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82화
한 마리의 전서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전서통에는 제갈세가에서 그동안 벌인 모든 추악한 짓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당채운은 혹시나 전서구에 무슨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현무단원 두 사람을 무림맹으로 같이 보냈다.
이곳에서의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처리가 되었기에 남은 이들도 이제 무림맹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당채운은 직접 제갈유진을 심문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잡아떼다가 아진에게 걸려들었다.
“그러면 소저는 그곳에서 나온 벌레도 본 일이 없고 그 벌레로 만들어진 구슬도 본 적이 없겠습니다.”
제갈유진은 머리를 비상하게 굴렸지만 아직 이 일의 전말을 스스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그녀도 알았지만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깟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텐가!’
제갈유진은 아진이 하는 어떤 말도 시인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봤다는 말입니까!”
아진에게 하대를 했다가 당채운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고 그때부터는 어쩔 수 없이 존대를 하고 있었다.
검신 대협의 직전 제자로 그 배분이 결코 낮지 않은 아진에게 예를 갖추어 말하라며 당채운이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제갈유진을 몰아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한번만 무례한 언동을 한다면 그때는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욕감을 느끼게 해 주겠다고 별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제갈유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서럽기도 했고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고운 얼굴에 맑은 눈을 하고 눈썹을 휘며 조금 웃어 주기만 하면 백이면 백, 다들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그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안달을 내곤 했는데 어째 그 대단한 미모가 이곳에 있는 두 사람에게는 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라도 한 건지.
그러나 싸울 때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제갈유진은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을 써가며 아진의 말에 대답을 하는 중이었고 아진이 이야기 하나하나를 세분화해서 묻는 것에 점점 짜증이 치미는 중이었다.
“그러면 본 적도 없는 물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겠고 소유한 적도 없겠습니다?”
“서 소협. 소협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선문답을 하고 싶거든 당신 스승님하고나 하세요.”
“그러면 소저의 방에 있던 목함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제갈유진은 갑자기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 하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러면서도 말을 더듬는 대신 순발력을 발휘해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대체 당신이 뭔데 남의 방을 함부로 뒤진 것이냐고 소리라도 질러야 할 텐데 그 말이 자신의 목을 죌까 해서 쉽게 말을 하지도 못했다.
발을 딛고 있는 곳이 가라앉고 있어서 빨리 걸음을 떼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기는 할 텐데도 발을 얹으려는 곳마다 전부 다 살얼음 같아서 섣불리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제갈세가가 사리사욕을 위해 무림맹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소저의 방을 수색했소. 그리고 내 동생이 잃어버렸던 구슬을 소저의 방에서 나온 목함에서 찾았소. 내 동생이 그 구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소저도 알 거요. 그런데 내 동생은 그것을 잃어버렸고 그게 소저의 목함에서 나왔으니 모르는 일이라는 말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거요.”
“그, 그건……!”
제갈유진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때까지 자기가 협조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아진이 하는 말을 전부 부정만 하다 보면 결국 아진이 지쳐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금껏 제갈유진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제갈유진의 처세술도 한몫했지만 가문의 이름값이 더해져서 누구도 그녀에게 심하게 굴지 못했다.
누구도.
누구도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앞에 덫을 놓지 않았고, 올가미로 순식간에 목을 휘감아 숨통을 조이고 목뼈까지 끊어 버릴 정도로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다.
“……!”
그녀는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당채운은 아진이 하는 말을 들으며 제갈유진을 노려보았다.
“제갈 소저. 서 의원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아니. 이걸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군. 서 의원님이 거짓을 말씀하실 리도 없지 않은가.”
“아니에요! 이 자가 지금 나를 모함하는 거예요. 그건…… 그건 그냥 구슬이에요. 그냥, 시장에서 파는 구슬이라는 말이에요. 이번 일과는 상관도 없고 당연히 저자의 동생 구슬도 아니에요.”
“그 구슬에 대해서 제법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우기려면 일단 방향을 하나로 정하기나 하고 우기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갈 소저. 시장에서 파는 구슬을 그런 대단한 목함에 넣어 두었다니. 그 목함은 목함 자체의 값만 해도 상당히 나갈 것 같던데. 황금으로 만든 상자 안에 철전 하나가 들어 있다면 그 철전이 그냥 평범한 철전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죠? 내가 소협에게 서운한 말이라도 했나요? 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내 방에 함부로 들어가서 내 물건을 뒤진 건 소협이고 그건 소협이 사과해야 할 일이에요!”
“죄인의 죄를 밝히기 위해 고신을 가한다고 죄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거나 사과해야 하는 건 아니오. 제갈세가의 명성이 헛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번 대에만 단체로 아둔한 자들이 태어난 건지 모르겠군요.”
“서도진!”
