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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87화 (87/470)
  • 제87화

    87화

    “누님. 누님이 안 보인다 했는데 계속 일을 하고 계셨어요?”

    “그러기도 했고 아진과 린린이 워낙 유명인이라 나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아서 조용히 서 있었지. 아진도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더 보고 싶지 나 같은 건 이곳에 있다는 것도 기억도 못 하고 있을 것 같고. 내가 나서서 인사를 하면 누구냐고 할 것 같고.”

    북리소은이 조곤한 목소리로 자학을 하자 아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고운 누님이 와서 인사를 했으면 누군가하고 못 알아봤을 것 같기는 해요.”

    “어머? 이제 그런 소리도 할 줄 알고. 어서 들어가 봐. 바로 또 떠날 건 아니지?”

    환하게 웃던 북리소은이 곧바로 물었다.

    “네. 누님. 린린의 병이 완치된 것 같기는 한데 당분간은 옆에서 같이 지켜보려고요.”

    “그래. 아진아. 정말 대단해. 구음절맥을 고치다니. 하긴. 죽은 사람도 살린 너였으니 오히려 그건 당연한 거였을까? 아니다. 말하지 마. 내가 너무 오래 잡고 있다. 어서 가 봐.”

    북리소은은 아예 아진을 돌려세우고 그의 등을 밀었다.

    웃는 얼굴로 돌아섰던 아진은 순간적으로 도종의 얼굴에 떠오른 벅찬 감격을 본 것 같았다.

    린린이 나았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다가 뭔가 갑자기 깨달은 아진이 도종과 북리소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시 두 사람! 설마?”

    그렇지 않아도 북리소은의 나이가 차는 것이 안타깝던 차에 아진은 진작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당장 도종에게 달려갔다.

    “형님!”

    “야. 좀 조용히 해라, 인마.”

    “형님. 어떻게 된 거야? 누님에게 청혼은 했어?”

    “아니야. 아직 못 했어. 그러니까 너는 좀 닥쳐!”

    도종이 아진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갔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와하하하 웃어댔다.

    린린으로 인해 유예했던 행복.

    이제 그 행복이 그들에게도 허락되려 하고 있었다.

    * * *

    태어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겠다는 걱정을 이렇게 진지하게 해 본 적이 또 있었을까.

    아진은 몇 번이나 상다리의 안부를 살폈다.

    상 위에는 그동안 구경을 해 보기도 어렵던 요리들이 계속 올라왔다.

    수준 높은 객잔이나 기루 같은 곳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울 요리가 계속 나오는 것은 인근의 객잔에서 숙수가 보내와서였다.

    산본의가의 둘째 공자와 아가씨가 돌아왔는데 구음절맥을 앓던 아가씨의 병이 나았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것은 미령 뿐만 아니라 산본의 경사가 되었다.

    산본의가에 늘 빚진 마음을 지고 살던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빚을 갚겠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술도 여섯 동이나 보내주셨다. 미령의 주루에서 말이다.”

    도종이 아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말하며 오늘은 남자들끼리 원 없이 마셔보자고 했고 아버지조차 흔쾌히 찬성을 하며 의기투합을 했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진료가 끝나가자 하명준과 허우천이 안으로 들어왔고 오랫동안 의가를 지키던 북리세가의 무인들도 들어와 자리를 함께했다.

    다들 웬만하면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지만 아진과 린린의 안부가 너무 궁금해서 그냥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던 것이다.

    일단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할 얘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참. 선화 부인 말이다. 그렇게 바느질을 잘하는 분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참. 너는 그 일을 모르겠구나. 산본에 사파인들이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난리가 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온몸이 너덜너덜하게 찢긴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들었거든.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다 살리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화 부인이 내가 하는 걸 보고 있다가 자기가 해 봐도 되겠냐고 하시는 거지.”

    도종이 아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런데 선화 부인이 누구야?”

    “소청이 어머니 말이야.”

    “아아.”

    내내 부인이나 소청 어머니라고 불렀을 뿐 이름은 몰랐던 아진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신들린 듯이 바느질을 하시더라. 나는 다섯 땀 정도 꿰매고 잘하고 계시는지 옆을 돌아보면 매듭 좀 해달라면서 나를 보고 계시더라. 처음에는 그날 두세 명은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화 부인 덕에 전부 다 살렸잖아. 내가 처음에 상처를 봉합하고 시작만 해 주면 그다음부터는 선화 부인이 다 해 주시니까. 다른 의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

    “잘됐네. 잘 하실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 말고 다른 것도 많이 가르쳐 드려. 형님.”

    “응. 의욕도 대단하셔. 약초도 부지런히 익히시고 약초를 가지고 약을 제조하는 것도 열심히 배우려고 하시고. 네가 보낸 분이라는 걸 알고 사람들이 전부 다 잘 가르쳐 드리고 있어.”

    “소청이를 린린의 호위로 키울 생각이야.”

    아진의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린린의 호위? 소청이를? 아직 어리던데 그렇게 대단해?”

    도종이 묻자 북리세가의 무인들이야말로 눈을 빛내며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 아이의 어떤 부분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의원님?”

    그들은 자기들이 인정하는 아진이 소청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아마 다음날부터 소청은 수많은 사람이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계속 느끼게 될 것 같았다.

    “저는 무인에게 중요한 자질 중 하나가 의지라고 생각해요. 다른 것들은 어느 순간 깨달음이 찾아와서 뒤처진 사람이 앞서 나가기도 하고 지지부진하던 사람이 뛰어오를 수도 있지만 의지의 크기는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청이는 그런 면에서 이미 월등해요. 오는 동안에도 벌써 저희를 구했는걸요.”

