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86화
“여기가 산본이야.”
린린이 말하자 소청은 눈을 빛냈다.
“와아아아. 산본이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사고님.”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크지 않았는데 우리 산본의가 때문에 엄청나게 커진 거지. 예전에는 사람들이 본가에 오는데 몇 날 며칠이 걸렸거든. 멀리서 오면 여러 달이 걸리기도 하고. 고관대작들도 고치기 어려운 병이 있으면 여기로 몰려왔는데 길이 왜 이렇게 안 좋냐면서 화를 냈어. 그래서 관도가 이렇게 넓어진 거야.”
린린이 주절주절 설명하는 동안 소청은 잠시도 고개를 가만 놔두지 못했다.
“정말 대단해요. 사람도 엄청 많네요. 아픈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네요?”
소청의 그 말에 아진과 린린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소청아. 아픈 사람만 있으면 안 되지.”
그러면서 아진은 소청에게 사람들 앞에서 보이지 말아야 할 무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주의를 시켰다.
“내가 마지막에 가르쳐 준 북리세가의 검술만 할 수 있는 걸로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기는 하다.”
“네. 그런데 만약에 그걸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죠, 스승님?”
소청이 진지하게 묻자 린린과 아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끔 소청은 예상치 못한 말을 하곤 했는데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것은 소청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북리세가의 무인들도 여럿이 상주하면서 지키고 있다고 여러 번 말을 해 줬는데도 소청은 그래도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면 좋겠다고 했다.
소청이 괜히 그러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진은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 중에 네가 살리고 싶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네가 다 죽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는 그걸 사용해.”
“아아. 네.”
소청은 간단명료하게 정리가 됐다는 듯이 말했다.
린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소청이가 밝게 자라면 좋겠는데.”
“그래. 밝게 자랄 거야.”
아진의 말에 소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주가 저를 도와줘서 괜찮아요. 흑주하고 함께 싸우면 무서울 게 없어요. 어떤 때는 흑주가 저한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해요. 자기가 할 수 있는데 제가 혼자 다 해 버렸다고요.”
그러면서 헤헤 웃는데 두 사람은 소청이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흑주는 그 사이에 구슬 안에 품은 어둠이 더 짙어지고 구슬 자체의 크기도 커졌는데 흑주가 흡수한 것은 사람들의 진기만이 아니었다.
흑주는 처음에 있던 흑주의 조각까지도 흡수해 버렸는데 그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린린이었다.
린린은 이전 흑주의 조각들이 사라진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채 한참을 찾다가 나중에야 그것이 새 흑주에 흡수된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알아차렸다고 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왠지 묘하게 그 안에서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린린은 그렇게 믿고 싶었고 그 후로 흑주를 몹시 아꼈다.
“저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저런 곳은 처음 봐요. 산본에는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하던 게 많네요. 지붕에 뭘 널어놓은 것 같은데 저게 뭐예요?”
소청의 궁금증은 끝이 없었고 그때마다 아진과 린린은 번갈아 가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소청이 물은 곳은 약방이었는데 산본의가로 가는 곳에 약방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약초를 말리려고 지붕 위에 널어둔 모양이었다.
전에는 비룡채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뿐이었는데 약방의 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 같았고 어느 곳은 그 앞에 차양을 쳐놓은 곳도 있었다.
“저건 객잔 같은데? 저기에 객잔이 있었나?”
“그러게 말이다.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객잔까지 생겨났나 보다. 건물이 전보다 정말 많이 늘었어.”
“이제 지부를 내자는 말을 계속 무시하기는 힘들겠어.”
린린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도 이제는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도 산본의가가 날아오를 기회는 많았지만 서종욱은 의가를 키우는 것보다 린린과 가족들에게 더 집중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산본의가 출신의 의원들이 외부에서 산본의가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 것은 막지 않으면서도 그 자신은 따로 지부를 내지 않고 오로지 그곳만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터였다.
세 사람은 빨리 산본의가에 당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급히 서둘렀다.
산본의가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객잔에서는 번호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진료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다른 곳에서 와서 정착한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아진은 다른 약방들을 기웃거리다가 비룡채에서 하는 약방으로 들어갔고 마당에 채 들어가기도 전에 비명을 들었다.
“아니! 공자님이 아닙니까? 아가씨도 오셨네요? 언제 오신 겁니까? 세상에. 기별이라도 하시지요!”
아진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아직 아진 일행을 보지는 못하고 그 외침만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면서 달려왔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가서 어떤 사람들은 아진을 보러 오는 대신 산본의가로 달려갔다.
