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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83화 (83/470)
  • 제83화

    83화

    아진이 우기려면 한 가지나 우기라고 말을 한 이후부터 제갈유진은 더욱더 말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동안 해 왔던 말과 지금 하려는 말이 맞는지 생각하느라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끌려가다가 제갈유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당했다. 완전히 당했어.’

    아무래도 이번에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진과 린린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현무단원의 사나운 손길에 의해 다시 앞을 봐야 했다.

    “감히 누구를 향해 그런 눈을 하는 것인가. 정말 눈알이 쇠꼬챙이에 꽂혀서 파여야 정신을 차리겠나?”

    북리의천을 향한 존경심이 당채운만큼이나 대단한 그들이었다.

    제갈유진은 수많은 사람에게 화가 났지만 그 마음의 밑바닥에는 구슬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다.

    ‘내가 좀 만져 보려고 하면 발광을 하던 것이 저 여자애 손에서는 저렇게 얌전하다고? 같은 구슬 맞아? 아니…… 같은 구슬이라는 건 내가 알아. 내가 아는데…… 그래도 이건 아무래도…….’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제갈유진의 머릿속은 더욱 엉켜 들기만 했다.

    * * *

    당채운이 남은 것은 의외였다.

    당채운은 현무단원을 무림맹으로 보내면서 아진에게 자기가 도울 일이 없겠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아진은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당채운이 여러 번 다시 말을 하자 린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혹시 여기에 계신 부인을 산본의가에 모셔다드릴 수 있을까요? 저희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부인 혼자만 가시게 하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요.”

    린린이 말하자 아진도 그건 정말 필요한 일이라는 듯이 그도 당채운에게 부탁했다.

    “아아.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단원 중에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참에 전부 산본의가에 가서 신의님께 진료 좀 받고 오라고 해야겠습니다.”

    당채운은 드디어 아진을 도울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아진은 그런 당채운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진이 무림의 배분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영향도 컸다.

    북리의천의 직전 제자인 아진의 배분은 그 나이 대의 무인 중에서 가장 높았다.

    북리의천이 북리세가의 가주는 아니었지만 원래 세가의 가주 자리가 그의 것이었으며 지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거였다.

    그런 북리의천에 대한 대우는 세가 내에서 가주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가주는 이제 자기가 오랫동안 맡아 왔던 형님의 자리를 돌려줄 때가 됐다면서 북리의천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그러나 북리의천이 완강히 거절하며 그 일은 그냥 지나갔지만 그는 외부 활동을 할 때 세가를 대표해 다른 가주나 장문인들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나 북리의천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두루두루 친했고 소림의 장문인과는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감히 눈을 마주하고 바라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이들이 아진과 배분이 같았고 만약 아진이 강호에서 제대로 활동을 시작하기만 한다면 장로나 호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제갈유진이 아진에게 패배를 인정한 것 중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저는 그냥 가도 됩니다.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소청의 어머니가 부담스러워하며 말하자 아진과 린린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본가에 가서 많은 도움을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특히 도종 형님이랑 소은 누님을 많이 도와주세요. 바느질 잘하신다고 꼭 말씀하시고요. 가시면 하실 일이 정말 많을 거예요. 지금도 잘하시지만 다시 뵐 때는 훨씬 더 잘하시게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소청의 어머니는 아진을 멍하니 보다가 이내 의지가 담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잘 버티고 반드시 산본의가와 의원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희 소청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청과 헤어져야 하는데 마음이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꼭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돼서 후련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청아. 우리 내기할까? 누가 더 변해 있는지? 누가 더 자라 있는지? 다시 만날 때.”

    그 나이에 그런 말을 하면서 얼굴을 환하게 밝힐 수 있다는 것이 왠지 소름 끼칠 정도로 경이로워서 아진은 소청의 어머니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진의 얼굴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그냥 잠시 만났다가 스쳐 지나가는 우연한 인연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멋진 사람을 만난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아들인 소청에게 더욱 기대가 됐다.

    “제가 이길 거지만 내기는 해요. 어머니.”

    소청이 눈물 고인 얼굴로, 애써 눈물을 참으면서 말했다.

    답이 없는 슬픔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아니라서 그나마 참을 수 있을 터였다.

    “이리 와라. 아가야. 안아 줄게.”

    소청의 어머니가 두 팔을 펴자 소청이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을 다잡아도 아이는 아이였다.

    소청은 끅끅 소리를 숨기려 애쓰며 울었고 그녀는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대하고 있으마. 소청아.”

    “네. 어머니.”

    소청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몇 명의 현무단원들과 함께 그녀가 떠나고 아진과 린린도 떠나려 했는데 당채운이 따라왔다.

    “우선은 함께 가면서 이 일을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을지 의견을 좀 구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미 그러고 계신 것 같은데요.”

