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84화 (84/470)
  • 제84화

    84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그 비를 동굴 안쪽에서 바라보며 아진은 전에도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림 세계로 이동한 후의 일인지 그 전의 일인지 그것조차도 희미했다.

    안에 피워 놓은 모닥불의 열기가 따뜻하고 동굴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운치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진은 조금씩 눈꺼풀이 감겨 오는 것을 느꼈다.

    “아. 졸려.”

    작게 말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린린과 소청은 어느새 서로에게 기대서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세가 불편했는지 린린이 먼저 눈을 뜨더니 바닥에 판판하게 모포를 깔고 그 위에 소청을 눕혀 주었다.

    소청은 눈을 뜨고, 안 졸았던 것처럼 눈에 힘을 주었지만 그러나 마나 몇 초도 되지 않아 다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무리 용기 있는 척, 괜찮은 척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래도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린린의 호위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소청을 보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지어지곤 했다.

    “와. 졸리네?”

    “오라버니도 좀 자.”

    “우선은 동굴을 좀 더 살펴보고.”

    아진은 말을 하고 나서 동굴의 안쪽까지 살펴보고 나왔다.

    상당히 높은 곳까지 올라온 데다 날씨까지 이래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러면 지금이야말로 린린에게 만년화리의 내단을 먹일 때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언젠가 자신의 스승인 북리의천이 자기에게 영약을 먹이며 진기도인을 해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평소에 여간해서 긴장을 하지 않는 아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도 별수가 없었다.

    잘못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린린과 가족들을 생각하면,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일까지 마구 상상이 되면서 걱정이 되곤 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만 해 보자.”

    “응. 그런데 우선은 자고 나서 해. 오라버니. 졸려.”

    “그래. 그러자.”

    아진도 이견이 없었다.

    잠시 후에 동굴에는 도롱도롱 코 고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소청의 소리가 가장 우렁찼다.

    반 시진 정도 자고 일어났을 때 밖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아직 비는 그치지 않은 상태였다.

    “기분은 어때. 린린?”

    “괜찮아. 괜찮은 것 같아.”

    린린은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한다는 기대감에 조금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금방 끝날 거야.”

    “응.”

    아진은 소청에게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일단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시키고 진기도인을 하기 시작하면 입을 열지 못할 것이라 소청이 혼자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알려 주려고 한 것이다.

    소청은 영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나도 기감을 열어놓고 있을 거고 혹시라도 누가 다가오는 것 같으면 일단은 갈무리를 할 테니까. 너한테만 맡기지는 않을게. 소청아.”

    “네…….”

    소청 역시 긴장이 되기는 했는지 그 말에 반가워하며 웃었다.

    마침내 준비가 끝났을 때 아진은 린린의 앞에서 가부좌를 튼 채 자리를 잡았다.

    “먹어. 린린.”

    “응.”

    린린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양을 떼어내서 입에 넣었다.

    역한 것도 역한 거였지만 그다음 순간부터 견디기 어려운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진이 미리 세세하게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면 불안해하며 겁에 질렸을 텐데 아진이 한 말과 다른 바가 없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만년화리의 기운은 아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거대했다.

    린린이 떼어낸 양이 정말 작았는데도 그랬던 것이다.

    아진은 정신을 차리고 그 기운을 통제하며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이 알지 못했던 것은, 보통의 경우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해도 그 기운이 다 흡수되지 않고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지극히 적은 양만이 흡수되는데 린린의 몸은 만년화리의 기운을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전부 끌고 갔다는 거였다.

    아진은 린린의 몸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가 수도 없이 벌모세수를 하며 기혈을 타통해 놓았으니 망정이었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린린은 벌써 주화입마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기운이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러다가는 통제를 잃고 그 기운을 따라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마나를 불어 넣었다.

    아진이 불어 넣었다기보다 마나가 뛰어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때부터는 아진이 아닌 아진의 마나가 멋대로 날뛰는 만년화리의 기운을 통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년화리의 기운은 갑작스럽게 린린의 몸에 거대한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온 것을 느끼고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그것에 확 휩쓸려 버렸다.

    마나는 그 기운을 감싼 채 잠시 뒤섞이는 것 같더니 어느덧 제가 먼저 앞으로 떨치고 나가 버렸다.

    만년화리의 기운이 린린의 혈맥 따위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흉포하게 달려나가던 것과 달리 아진의 마나는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린린의 혈맥에 맞추어 제 움직임을 조절했다.

    그 뒤를 따라오던 만년화리의 기운도 얼떨결에 마나를 따라 하고 있었다.

    말을 안 들으면 당장이라도 소멸시켜버릴 것 같은 강렬한 기세에 주춤한 것이다.

    아진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이대로만 된다면 걱정할 게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변수가 생겨났다.

    동굴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아진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곳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차라리 린린의 상황을 빨리 안정시키고 끝내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하고서 그들의 분위기를 보고 대처를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진기도인을 갈무리하려 했다.

    일반적으로 그런 곳에서 만난 사람이 밑도 끝도 없이 상대를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아진에게는 그런 일들만 닥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진은 지금 하는 치료에 미련이 없었다.