가주가 그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거였다.
“공자님. 그런데 아가씨가…… 아가씨 얼굴이…… 혹시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아가씨 얼굴이 건강해 보이세요. 떠나실 때하고는 완전히 다른데요?”
“저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이 잘못돼서 그런 건가 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 거지요. 공자님? 드디어 아가씨의 병이 나은 건가요?”
사람들은 감격하면서도 혹시나 자기들이 잘못 안 것은 아닌가 하는 듯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진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린린이 나았어요. 거의 완치가 된 것 같아요.”
“세상에. 세상에…… 하늘이 굽어살핀 모양입니다. 신의님이 그렇게 인덕을 베푸시니 하늘도 무심하실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듣고도 믿기질 않습니다. 어떻게 구음절맥을 고친다는 말입니까. 지금껏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지 않았습니까. 화타도 고치지 못한 병을. 세상에. 세상에……!”
사람들이 감격에 겨워 축하하고 놀라며 서로 떠들어대고 있을 때 아진은 서둘러 본가로 향했다.
곧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올 것 같았지만 그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청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린린은 그런 소청을 꼭 챙겼다.
결국 그들은 정문에 이르기 전에 산본의가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 많은 사람이 일제히 우르르 밀려 나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중에는 소청의 어머니도 있었는데 소청이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가 와락 안겼다.
“소청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소청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서로들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진아. 린린아. 어서 오너라. 무사한 것이냐.”
서종욱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린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진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아버지. 진맥을 해 보세요.”
아진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린린이 다가가서 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의 태도를 보아서도 이미 어느 정도 확신을 할 수 있었지만 서종욱은 떨리는 마음으로 린린의 맥을 잡았다.
생전 이렇게 긴장된 순간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덧 도종과 하명준도 옆에 와서 숨소리를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
아진은 행여 그녀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미리 가서 어머니를 부축했다.
“아버지. 저도 봐도 되겠습니까?”
도종은 마음이 급해서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서종욱은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서종욱이 그동안 린린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자신이 아파 주고 싶어 했고, 마음고생을 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눈물이 쉽게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도종도 린린의 맥을 짚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린린. 내 동생. 기특한 것. 기특한 것!”
린린은 큰 오라버니의 눈물과 콧물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고 기뻤다.
“아진아.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네가 린린을 고친 거지? 그렇지? 영약이라도 찾은 거야? 어떻게 한 거야? 응?”
산본의가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에조차 온전히 자신들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애가 탄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진료를 받으려고 언제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뭘 하는 것인가. 하던 일은 다 하고 회포는 나중에 풀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네.”
어느 깐깐한 사람이 말하자 몇 사람이 동조했고 하명준이 먼저 달려갔다.
오래전에 어엿한 의원이 된 허우천도 그 뒤를 쫓아갔고 다른 의생과 의녀들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번 심통이 난 것이 풀리지 않았는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나는 산본신의에게 진료를 받아야겠네. 고작 의생들에게 진료를 받으려고 여기까지 먼 길을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야.”
“이분들도 의원님들입니다.”
옆에 있던 의생이 좋게 말하고 해결을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꼭 산본신의에게 지금 당장 진료를 받아야겠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여기저기서 목에 힘을 주고 말하자 그때까지 조용하던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스르르 다가갔다.
“본가의 운영 방침에 불만이 있으면 그냥 돌아가면 될 것이오. 당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자들인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무림맹의 현무단원들도 와서 치료를 받고 있소. 본가의 방침에 따르면서 말이오. 이제 당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자들인지 들었으면 하오만. 참고로 나는 북리세가의 무인이오. 여기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오.”
서슬 퍼런 말에 기가 질린 사람들이 순간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채 눈만 뒤룩뒤룩 굴리며 슬그머니 뒤로 내뺐다.
“몸이 아프면 마음에 여유가 사라진다는 것은 나도 아오만 본가의 공자님과 아가씨가 오랜만에 돌아오셨소. 댁들이 나서서 소리칠 계제가 아니라는 말이오. 알아들었소?”
“…….”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사과까지는 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본체만체해 버렸다.
“그러게. 북리세가의 무사님들이 지켜주시는 곳인데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와서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사람들은 기분 나쁜 티를 감추지 않고 말했고 의원들은 도종에게 가주님과 함께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눈짓을 했다.
누가 뭐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이런 날까지 재회의 기쁨을 뒤로 미루고 환자를 봐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환자를 볼 사람들이 없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고 촌각을 다투는 급한 환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원으로 향하던 아진은 북리소은이 한쪽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