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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85화 (85/470)

제85화

85화

그러고 보니 크기도 조금 더 커지고 묵빛도 짙어져 있었다.

“린린.”

소청을 먼저 챙기느라고 린린에게는 묻지도 못했다가 아진은 뒤늦게 린린을 보았다.

“오라버니…….”

“그래. 내 동생.”

아진이 다가가 린린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살폈다.

홍조.

붉은 입술.

그것을 본 순간 아진의 눈에 습막이 맺혔다.

“…….”

고쳐졌나보다.

구음절맥이 고쳐졌나보다…….

아진은 린린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알았다.

“앞으로 몇 번 더 하면 확실하겠다.”

아진이 말하자 린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 나은 것 같아. 나는 알 수 있어. 내 몸이잖아.”

린린은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하더니 마침내 아진을 와락 끌어안아 와아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 내 몸이 달라진 게 느껴져. 아프지 않아. 힘들지도 않고. 이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으아아아앙!!”

서럽게도 우는 린린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아진도 같이 울었다.

두 사람의 어깨는 서로가 흘린 눈물로 흥건히 젖었지만 그날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아진은 자신의 오랜 인고의 결실을 보려고 린린을 다시 보고 또 보았다.

정말 자기 동생이라는 생각에.

이제 동생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스러워서 모두에게 소리쳐 주고 싶었다.

“이럴 게 아니다. 우리도 본가에 가자. 어머니 아버지께 보여 드리자. 도종 형님에게도 보여 드리고.”

“응.”

흑주도 즐거운 듯 린린의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정신 사나워서 좀 그만했으면 싶었지만 흑주에게도 같이 기뻐할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소청아. 힘들면 내일 갈까?”

아진이 말했지만 소청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도 빨리 가 보고 싶어요.”

그것은 소청의 진심이었고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갈 길을 서둘렀다.

잠시 후에 두 필의 말이 여유 있게 길을 지나갔다.

소청은 아진과 함께 타고 가면서 졸며 말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고개를 이리 떨구고 저리 떨구더니 나중에는 어쩌다가 고개가 뒤로 젖혀지자 그때부터 아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편하게 자면서 갔다.

아진은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린린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살인을 경험했다.

목숨을 끊는 것은 흑주가 나서서 했다고 하지만 결단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만약 흑주가 나서지 않았다면 소청은 주저하지 않고 사람들을 죽였을 것이다.

상대가 아진 일행을 향해 깊은 적대감을 가진 것에 비해 정작 실력 자체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것이 소청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제선문의 살수라면 실력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거였는데. 그런데도 그런 거네.’

아진은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남은 건 오라버니가 먹으면 되겠어.”

린린의 말에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필요 없어. 이미 남아돌 만큼 공력이 넘쳐나니까.”

“아무리 많아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아직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해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나는 오라버니가 먹으면 좋겠어.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뺏기지 않았지만 우리가 만년화리의 내단을 갖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걸 노리는 자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고.”

린린의 말은 한편으로 설득력이 있었다.

무림의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평소의 아진이라면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도 스스로 지켜내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사람 일이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특수한 상황이 생기거나 그가 아끼는 사람이 곤경에 처해서 뜻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일단은 본가에 가서 하자. 거기라면 안전할 테니까.”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부터 자주 꿈꾸는 표정을 지었다.

평생 가족의 짐밖에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이제야말로 자기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린린은 앞으로 뭘 어떻게 할지 생각이 많아졌다.

무공을 배울까?

아니면 의술을 배울까?

린린이 말없이 혼자 웃으면서 생각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아진이 말했다.

“이제 금방 혼인도 하겠다. 몇 년 있으면 조카도 보겠네. 그 전에 형님도 먼저 혼인을 하실 테고. 형님의 아이들이 먼저 태어나겠구나. 우리 집안에도 가솔이 늘겠어.”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오라버니도 혼인해야지.”

“나는 뭐.”

좋은 사람이 생기면 사이가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억지로 급하게 뭔가를 해 볼 생각은 없었다.

린린은 말이 없는 아진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 *

하늘을 올려다보던 악진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전시를 치러 황도에 왔다가 계획에도 없던 천문관이 된 지 올해로 8년이었다.

‘천살성(天殺星)이다.’

그는 전에도 천살성이 뜬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전시를 치러 황도에 가다가 객잔에서 죽다 살아난 일이 있었는데 천살성을 본 것은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그 빛이 기괴할 정도로 도드라졌고 주변의 모든 별을 압도했다.