    이제 이 정도 했으면 됐다고 생각하며 린린의 명문혈에서 장심을 떼려 할 때였다.

    “멈추지 마세요, 스승님. 여기는 제가 맡기로 했잖아요.”

    소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청은 그동안 어린 나이에 비해 뛰어난 성취를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상대적인 얘기였다.

    나이에 비해서,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잘한다는 거였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판국에 소청에게 모든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소청은 지금이 린린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동굴에 들어온 사람들 정도면 자기 힘으로 어느 정도는 막으면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소청은 검신 대협의 제자라는 말이 갖는 위력을 이미 봤고 그 말을 하면 그들이 저절로 도망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껏 소리쳤다.

    “여기에 계신 저희 스승님은 검신 북리의천 대협의 제자세요.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 주세요.”

    “…….”

    동굴에 들어온 사람들은 떠돌이 낭인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눈이 단번에 빛났다.

    “검신의 제자? 그 서도진이라는 의원? 세상에. 이런 인연이 다 있나. 우리는 제선문의 살수였다가 그자 때문에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꼬마야. 이게 배때기에 힘주고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아진은 기가 막힌 우연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이제야말로 갈무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청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카랑카랑하게 들려왔다.

    “저를 믿어 주세요. 스승님. 제가 사고님의 호위가 되기로 했잖아요.”

    아진은 할 수 없이 다시 마나를 불어넣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날 일은 소청이 죽는다는 거지만 사실 아진은 그 상황조차도 겁낼 필요가 없었다.

    죽으면 다시 살리면 되는 것이라서.

    그래도 아이가 겪기에는 불쾌한 경험일 거라고 생각해 그냥 넘어가게 해 주려고 한 거였는데 이제는 소청의 뜻을 존중해 주는 게 좋을 듯했다.

    그때부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울렸다.

    제선문의 살수들은 원래 그런 식으로 싸우지 않는데 낭인 행세를 하고 다니며 칼질을 익힌 모양이었다.

    그렇게 된 이상 소청의 바람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도록 진기도인을 계속하는데 쨍쨍거리던 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소음까지 사라졌을 때 소청이 말했다.

    “제가 이겼어요, 스승님.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고 마치세요.”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다친 것을 참고 있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빨리 자랑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은 어린애다운 천진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진은 소청을 한 번 돌아보고 웃어 보였다.

    그 정도 행동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정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린린의 몸에 기운을 고르게 퍼뜨렸다.

    아진의 마나 덕분에 혈맥이 보호된 채 만년화리의 양기가 린린의 몸에 고르게 퍼졌다.

    아진의 몸에서도, 린린의 몸에서도 땀이 흠뻑 흘러나왔고 모두가 기진맥진했지만 마침내 상황이 종료됐다.

    그러고 나서 제대로 돌아보자 수북하게 쌓인 시신이 여섯 구였고 소청의 머리 위에 흑주가 떠 있었다.

    “흑주?”

    “구슬이 저를 도와줬어요. 목숨이 아직 붙어 있을 때 다가가서 달라붙더니 한참 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러고 나면 사람들이 이렇게 됐어요.”

    아진은 ‘이렇게’라는 것의 결과를 보고 있었다.

    생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뼈 위에 바짝 마른 살가죽만 덮인 것 같은 상태.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그것조차 다 날아가 버릴 듯했다.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끔찍한 장면이었지만 소청은 눈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감격한 듯 구슬을 보았다.

    “수고했다. 소청아. 너한테 빚을 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스승님. 그동안 받은 걸 다 갚으려면 평생을 다 해도 모자랄 거예요.”

    소청은 그러면서 자랑스러워했고 아진은 소청이 다친 곳이 없는지 다가가서 꼼꼼하게 살폈다.

    “정말 괜찮은 거냐?”

    “네. 신기했어요. 그동안 연습했던 게 전부 다 생각났고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다 떠올랐어요. 어떤 때는 제가 생각하기도 전에 팔이 먼저 움직였어요.”

    소청은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정말 대단했어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두 사람은 바닥에 쓰러진 이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냥 지나갈 것이지.

    과거의 악연이 있다고 해도 그냥 모른 척할 것이지.

    뭘 할 수 있다고 덤벼서 이런 일을 당한 거였을까.

    아진은 기가 막혔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지. 딱 보는 순간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았을 테니까.’

    보통의 심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운기조식을 하는 것만 방해받아도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운기조식도 아니고 영약을 섭취하며 진기도인을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것을 멈출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리고 쉽게 공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덤벼들었다가 소청이라는 장벽을 만난 것이다.

    아진은 소청이 지금의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아찔해졌다.

    최고의 수혜자는 단연 소청일 거였다.

    소청은 자기가 아진과 린린을 구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수련을 하면서 연습했던 것들을 실제로 사용하며 실전 경험을 쌓기도 했다.

    어떤 것이 부족한지, 앞으로 어떤 것들을 보완해나가야 할지 그것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어쩌면 소청보다 더 큰 수혜자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진은 둥둥 떠서 린린의 곁으로 다가간 흑주를 보며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