    아진의 말을 듣고도 사람들은 설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아진은 그들에게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믿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년화리의 내단 얘기까지 하면 부지불식간에 욕심과 질투가 틈탈 수도 있는 부분이라 그 이야기는 뺀 채, 상태가 나빠진 린린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운기요상을 하는 중이었다고 하자 모두 수긍하며 들었다.

    그러다가 소청이 그들을 처치했다고 하자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어리던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도 물론 그렇게 하기는 했겠지만 왠지 그 아이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누군가 말을 하자 다른 이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그 말을 듣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마움을 느꼈다.

    어느덧 이야기는 린린의 병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고 도종이 아진의 팔을 팔꿈치로 툭 치더니 고갯짓을 했다.

    조용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해서 아진을 그를 따라나섰다.

    “왜. 형님?”

    “그냥. 내 동생은 너무 인기가 좋아서 이렇게 불러내지 않으면 나만 혼자 보기가 어렵잖아.”

    실없는 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진은 도종과 오랜만에 조용히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소은 누님이랑은 언제부터 그런 거야? 나는 생각도 못 했네. 혹시 스승님께는 말씀드렸어?”

    “아니. 지금이야 린린이 나았으니까 이런 말도 편하게 하는 거지 동생은 아픈데 나 혼자 욕심부리는 게 아닌가 해서 그동안은 내색도 못 했어. 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아진아.”

    도종이 크게 웃으면서 아진을 안았다가 놓았다.

    “형님. 이제 행복하게 살아. 형님이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해. 형님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 그러려면 형님이 행복해지면 되는 거야.”

    “그래. 고맙다.”

    “소은 누님 좋은 사람이니까 행복하게 해 주고.”

    “그래. 와. 되게 창피하네. 그런데 너한테 가장 먼저 말해 주고 싶었어.”

    “고마워. 형님.”

    도종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아진을 바라보았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냐?”

    “언젠가 나타나겠지.”

    둘이 같이 바라보는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 * *

    남다른 기세를 풍기는 사람들이 빗속을 해치며 말을 달렸다.

    그들의 가운데에는 멋스러운 마차가 달렸다.

    한참을 달리는 중에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가늘고 긴 손이 나왔다.

    지금껏 붓 외에 다른 것은 잡아보지 않은 듯한 손이었다.

    “산본은 아직인가.”

    “예. 대인. 송구합니다. 빗줄기가 거세져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두르게. 오늘 안에는 그곳에 당도해야 할 것이네.”

    “예, 대인.”

    천문관 악진혁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는 이 일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그는 품 안에서 만져지는 패를 움켜쥐었다.

    만약의 경우, 먼저 관군을 동원하고 사후에 재가를 받으면 면책을 받을 수 있는 패였다.

    ‘산본의 관군을 직접 동원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산본의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을 테니. 그래도 인근의 성주라면 쉽게 움직여줄 수도 있겠지.’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다.

    산본이 치고 올라가는 동안 산본의 성장세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이웃 성주들의 상실감과 좌절을 악진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그런 연약한 감정을 잘만 이용한다면 작은 힘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법이었다.

    금의위가 탄 말 한 마리가 빗길에 미끄러졌고 그 바람에 거기에 휘말린 말들이 연달아 수난을 당했다.

    대부분은 그대로 일어났지만 한 마리는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졌다.

    부천호가 말을 일으켜 세우려 할 때 마차의 창문이 다시 열렸다.

    “시간이 없다 하였네. 말이 불쌍하거든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한 번에 죽이도록 하시게.”

    “……예. 대인.”

    악진혁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 주고 무탈하게 돌아오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것이 황상의 명이었다.

    그러나 부천호는 이번 여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밤이 깊어가고 사방에 깔리는 어둠은 더욱 짙어졌지만 악진혁은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부천호가 따르는 사람과 말의 안전을 걱정해서 몇 번이나 말해 보려 했지만 악진혁은 그가 부르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겠고 그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결국 악진혁과 금의위는 새벽이 되도록 조금도 쉬지 못한 채 그 비를 전부 맞으며 이동했다.

    마차 안에 있던 악진혁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저 많은 환자를 데리고 가 주면 고마워하려나.’

    악진혁은 수년 전 객잔에서 보았던 북리소은을 떠올렸다.

    달빛을 머금은 한 떨기 꽃이 있다면 그와 같으리라.

    한때는 그녀를 연모했었다.

    천살성 같은 불온한 것을 품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청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황상을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늘은 그에게 천기를 읽을 수 있는 눈을 주고 별을 보여 주었으나 어느덧 아집에 휩싸인 악진혁은 제 머릿속에 잡힌 틀에서 벗어나 진실을 바라보지 못했다.

    동이 틀 때쯤 말 한 마리가 다시 쓰러졌다.

    부천호는 악진혁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말의 목을 쳤다.

    무관에게 말이 어떤 존재인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악진혁은 부천호가 저에게 묻지 않고 말의 목을 친 것을 알고 웃음을 지었다.

    이제 곧 산본이었다.

    산본의가.

    황궁에도 수없이 들려왔던 이름이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였던가.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던 제선문이, 그리고 그 뒤에 버티고 있던 남궁세가가 모두 그 산본의가 때문에 사라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악진혁은 그것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산본의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 그즈음 이상한 별이 나타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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