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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88화 (88/470)

제88화

88화

악진혁은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그 일을 까맣게 잊었던가 하고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별안간 나타났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전부터 보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별이 나타난 것을,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사라지기 전 그 별은 주위의 모든 별을 압도했다.

만약 그 별을 지금 봤다면 악진혁은 그 별에 대해 좀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을 보는 법도 미숙했고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어떤 것을 살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불행이었고 그 별의 주인에게는 심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관모와 피풍의를 걸친 금의위가 산본에 들어서 관도를 달리자 사람들은 생전 본 적 없는 광경에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와 날카로운 기세에 사람들은 길 밖으로 미리 나가 피했는데 마차와 말들이 지나고 나자 흙먼지가 어찌나 피어올랐는지 콜록거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나오신 분들일까? 성에서 나오신 분들은 아닌 것 같던데.”

“혹시 황도에서 오신 분들 아닌가?”

“마차의 양각이 그럴 것 같기도 하던데.”

사람들은 되는대로 떠들어댔다.

어차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 하나가 호응을 해 주면 그게 진실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곳을 통과하기 전 악진혁은 객잔에 들어가 세신을 하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부천호는 굼뜨게 움직이는 악진혁을 보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렇게 닦달을 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한없이 여유를 부리는데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던 것이다.

그를 잘 보필하라던 황상의 특별한 명령이 아니었다면 부천호는 그 자리에서 당장 얼굴을 굳혔겠지만 황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표정을 감췄다.

악진혁은 황상이라도 알현하러 가는 것처럼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었고 그사이에 마차와 말을 깨끗이 닦고 단정히 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마침내 마차와 말들이 산본의가 앞에서 멈췄을 때 그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악진혁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향했다.

번호표를 나눠주고 줄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를 하던 사람은 감히 악진혁에게 오는 대신 달음질을 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열을 맞추어 절도있는 동작으로 나왔다.

과연 차기 맹주로 거론되는 자의 가문답게 그들의 움직임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북리세가의 천이재라 합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천이재는 금의위나 천문관의 앞에서도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천문관 악진혁이오. 수년 전, 전시를 치르러 황도로 가다가 객잔에서 큰일을 당했는데 그때 의녀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소. 그분이 이곳에 계시다고 들어 꼭 한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제야 겨우 시간을 내어 올 수 있었소.”

금의위들은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건가 하며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악진혁의 말을 들은 천이재의 표정은 서서히 바뀌었다.

“이런 일이 있다니. 시험에 합격을 하신 모양이군요. 천문관이 되셨다니. 저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때 의녀님이 아니었고. 아니. 뭐. 그거야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서 들어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천이재가 나서서 말을 하자 금의위가 곧 열을 지어 악진혁을 호위했다.

악진혁은 은혜를 갚으러 온 것처럼 순진한 표정을 한 채 주위를 꼼꼼하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북리소은을 발견했다.

처음 봤을 때의 청초한 모습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한 사람의 숙련된 의원이 앉아 있었다.

감히 여자로서의 무엇을 논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해 보이며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위엄마저 엿보였다.

‘의원이 어떻게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혹시 저것은 눈가림을 하려는 수단인가.’

악진혁은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늘이 그에게 알려준 진실이었다.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만 들려준 진실.

그는 자기가 진실을 맡은 자로서 책임과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이재가 보낸 사람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진혁에게 인사를 올렸다.

“산본의가의 가주인 서종욱이라 합니다.”

서종욱이 악진혁을 맞이하며 환영의 인사를 하자 악진혁도 예를 갖추어 응대했다.

“의원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많으나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 않지요.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다가 찾아와 주시다니 감격스럽습니다.”

“그날 북리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살지 못했을 것이고 천문관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악진혁은 말을 하는 동안 북리소은의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특히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보았다.

모두 의가의 사람들이고 친밀한 사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유지가 되는 게 피차에게 편한 법인데 유독 한 남자가 북리소은의 곁에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이 서 있었다.

‘왜 낯이 익은 것인가.’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서종욱이 말했다.

“이 아이는 제 큰 아이 도종입니다. 아. 그때 제 작은 아이도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른 곳에서 시침을 하는 중인데 시침이 끝나면 아마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서종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진이 그곳에 나타났다.

“아아!”

아진은 악진혁을 당장 알아보았고 악진혁은 자기가 도종을 보고 느낀 기분이 아진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그분이시군요? 복통 때문에 고생을 하셨던.”

“…….”

“시험을 보러 가신다고 했었는데 잘된 모양이군요.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진작 오려고 했는데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웠소.”

“황궁에서 시간 내는 것이 어려우면 그게 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총애하는 분이 많아서 그런 것일 테니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악진혁은 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북리소은은 악진혁에게 간단히 몇 마디를 한 후에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그녀가 구한 사람을 전부 데려다 놓는다면 그 줄이 미령을 몇 바퀴나 돌 텐데 느닷없이 지난 일이 생각나 고맙다고 말을 하러 온다고 그녀가 환자와 똑같은 감동을 하기를 바라는 건 너무한 감이 있었다.

