될 그 일이 유독 벽예월에게는 어려웠다.

    아진은 벽예월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벽예월은 천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립되었고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쓸쓸하게 세월을 겪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불쌍한 건, 대부분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다는 거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아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럼 산본의가로 같이 가죠.”

    “……!”

    벽예월은 그게 진지하게 하는 말일까 하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진은 짐을 챙기려면 오래 걸리냐고 묻더니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대답도 듣지 않고.

    ‘내가 안 간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러면서도 벽예월은 짐을 챙겼다.

    부천호가 벽예월을 그곳에 데려다준 이후에 짐은 거의 늘지 않았다.

    일각이 되지 않아 짐을 전부 싸고 벽예월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전각과 후원, 나무와 흙바닥, 다 무너져가는 담장에도 친절하게.

    어찌 보면 그녀에게 그것은 세상으로의 첫 외출이었다.

    * * *

    돌아온 악진혁은 얼굴이 반쪽이 된 것처럼 초췌해 보였다.

    “저기 오시네요.”

    금의위 대원이 말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악진혁의 얼굴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오려던 악진혁이 다시 몸을 부르르 떨면서 주먹을 움켜쥐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 탓이었다.

    부천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쯤 되자 이제는 무서울 정도였다.

    도대체 약이 얼마나 독하면 그러나 했던 것이다.

    ‘어쨌건 서 의원님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은 충분히 벌어놓을 수 있겠군.’

    부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진을 기다렸지만 아진은 그곳으로 가는 대신 의개성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의개성의 성주에게 그동안 너무 소홀한 것 같기도 하고 일이 생기기 전에 조금만 조처를 해 놓으면 큰일로 번지기 전에 수월하게 해결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악진혁도 그곳으로 올 것이라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길이 어긋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가장 편한 방법일 듯했다.

    성문을 지키던 관군 중 몇 사람이 아진을 알아보았다.

    그들 중에도 산본의가에 가서 치료를 받은 사람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산본의가의 공자님이 아닙니까. 여기는 어쩐 일이신가요?”

    아진을 본 사람들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참 쉽다.

    생각해 보면 전에도 이랬다.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지만 상급 헌터가 되고 나서는 모두 서도진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이미 자신들의 노력이 소용없게 됐다는 것을 그들 자신만 모른 채로.

    아진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먼저 호감을 보이고, 아진이 한마디만 해 줘도 감격할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좋은 약초가 들어와서요. 원래 들어오던 양보다 많이 들어왔는데 워낙 좋은 것들이고 나중에 또 나올 거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어서 덜컥 다 사 버렸네요. 성에서 상비약으로 갖춰두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와 봤습니다. 만약에 필요하다고 하시면 만들어서 드리려고요.”

    “……예?”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술술 나왔다.

    가끔은 제 머릿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가 그 이야기를 대신 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런 곳에서 사용하는 약이란 뻔하다.

    가장 애용되는 금창약은 만든 지가 오래돼서 차라리 안 바르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겉에서 볼 때 억 소리가 나는 곳들도 실제로 약품 관리는 그런 식으로 되어서 그 문제를 총체적으로 한 번 해결해 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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