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91화
“벽예월이라는 분입니다. 제가 보냈다고 하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의원님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이미 의원님이 오실 걸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좋겠군요.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부천호는 아진이 바닥을 차고 올라가 표홀히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함께 있던 금의위 대원들이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 저분 앞에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허공을 저리 밟고 가시다니요.”
“검신 대협이 괴물을 거두셨다고 하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부천호는 자신에게 중책이 맡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그의 얼굴이 의지로 빛났다.
* * *
“산본에는 요리 실력이 뛰어난 숙수들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어 시간을 두고 머물면서 객잔마다 다니며 음식을 전부 맛봐도 좋다고 하던데.”
그때까지 창문을 꼭 닫고 밖으로 얼굴도 비치지 않던 악진혁이 슬슬 배가 고파졌는지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말했다.
“시장하시면 객잔을 찾겠습니다.”
부천호는 무심한 듯한 표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더 긴장한 것이 드러나는 것 같아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식은땀까지 흐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부하들에게 서두르라고 명령을 내린 후 빠르게 말을 달렸다.
‘어떻게 해야 악 대인이 모르게 설사 유발제를 넣는다는 말인가.’
머리를 굴리던 부천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그가 고개를 돌려, 평소에 자신의 심중을 잘 이해하던 곽유천을 불렀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우리가 객잔에 도착하면.”
그가 소곤거리며 말하자 곽유천이 놀란 표정을 잠시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순조로웠다.
악진혁은 부천호와 금의위 대원들이 자기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명한 산본의 요리들을 맛보게 됐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좋은 요리를 맛보는 것은 그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산본 제일 객잔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마땅할 것 같은 객잔은 겉에서 보기에도 규모가 대단했고 그 앞에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식사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부천호. 우리가 오래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자리 좀 만들어 보지.”
악진혁의 말에 부천호는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나빴던 터라 옆에 있던 금의위 대원에게 말을 하려 했는데 그들을 알아본 점소이가 먼저 달려 나와 일행을 가장 좋은 장소로 안내했다.
점소이가 안내를 하는 동안,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다른 사람들과 합석을 하며 자리를 만들어 놓는 것이 보였다.
악진혁은 이런 호사 정도는 누리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상석에 앉았다.
점소이가 주문을 받고 나가자 금의위 대원 한 사람이 그를 따라갔지만 악진혁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주방이 어디인가.”
“주방…… 말씀이신가요?”
점소이는 왜 주방을 묻는 건가 하면서 곽유천을 주방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지금 급한 공무를 수행 중이네. 그래서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아. 요리가 나오면 그릇에 담는 건 내가 도울 테니 최대한 빨리해 주게.”
“아, 예! 나리.”
그들은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서둘러 음식을 준비했다.
“그릇은 어디에 있나. 상석에 계신 분은 천문관님이시네. 모시는 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이곳에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그릇을 내오게. 음식은 내가 직접 담겠네.”
“예. 나리.”
천문관이라는 말에 몇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안 쓰던 그릇을 꺼내오느라 분주했다.
‘과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좋은 그릇이 줄줄이 나오자 곽유천은 그릇을 꼼꼼하게 살폈다.
“나리. 이제 곧 요리가 다 됩니다. 다른 것은 제가 준비할까요?”
“아니네. 나도 돕겠네.”
“예, 나리.”
곽유천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약을 그릇 밑바닥에 먼저 풀고 그 위에 요리를 담았다.
처음부터 워낙 급하게 독촉을 하기도 했거니와 감히 금의위 대원이 하는 일을 유심히 바라볼 배짱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급히 요리를 담아냈고 풍성한 요리가 주인을 찾아 나갔다.
악진혁은 군침이 넘어가는 요리를 보고 처음부터 입맛이 돌았다.
“다들 어서 드시게. 이제부터 바쁜 시간이 될 테니 많이 들어놓는 게 좋을 거네.”
악진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모두가 묵묵히 식사를 하는 동안 악진혁은 빠르게 그릇을 비워 나갔다.
모든 것이 입맛에 딱 맞아서 그릇이 바닥을 드러내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정말 훌륭하군. 숙수를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야.”
혼잣말을 하며 요리를 게눈 감추듯 먹어대는 악진혁을 보면서 부천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에게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만약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겨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한참이 지나도록 악진혁이 아무 탈 없이 음식만 처먹자 부천호는 조금씩 애가 타들어 갔다.
“으음……!”
갑자기 악진혁이 손을 멈춘 채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워낙 소리가 짧고 빠르게 지나가서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악진혁도 그냥 잠깐 느껴진 감각이라고 생각한 듯 무시하고 지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우르르르르-!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갑자기 악진혁의 배가 요동을 하자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제는 그곳에서 품격 있게 앉아서 변소에 갈지, 식사를 마칠지 시간을 잴 때가 아니었다.
