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89화
“린린. 인간에 대한 불신은 너 혼자 가져. 자라나는 새싹까지 물들이지 말고.”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러네.”
“그 꿍꿍이가 뭔데?”
“그건 알아보는 중이야. 일단 그자가 천문관이잖아? 천문관이 움직였다. 그러면 하늘에서 뭔가를 본 거겠지.”
“뭘?”
“그건 지금부터 알아내야 해.”
린린은 정말 바쁘다는 듯이 소청을 데리고 총총총 사라져버렸다.
아진은 린린과 한 번 얘기를 하고 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린린이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도종을 보던 악진혁의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연정인가? 그래서 우리 형님을 질투하는 거야?’
천문관이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아진도 알고 있었다.
천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재능.
그런 사람이 가진 비뚤어진 욕심.
질투.
그 조합은 종종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아진은 결국 혼자서 바닥을 박차고 근처에 있던 전각 지붕 위로 올라갔다.
“아진아. 전에 너 때문에 기와가 떨어져서 사람들이 다친 거 알지? 웬만하면 평지로 걸어 다녀라.”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깜짝 놀란 아진은 발을 헛디딜 뻔했다.
이곳에서는 잠시도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 * *
금의위 대원들은 어느새 부천호에게 다가왔다.
그사이에 숱한 임무를 같이 수행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드물었다.
부천호조차도 이 일이 단순히 천문관의 호위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정확히 뭘 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님. 뭘 해야 하는 건지는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악 대인께서 뭔가 말씀을 하지 않고 계신 것 같은데 이러면 저희까지 위험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임무를 수행하다가 위험에 처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되면 개죽음을 당할 것 같습니다. 방패막이가 되는 것은 싫습니다.”
평소와 같은 상황이라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들 그것을 수긍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천호도 그 사실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내가 말씀을 드려보겠다.”
산본의가에서 나온 후부터 얘기를 하지 않고 혼자 마차에 들어앉은 채 아무 말도 없던 악진혁에게 다가가 부천호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창문은 열리지 않았고 부천호는 조금 후에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악 대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악진혁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느라고 그런 거라 해도 이번에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부천호는 마차를 세웠다.
자신의 목숨만이 걸린 일이 아니었다.
함께 있는 금의위 대원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그들은 용맹하고 자부심이 넘치는 자들이었고 싸울 이유가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자들이었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는 일에, 자기들이 왜 휘말렸는지도 모른 채로 죽어가게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마차가 멈추자 결국 악진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악 대인. 지금 어디로 가는 건지, 저희가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희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고 악 대인을 황궁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돌아가야 할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 정보도 알지 못하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되네. 나를 방해하지 말고 쓸데없이 마차를 두드리지 말고 내 상념을 방해하지 말고. 알겠나? 그렇게 가다가 적들이 나타나면 베어내게. 화살이 날아오면 그것을 튕겨내고 막아 내게. 재주껏 해서 나를 지키면 그만이 아닌가.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는 건가.”
악진혁은 말하고 창문을 닫았다.
그러나 부천호도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금의위라는 게 황제의 명령을 위해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부지기수이고 그 자신도 지금까지 그런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지금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동료가 싸움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너무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것을 보아 온 그였다.
그래서 더 이상은 그런 일이 반복되도록 묵과할 수가 없었다.
마차가 움직이지 않자 악진혁이 다시 창문을 열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분개한 것 같았다.
악진혁이 부천호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뭐 하는 짓인가. 이리 나오면 내가 황제 폐하께 뭐라고 고할 것 같은가.”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걱정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황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산본에서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황제 폐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제 말이 맞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악 대인을 무사히 모시고 오라고 명을 내리셨고 저희는 그 명을 수행하기 위해 작전을 세워야 합니다. 동선도,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는 아무것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악진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본의가에 다녀온 후 그의 감정은 진탕이 되어 있었다.
대수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감정은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북리소은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느꼈던 기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이 보인 웃음.
‘그 압박감의 정체가 뭐였다는 말인가.’
그는 분명 주눅이 들어 버렸고 그 결과 기분이 아주 나빴다.
