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90화 (90/470)

제90화

90화

“…….”

부천호가 검을 내리자 다른 금의위 대원들도 아진을 적대하지 않았다.

아진은 부천호를 향해 손짓하며 마차를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걸으며 자기 옷을 잡았다 놓았다.

“옷…… 말씀입니까?”

부천호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묻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금의위 대원의 옷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진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말을 손으로 가리켰고 부천호는 아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렴풋하게 알아차리고 뒤따르던 금의위 대원을 불렀다.

“서 의원님이 내 옆에서 가실 모양이다. 여분의 옷을 가져다드리고 말을 내드려라.”

부천호는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그대로 결단을 내렸다.

나이가 들고도 갓 태어난 아이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눈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부천호가 살아온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역량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일은 있더라도 고의로 남에게 엿 먹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부천호는 자신의 그 결정이 자기와 부하들의 목숨을 살리고 무고하고 선량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되기를 바랐다.

금의위 대원들은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 채 조용하게 움직였다.

아진은 금방 뒤로 사라져서 그들에게 받은 옷을 입고 말에 올라탔다.

관모 아래에 적당하게 얼굴이 가려져서 그가 산본의가의 의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다.

부천호는 다른 이들의 대열을 정비하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천천히 옆으로 빠져 금의위 대원들이 앞으로 가기를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아진의 옆으로 와서 말을 몰았다.

“우연히 들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진이 묻자 부천호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짐작 가는 것이 없습니다. 악 대인이 산본의가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왜 은혜를 이렇게 갚는다는 것인지. 산본의가에서 중독성 있는 약을 사용한 것이 사실입니까, 서 의원.”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의 병을 다스려 왔다면 그것은 산본 전체에서 보였을 것입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나와서 구걸을 하고 의가 앞에도 공짜로 약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거고 말입니다. 수입도 없는 자들이 약을 구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산본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두 활기와 열정에 넘쳤습니다.”

“악 대인에 대해 아시는 걸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진은 부천호에게 물었고 그것은 부천호에게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 역시 자기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 대인의 전임 천문관께서 악 대인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도 종종 그분을 모신 적이 있었는데 천기를 읽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욕심이 그 눈을 가릴까 봐 걱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잘 보았어도 해석을 잘못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보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인데 악 대인이 그 길로 빠질까 걱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악 대인이 천문관이 된 것은 그분의 천거 때문이었습니까?”

“그것도 있었지만 이미 그 전부터 황제 폐하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아직 전대의 천문관이 계실 때도 악 대인은 종종 그분의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를 말하곤 했습니다. 똑같이 천기를 읽는 거라면 어떻게 그렇게 반대되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할 정도였는데 그때마다 악 대인의 말대로 됐습니다.”

“……악 대인이 조작을 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아진이 묻자 부천호가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악 대인이 스스로 비를 불러오고 바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누가 그런 것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천호의 말에 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 곳에 비가 온 것처럼 하고 바람이 멈춘 것처럼 하는 것이야 초고수에게는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동시에 비가 내리고 날씨가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도 결국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겠지요.”

“……예?”

“만약에 제가 악 대인과 같은 의도로 뭔가를 꾸미려고 했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무가가 하나 정도 뒤에서 일을 도왔다면 더 쉬웠을 거고 말입니다.”

부천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것은 아진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려서라기보다 그때까지 그런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자신이 어이없어서 그런 것이 더 컸다.

무공이 무엇인가.

상승 무공 중에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온갖 것들이 존재한다.

관과 무림의 영역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황성에 무공을 하는 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부천호와 금의위도 무공을 익히고 그것을 기반으로 황상을 지키고 있었다.

황도의 삼십대 고수라고 불리는 이들은 강호의 고수에게는 그 실력이 미치지 못할망정 그중에는 절정을 넘어 초절정에 이르는 이도 있었다.

강호를 호령하던 이가 황실과 연을 맺어 관에 투신하기도 하고 관에 종사하던 자가 무림으로 가기도 하며 그 경계는 서로 불분명해졌는데 황궁에도 기사를 일으킬 수 있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악 대인이 그런 술수를 써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황제 폐하의 마음을 훔쳤다?’