“변소가 어디에 있느냐!”
악진혁이 벌떡 일어서자 점소이가 깜짝 놀라며 그를 안내하려 하는데 급한 걸음으로 잘 따라오던 악진혁이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나리……?”
점소이가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어서 오지 않고 뭘 하시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악진혁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다려라.”
누군가 장을 쥐어 짜내는 것 같은 고통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러다가 잠시 평온한 상태가 찾아왔을 때 그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다시 한번 함정에 빠진 것처럼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그 간격이 점점 빠르게 찾아왔다.
그것은 흡사 해산하는 고통과도 견줄 만했다.
마침내 그가 변소에 들어가는 모습을 봤을 때는 점소이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만약 그 전에 일을 치렀다면 객잔의 운영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럭 겁이 났다.
점소이는 급하게 안으로 돌아가서 다른 손님들도 그런지 확인했다.
“저…… 나리. 혹시 음식이…… 이상한지요?”
점소이는 부천호에게 물었고 부천호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인가.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네. 저분이 워낙 속이 예민하시네. 이 일로 이 객잔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저분이 드신 것만 따로 조리를 한 것이 아니지 않나.”
“예. 나리. 맞습니다. 서둘러 달라고 해서 서둘러서 잘해드렸는데…….”
“우리가 서둘러 달라고 했다는 말은 저분께는 하지 말게. 괜히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으니.”
“아, 예. 감사합니다. 나리.”
점소이는 정말 마음을 놔도 되는 걸까 걱정하면서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러는 동안 금의위의 식사는 다 끝나갔는데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악진혁은 자리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차를 내오라고 해서 차를 다 마신 후에도, 후식을 먹은 후에도 그랬다.
금의위 대원들은 부천호의 태평한 모습을 보면서 다 함께 근심을 내려놓았다.
그 모든 근심을 혼자 진 악진혁만이 은밀한 장소에서 비명을 참아 내고 있었다.
“방 하나 잡아서 쉬고 있어도 되겠네요. 대장님.”
누군가 말하자 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졸리기는 하네.”
부천호는 말을 하면서 지금쯤 아진이 벽예월을 만났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 * *
아진은 원래 길눈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같이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로 놀림 받는 일이 굉장히 많았지만 이번에는 한 번에 잘 찾은 편이었다.
처음부터 부천호가 워낙 설명을 잘해 주기도 했고 벽예월이 머무는 곳이 특이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그녀가 먼저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좁고 높은 돌계단이 서른 개가 넘게 이어진 곳을 따라 올라가면 그곳에 산문이 나오는데 그 위로 조금 더 가면 작은 전각이 보일 거라는 게 부천호의 설명이었고 아진은 산문에 이르기 전, 계단에서 그녀를 만났다.
부천호에게 얘기를 들을 때는 상당히 나이가 지긋한 부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기와 고작 서너 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 보이는 것을 알았을 때는 상당히 놀랐다.
전대 천문관이 죽은 때와 그가 제자로 들여 가르친 것을 생각하자면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진은 벽예월과 마주친 후에도 자기가 찾는 사람이 맞는지 확신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고 벽예월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가 자신의 손님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올 거라는 궤가 떠서 설레는 마음을 달래려고 이 계단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릅니다.”
아…….
여자 목소리가 저렇기도 한 거구나.
아진은 쟁반 위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 목소리가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여자라면 자고로 우리 린린처럼 굵은 울림이 나는 믿음직한 중저음이 더 좋지 않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뭐. 연애하러 온 건 아니니까 참자.’
아진은 상쾌한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금의위 부천호의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예. 안으로 드시지요.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아진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히거나 호흡을 고르지 않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살인지소.
그것은 그녀가 속한 사문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나타나곤 하는 극강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자부심보다 불편을 더 겪었고 혼자 살거나 평생 면사와 죽립을 쓰고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웃음을 지으면 그 효력이 극대화된다고 하지만 벽예월의 경우에는 굳이 웃음을 짓지 않아도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신체의 변화를 겪었다.
그녀를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본 것처럼 경이로움을 느끼고 모두가 기본적으로 호감을 보였다.
한 번 본 후에 눈을 떼지 못 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녀를 잊지 못해서 처소에 찾아오거나 무단으로 침입을 하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벽예월은 그것을 자신이 받은 저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무덤덤한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천기가 희한했다.
천살성이 나타난 후 그렇지 않아도 곧 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유심히 하늘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천살성을 누르고 있던 별이 별안간 그녀가 있는 쪽으로 내려오는 것 같더니 그 위로 유성이 겹쳐졌고 그녀가 유성을 보는 사이에 사라졌다.
이상하다고 여기며 아침에 점을 쳐 보았더니 반가운 손님이 올 거라는 궤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