    아진은 당채운이 자꾸 자기들과 함께 다니려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린린은 많이 나았다고는 하지만 계속 상태를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환자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연가장의 일은 해결이 됐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을지는 알게 됐지만 지금도 누가 그런 일을 일으켰는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의원님. 그 말은 앞으로도 이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우리가 그들의 규칙을 알아냈다는 걸 알면 새로운 방법으로 목표를 찾아 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당채운이 말하자 아진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서서 확실하게 말했다.

    “예. 단주님. 단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정파의 무림인들이 무림맹을 세우고 그곳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동생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쌩쌩해 보인다고 아프지 않은 게 아니어서 말입니다. 저는 다른 일에 관여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헤어졌으면 합니다.”

    당채운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죄송합니다. 소저가 투병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무림맹에서 중책을 맡고 계시니 그러는 것도 당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주님은 단주님이 하셔야 할 일을 하셨고 저는 제가 해야 할 말을 한 것뿐입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자 당채운도 더 이상은 그들에게 따라붙을 수가 없었다.

    당채운이 인사말을 하자 린린은 지금껏 보기 어려웠던 환한 얼굴을 하고 당채운에게 열심히 인사를 했다.

    그는 자기가 정말 불편했나보다고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들과 헤어졌다.

    “와…… 진짜 눈치 없네. 오라버니가 그렇게 콕 찍어서 말 안 했으면 못 알아들었을 거야. 그 사람.”

    “응. 그랬을 것 같기는 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두 사람이 그러는 동안 소청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 자기도 귀찮다고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진이 그런 소청을 보고 웃었다.

    “소청아. 너는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내 동생의 호위가 돼 달라고. 내가 너를 왜 가르치는데? 지금까지 애써서 가르치고 너를 떠나보낼 리가 없잖아?”

    “맞아. 소청이 너는 하나도 안 불편해.”

    린린까지 나서서 그렇게 말하자 소청은 그제야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

    그들은 발길이 닿는 대로 가면서 소청의 훈련을 봐 주었고 구슬에 대해 알아보며 린린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

    전에 비해서는 병세가 확실히 나아졌고 린린 자신도 통증을 호소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이 구슬이 영향이 있는 것 같아. 오라버니도 이걸 만지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

    린린이 구슬을 건네며 말하자 아진이 구슬을 받아들었다.

    따뜻한 기운이라.

    린린의 말을 듣고 집중을 했지만 특별히 그런 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신기하네. 내가 만지면 따뜻한데.”

    “잘됐네.”

    두 사람은 소청이 초식을 펼치는 것을 보며 나란히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린린은 전에 있던 흑주의 조각이 생각난 듯 그걸 넣어 둔 주머니를 꺼냈다.

    만년화리의 내단과 함께 넣어 두었다가 흑주의 조각 때문에 화리의 내단에 흠이 갈지도 모른다고 하며 두 개를 나눠 놓았었다.

    “둘이 인사해. 이게 원래 있던 흑주야.”

    린린이 두 손에 각각 흑주 조각과 새 흑주를 올려놓고 말하자 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야. 린린. 다른 곳에서는 그러지 마라. 미친 줄 알고 사람들이 너를 따돌릴 거야.”

    그래도 린린은 굴하지 않고 흑주를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번에는 만년화리의 내단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건 언제 먹을 수 있을까, 오라버니? 내 생각에는 지금 먹어도 될 것 같기도 한데.”

    만약 그 이야기를 몇 달 전에 들었다면 아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린린의 혈맥은 확실히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에 전부 다 먹지는 못해도 조금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린린의 말에 아진은 조금 흔들렸다.

    알려진 것은 있었지만 그게 절대적인 진리도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면 조금만 떼서 한 번 시도를 해 볼까?”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빨리 낫고 싶다고 생각을 하기는 해도 겉으로 서두르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자신의 몸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느껴서 그런 건지 조바심이 나는 것 같았다.

    소청은 중요한 얘기가 오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조용히 다가와 두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진이 만년화리의 내단을 들어 보이며 소청을 보고 웃었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지 모르지? 이거면 장원을 서너 채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아아…….”

    그렇게 영혼 없는 대답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아진이 피식 웃었다.

    “일단은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을 곳을 찾아가야 해. 그리고 소청아. 이제부터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해. 린린이 이걸 먹으면 그때부터 내가 린린의 몸에 만년화리의 공력이 잘 흡수되게 도울 텐데 그동안 소청이 네가 우리 두 사람을 보호해 줘야 해.”

    “……네?”

    소청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요.”

    아진은 그런 소청이 귀여웠다.

    소청을 놀리려고 한 말도 아니었고 지금 한 말이 거짓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소청에게만 맡겨 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내공의 흐름을 이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자기가 스스로 보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청의 표정이 비장한 것을 보자 웃음이 지어졌던 것이다.

    “소청아. 잘 부탁해.”

    린린까지 그렇게 말하자 소청이 다시 한번 결연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장난스럽게 말한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질 거라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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