처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아진이 조곤조곤 말하는 것을 듣고 나자 그게 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임 천문관의 죽음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악진혁에 의해 앞당겨진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이어졌다.

그런 생각으로 부천호의 머리가 분주해질 즈음 아진은 악진혁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느라 바빴다.

“악 대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만약 일을 꾸민다면 악 대인은 무엇을 위해서 움직이는 유형입니까? 자신이나 가문의 명예와 금전욕 같은 것 중에 특별히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천호가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내 그에게서 답이 나왔다.

“악 대인은 자존감이 대단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고 그 분야에서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거라면 이유가 됐을 것 같기도 합니다.”

“신념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군요. 누가 뒤에서 따로 사주를 한 것이 아니라요.”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악 대인은 따로 만나는 사람도 없어서 그 말만큼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황제 폐하께서 악 대인에게 따로 사람도 만나라고 하셨다고 했을 정도니 말입니다. 악 대인은 하늘을 보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연구하고 자기가 알아낸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 말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와…….”

자기보다 더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를 읽었다.

그리고 산본의가를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고 산본의가에 하지도 않은 잘못을 뒤집어씌우려 한다.

‘나쁜 인간이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왠지 자기가 제갈세가에 한 짓이 떠오르면서 자기가 한 짓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간들이야 먼저 도발을 했으니까 죗값을 치른 거고.’

괜히 제 발 저려 속으로 변명을 하고 아진은 다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천기를 읽었다. 그리고 지금 산본의가를 찾아왔다.’

그 천기라는 게 혹시 자기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했지만 하필 왜 지금 온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찌나 집중해서 생각에 빠져들었는지 나중에는 자기가 탄 말만 대열에서 이탈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가 탄 말만 혼자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부천호가 조금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진의 모습이 흡사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아서 차마 재촉을 하지 못하고 부하들만 앞서 보냈던 것이다.

‘그자가 소은 누님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누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들은 정보가 아니라 하늘이 준 정보. 그랬다는 건 소은 누님의 도움을 받은 날 하늘에서 무언가를 읽었다는 것이고…….’

아진의 머리가 비상하게 움직이다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나에 대한 것일 수 있겠군. 그때는 해석할 근거가 없었다가 이번에 하늘에 뭔가 다시 나타난 거야. 악진혁은 소은 누님을 떠올린 거고. 그자는 자기를 고친 게 누님이라고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사실은 그게 나고? 내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산본의가를 치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위험한 인물인 걸로 따지자면 자기만큼 위험한 인물이 없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기느냐에 따라 황실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다.

‘악진혁. 충신이네?’

이런 결론에 도달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자기가 모시는 황상을 위해서 악진혁은 지금 마땅히 그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흐음…….”

아진에게서 앓는 소리가 나오자 부천호가 냉큼 그에게 다가왔다.

장고 끝에 해답의 실마리를 얻은 건가 하며 조심스럽게 아진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서 의원님이 혼자 생각에 잠겨 계신 동안 갑자기 떠오른 게 있습니다만…….”

“예. 말씀해 보시지요.”

“전대의 천문관께서는 사실 따로 천거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악 대인이 나타나고 그분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거라고 하면서 낙향을 권하셨지요.”

“제자인가요?”

“예. 제자라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고 존재가 비밀에 가려져 있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부탁을 받고 그분의 호위를 맡은 사람이 저였으니 말입니다. 아직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면 그분이 어디에 계실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천기를 읽으실 수 있을 테고 악 대인이 뭣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서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저희가 먼저 의개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일각이 되지 않아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그는 분말의 형태로 된 약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부천호에게 건넸다.

“아주 강력한.”

“예.”

“설사 유발제입니다.”

“……예?”

“악 대인에게 먹이십시오. 열 걸음도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

정말 이게 최선이냐는 얼굴로 부천호가 아진을 바라보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부천호에게 다시 한번 그 인물의 거처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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