거대한 범이 머무는 동굴에 들어가 범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만 보고 도망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범의 실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눈을 보고 범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 같은 느낌.
자존심 상하게도 그의 가슴은 계속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후로 머릿속에 천살성이라는 단어가 콱 틀어박혀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그자들은 위험하고 불온한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나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는 마차 안에서 수도 없이 같은 말을 되뇌었다.
얼핏 생각하면 황상을 향한 충정으로 그런 마음을 품는 듯해서 기특하게도 보일 수 있겠지만 충성을 바치기로 결단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자신의 이기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마음이었다.
황제가 저를 좋게 여기고 제 앞의 길을 탄탄하게 해 주고 있으니 황제와 뜻을 같이하고 그를 도우려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악진혁은 진작 다른 길을 갔을 인물이었다.
“악 대인.”
“의개로 갈 것이네. 의개로 가서 그곳의 성주를 만날 것이네. 그리고 그에게 산본의가에서 벌어지는 일을 말할 것이네.”
“산본의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부천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악진혁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악진혁은 일일이 남의 재가를 받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부천호 따위가 사사건건 그에게 반기를 들 듯이 설명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저는 그냥 대충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칼받이나 되면 될 것을 건방지게.
악진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들은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네. 내가 산본의가에 직접 간 것은 그들이 사람들의 육체를 중독시키는 약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그런 것이네.”
악진혁은 전에 미리 생각해 두었던 이유를 꺼내 놓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진짜 이유를 내놓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보다 사람들이 빨리 수긍할 수 있는 것으로 뭐가 있을까 하면서 궁리를 하다가 생각한 것이 그거였다.
“그자들이 사용하는 약초에는 문제가 있네. 한 번 사용하면 계속 사용하게 되지. 그게 의존도가 높아, 병은 나은 것 같지만 정신이 혼미해진 결과 자신이 느끼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네.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세.”
그 말을 들은 부천호는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그 말이 맞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는 것이 옳았다.
약에 중독된 자들이 약을 더 구하기 위해서 왔어야 했을 텐데 산본의가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부천호는 악진혁이 하는 말을 듣고 더욱 그를 의심했다.
분명히 무언가, 속이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인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뒤로 물러서자 창문이 닫혔다.
말은 그때부터 속도를 냈다.
의개로 가서 성주를 만날 것이고 산본의가에 분란을 야기할 거라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산본의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정보를 조작할 생각까지 하는 거였다.
‘산본의가와 천문관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천문관은 분명 산본의가의 의원 때문에 자기가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부천호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 대화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그들을 따라잡아 소리 없이 나무 위로 이리저리 몸을 옮기며 따라오던 아진이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던 것이다.
‘뭐야. 저 인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아진은 자기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가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자다가 봉창을 두들겨도 유분수지.
악진혁과는 나쁘게 얽힌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아진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은 추론으로 알아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의개로 가서 성주의 도움을 받아? 산본도 아니고? 산본의 성주는 우리와 결탁이 돼 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 거군. 의개의 성주에게 도움을 받아서 뭘 어쩌겠다고? 우리를 치겠다고?’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가까운 산본성을 놔두고 의개성까지 가서 그곳의 성주에게 도움을 청하겠다는 것은 그 이유뿐인 듯했다.
일단 그곳에 이르게 되면 그때부터는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고 그중 대부분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 제 목숨을 잃게 될 거였다.
‘남의 목숨이 소중한 걸 모르는 인간이군.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아진은 생각을 마치고 훌쩍 몸을 날려 바닥에 내려섰다.
부천호의 말이 지나가는 옆이었다.
부천호는 깜짝 놀라며 검을 들려고 하다가 아진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자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도 아진을 알고 있었다.
산본의가에서 보기도 했고 아진이 누구인지 워낙 유명해서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더 어려웠다.
북리의천의 제자.
죽은 자를 살렸다는 말도 있었고 그를 위해서라면 독고세가가 가문이 가진 모든 전력을 빌려줄 거라는 말도 들렸다.
그것은 그냥 뜬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만한 사람을 통해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는 산본의가와 부딪히는 것이 꺼림칙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확실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