아진만큼은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아진만큼은 악진혁을 살린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와. 내가 살려낸 사람이 천문관이 되다니. 천문관이면 대단한 건가? 금의위가 이렇게 졸졸 따라와서 호위를 하는 걸 보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지? 이야. 엄청나네.’

아진은 악진혁에게 한껏 친한 척을 하며 옛이야기를 주절주절해 댔는데 악진혁은 어쩐 일인지 북리소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가끔 시선이 도종에게 향했다.

도종을 향한 악진혁의 시선은 아무리 좋게 말을 하려고 해도 호감과는 거리가 있었다.

‘흠…… 뭐냐. 이 인간?’

10년도 넘어서 찾아와놓고 혹시 북리소은에게 연정이라도 품었다는 건가 하며 아진이 악진혁을 바라볼 때 아진의 곁에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고개를 돌리자 린린이 서 있었다.

“기척 좀 내고 다녀, 인마!”

“얘기 중이라 조용히 왔지.”

린린의 옆에는 소청이 있었는데 소청이 린린의 호위라고 따라다니는 건지 린린이 소청의 보모처럼 따라다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악진혁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슬슬 모여들자 왠지 압박감을 느꼈다.

그는 자기가 너무 준비 없이 왔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고 있었다.

할 말도 좀 더 철저하게 준비했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제는…….”

그때까지 조용하던 도종이 말하자 악진혁이 그를 바라보았다.

볼일이 끝났으면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예. 북리 의원님을 보고 인사를 하고 싶어 온 건데 이 이상 시간을 뺏는 것은 오히려 의원님을 난처하게 하는 것 같군요.”

“찾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보람도 느껴지는군요.”

북리소은은 억지로 쥐어짜 낸 듯한 말을 하고 딱 환자를 대하는 의원의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작별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악진혁은 당치도 않게 도종을 다시 보았고 깊은 불쾌감을 느끼며 돌아섰다.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제거하는 건 천기를 알고 있는 내 의무다. 그것이 전부다.’

악진혁은 다짐하듯 그 생각을 떠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재미있네.”

린린이 아진의 옆에 가까이 선 채로 말을 하는 바람에 아진은 느닷없이 귀에 뜨거운 입김이 들어와 소스라쳤다.

“아오! 떨어져서 말해, 이 인간아!”

“어머? 누가 거기에 있으래? 웃기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린린은 악진혁을 계속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데? 뭐가 재미있어?”

“천문관이야. 천기를 보는 사람. 내가 비룡채 아저씨들한테 들었는데 황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 중 하나가 천문관이래. 악 대인은 특히 날씨를 잘맞춰서 황제 폐하가 많이 아낀대.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의존하게 되잖아.”

“언제 비룡채 아저씨들이랑 그런 얘기를 할 시간이 있었는데?”

아진은 다른 것보다 오히려 그게 더 궁금했다.

“아아. 나 아저씨들이랑 친해서 자주 얘기해. 아저씨들은 약초를 구하러 여기저기 다니시니까 정보망이 제법 잘 갖춰져 있거든. 내가 제갈세가 사람들을 보고 생각한 건데 우리 산본의가가 정보조직을 만들면 개방이나 하오문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아.”

아진은 기가 막혀서 정신 차리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괜찮은 생각 같아서였다.

“맞지? 오라버니, 지금 나보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 다 했지?’ 그 생각 하고 있지? 우리도 앞으로 사업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어.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지만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재주는 조금 모자라시잖아. 우리 산본의가에 딸린 식구가 몇이냐고.”

다른 사람들은 환자를 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는데 특별히 할 일 없는 린린은 아진을 잡고 놔 주지 않았고 아진은 그 이야기가 그럭저럭 재미있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여기까지 내려온 거야. 그게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면? 바빴다잖아.”

“지금까지 계속 바빴던 사람이 이제 갑자기 한가해진 거야? 아니면 지금까지는 시간을 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극적으로 시간을 낼 수 있게 된 거야? 오라버니도 알겠지만 그건 의지의 문제가 더 크잖아. 시간을 내려고 하면 어떻게든 낼 수 있는 거고 내고 싶지 않으면 안 내는 거고.”

“…….”

아진은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세상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는 거냐.

왜 사람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를 않는 거냐.

할 말이 많았는데 린린이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서 대꾸를 못 했다.

“총애받는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이 말을 했으면 지금까지 한두 번 정도 내려오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야. 반대로, 그 말을 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으면 이번에도 못 왔어야 하는 게 맞는 거야. 고로!”

린린이 당당하게 말했다.

“저자가 여기에 찾아온 건 꿍꿍이가 있어서야.”

아진이 잘 듣고 있다가 린린의 뒤통수를 탁, 치자 린린이 즉각 아진을 노려보았다.

“스승님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사고님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요?”

소청까지 그러고 나서자 아진은 고개를 저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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