이성을 상실한 듯 제갈유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섬전 같은 속도로 당채운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가 제갈유진의 목을 눌렀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의 검은 제갈유진의 하얀 목에서 단번에 핏자국을 만들어 냈다.
“소란 떨지 마시오. 그 정도 피가 나는 거로는 죽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다음에는 죽을 수도 있을 거요. 제갈 소저. 나는 제갈 소저가 당분간 살아 있기를 바라오. 나와 같이 있는 동안 죽었다는 말이 퍼져나가서 귀찮아지는 건 싫으니까. 이후에 한 번 더 이런 식으로 군다면 그때는 묶겠소.”
“……!”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제갈유진의 뺨이 덜덜 떨리고 흔들렸다.
“실토하시오. 아니라고 해 봐야 소저만 바보가 될 뿐이오. 소저는 우리와 같은 객잔에 머물렀고 인피면구까지 뒤집어쓴 채 내 일행에게 접근했소. 옷을 수선해 달라는 이유로 말이오. 하지만 소저는 내 동생의 구슬을 탐내고 있었을 것이오. 처음부터 우리가 누구인지 알았을 거고 대 제갈세가의 호기심에 내 동생의 구슬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겠지.”
“아니에요. 나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때는 소협과 소저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산본의가의 자제들이라는 것도 몰랐고 나는 정말 그냥 옷만 맡기려고 한 거라고요.”
“옷을 맡기는데 인피면구까지 쓰고 와서 맡긴다. 소저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그건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갈유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함정에 빠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단한 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의미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지금 서도진의 궤변을 증명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당채운은 역시 그런 일이 있었던 거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은 당채운의 곁에 있던 현무단원들이나, 그곳을 지키고 있던 분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서 의원님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구슬을 뺏겼겠습니다.”
“아니란 말이야!!”
당채운이 판결이라도 내리듯이 말하자 제갈유진이 미친 것처럼 소리를 쳤다.
“그건, 그건 내 구슬이야. 그냥 구슬이라는 말이야!”
그러나 이제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라도 내 동생이 자기 구슬을 잃어버리고 남의 구슬을 뺏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자리에서 증명을 해 볼까 합니다. 살수의 몸에 들어가 살수의 공력을 일시에 증가시키고 괴력을 발휘해서 무인들을 몰살시키게 만드는 벌레는 정해진 조건에서 구슬이 됩니다. 그런데 구슬이 되고도 살아 있을 때의 습성이 남아 있지요.”
아진의 말에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가장 큰 특징은 공격성입니다. 맨손으로 구슬을 만지려고 하면 손이 녹습니다. 뼈가 드러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구슬이 계속 열을 내지요. 구슬은 자신의 주인을 정하고 주인을 알아봅니다.”
아진이 말을 멈춘 채 린린을 바라보자 사람들은 그동안 그 자리에 린린이 같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일제히 그녀를 보았다.
린린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무표정한 얼굴로 구슬을 꺼내 들었다.
“저게…….”
구슬에 대해 숱하게 얘기를 듣고도 그것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 사람들이 그 자리에는 많았다.
당채운도 그게 그 구슬인 거냐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을 정도였다.
제갈유진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구슬이 저렇게 똑같을 수도 있을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갈유진은 그것이 자신의 목함에 있던 것과 같은 구슬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을 했다.
그 구슬은 완벽하게 둥근 형체였지만 무른 흙덩이에 손톱자국이 새겨진 것처럼 초승달 모양의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구슬이 비슷하다고 해도 구슬에 생긴 흠까지 같은 모양일 수는 없는 거라고 제갈유진은 생각했다.
“표정이 왜 그러지. 제갈 소저? 잘 아는 구슬을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당채운의 말에 제갈유진은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상황이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그녀는 참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런 건지…….
제갈유진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제갈 소저를 어떻게 처리하기를 바라십니까. 서 소저.”
당채운이 공손하게 말하자 린린이 아진을 보았다.
“내가 정하는 거야?”
“응. 그런가 본데? 네 물건을 훔쳤으니까.”
“그러면 가둬야 하는 것 아닌가?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절도범에게 맞는 형량을 내리면 될 것 같은데.”
린린은 귀찮은 것을 떠맡았다는 듯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당채운은 그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자기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 자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겁에 질려 불안에 떨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거기에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한데도 린린은 그저 귀찮은 일이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소저.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저는 잘 모르니까 오라버니에게 물어서 하세요. 오라버니가 저 대신 대답을 잘해 줄 거예요.”
그러면서 린린이 구슬을 쓰다듬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는데 구슬이 따뜻해서 거기에 손을 대고 있으면 훈훈한 열기가 몸으로 퍼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당채운은 현무단원들에게 제갈유진을 끌고 가도록 했다.
제갈유진은 끌려가면서도 제대로 항변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