오직 그 별만이 빛을 발했고 주위의 것들은 천살성에게서 몸을 숨기고 스스로 잊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자신의 힘이 폭주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천, 수만의 사람을 죽인다고 알려져 있었다.

어려서부터 살인을 시작하며 일단 폭주하면 적아의 구분이 없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를 죽인다고 알려졌는데 천살성이 뜬 곳이 그가 떠나온 곳과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악진혁은 시험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나 하면서 고민을 했지만 타오르는 것처럼 요동하던 기운이 스스로 잠잠해졌다.

‘천살성의 빛이 스스로 잠잠해졌다?’

악진혁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거야말로 기사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사히 황도에 이르렀고 장원 급제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처음에는 다른 일을 할 예정이었으나 천문관이 그를 불렀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남은 날이 길지 않다며 악진혁을 곁에 두고 일을 가르쳤다.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와 만난 적이 있구나.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악진혁은 진심으로 놀라며, 자기가 시험을 치르기 위해 황도에 올라오는 동안 그 별을 본 적이 있기는 하다고 말했다.

-돌아가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빛이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돌아갔으면 뭘 어쩌려고 했느냐.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별을 가지고 태어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낸 후에 관부에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빛이 스스로 사라져서 네가 목숨을 구했구나. 감히 네 상대가 될 자가 아니다.

악진혁은 천문관의 말이 더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가 네 목숨을 구했다. 너도 참 희한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구나.

-예? 그러면…….

악진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여자가……?

그는 북리소은을 떠올렸고 운명의 장난 같다고 여겼다.

자리를 잡으면 그녀를 찾아 청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녀가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어쨌건 이제는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라. 그 별을 가지고 태어난 이가 스스로 별을 버렸다. 그러니 큰 화가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나도 들어본 적이 없다만 너도 천기를 읽는 눈을 가졌으니 알고 있지 않으냐.

악진혁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후련해지기는커녕 더욱 무거워졌다.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나 세상에 풍파를 일으킨 악적은 몇 명이 있었지만 그 별을 스스로 버린 사람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자야말로 더 위험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악진혁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소저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폐하의 안위를 위협하는 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살린 사람이 서도진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악진혁은 오랫동안 그 생각을 품어 왔다.

시간이 지나도 그는 그 일을 잊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는 한 번 더 하늘에서 천기를 읽었다.

그날 남궁세가가 혈겁을 당했다.

그것을 보면서 악진혁은 천살성이 떠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때 떴던 천살성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 별을 가지고 태어난 자가 별을 버렸을까.

그래서 그 별이 사라진 것인가.

고뇌가 깊었지만 누구도 그를 대신해 해답을 찾아 주지는 못했다.

이제 그에게 천기를 읽는 법을 가르쳐 주던 천문관은 죽었고 악진혁이 스스로 천기를 읽고 황상에게 그것을 알렸다.

그날도 그는 천기를 읽고 있었고 그러다가 오래전에 보았던 그 천살성이 다시 뜬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 그는 숨 쉬는 것마저 잊을 만큼 놀라서 한동안 그저 멍하니 별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것이 왜 다시 나타난다는 것인가!’

그런데 그 빛과 형상이 희한했다.

분명한 천살성인데 전에 봤던 것과 달라 보였다.

‘주인이 바뀐 것인가?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서, 사라졌던 천살성이 다시 나타난 것인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천살성의 곁에 밝은 별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천살성의 빛을 넉넉히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천살성은 폭주하지 않고 그 빛에 기대며 의지하고 있었다.

-기사로다. 어찌 저런 일이 있다는 말인가. 누가 있어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를 저렇게 누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의 생각은 다시 복리소은에게 치달았다.

천문관이 된 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막대한 힘을 사용해서 복리소은의 행방을 쫓았다.

그리고 그녀가 산본의가의 의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 하필 그 별인가…….’

악진혁의 시름이 깊어졌지만 그는 고민을 끝냈다.

이제는 그가 천문관이었다.

그 말은 황실의 안위를 책임질 의무가 그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말이었다.

‘나를 살린 사람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 나도 참 불행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구나.’

그의 문제는 자신을 살린 사람이 북리소은이 아니라 아진이라는 몰랐다는 것에서 시작했고 천살성을 버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며 커졌다.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가 그 별을 버렸다면 이미 그 운명에서 벗어난 것인데도 그는 계속 북리소은을 천살성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천살성을 누르고 있는 별은…….’

거기서부터는 생각이 막혔고 악진혁은 산본으로 가 봐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자신의 열등감과 질투에서 기인한 마음이라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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