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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80화 (80/470)

제80화

80화

제갈세가에서 미리 연가장에서 일어날 변고를 알고 그곳에 가서 지켜서 있다가 살수의 몸에서 나온 벌레를 불태워 구슬을 만들었다는 것은 절대로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갈세가에서는…….”

당채운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연가장에서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를 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지금 그 이야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지 깨달아서 그런 듯했다.

“제갈세가는 지금껏 자기들이 알게 된 정보와 반대되는 것을 무림맹에 제공해 왔을 겁니다. 이 흑주가 증거예요.”

아진이 말하자 당채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보십니까, 의원님. 제갈세가는 무림맹에서의 입지가 제법 강합니다. 아시겠지만 차기 맹주가 제갈세가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고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검신 대협의 의지인데 대협께서 무림맹에 그다지 큰 뜻을 갖고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맹주의 자리를 원하지도 않는 대협보다는 전부터 의욕을 보여왔던 사람이 더 적격이 아니냐고들 하고 있지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은 협조를 구해서 하는 것보다는 그냥 정면 승부를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갈세가는 절대로 협조하지 않을 테고 그러는 동안 연가장과 같은 참극을 당하는 무가가 몇 곳이나 더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제갈세가의 탐욕을 지켜 주자고 그들을 희생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의 입을 열 수 있냐는 게 문제입니다.”

당채운이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제가 더 잘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의원님. 죄송한 부탁이지만. 혹시 의원님이 하시는 것을 제가 볼 수 있겠습니까? 꼭 보고 싶습니다. 저는 의원님께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진은 난감해졌다.

생각하고 있던 방법이 아주 거칠어서였는데 당채운은 제발 자기도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얼굴로 제법 집요하게 매달렸다.

린린은 그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천당문이 강호의 무인들에게 듣고 있는 평가를 생각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린린만 해도 당채운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천당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있었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고 무자비하며 옆에 서 있으면 냉기가 서늘하게 느껴질 것 같았는데 아진의 옆에서 당채운은 그냥 순한 양 같았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채운의 문제가 아니라 아진의 문제였다.

당채운도 지금도 여전히 어디 가서 뒤지지 않을 만큼 어두운데, 그 옆에 흑암 그 자체인 아진이 자리하자 오히려 당채운은 아주 맑고 밝은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진과 린린은 당채운이라는 존재의 옆에서 그들 자신의 본모습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린린.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여기에 있을게. 이제 흑주가 돌아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린린이 말하자 아진은 소청 모자를 보며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소청은 아진이 무림맹의 중요한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것부터가 모두 놀라웠고 무림맹의 유명한 무력부대 대장이 아진을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기함했다.

그런데 그런 아진이 중요한 일을 하러 가면서 자기와 어머니를 챙기자 거기에 감동하며 앞으로 아진과 린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소청은 정말 앞으로 아진과 린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다.

“그럼 서두르시지요. 단주님.”

아진의 말에 당채운이 조용히 그를 따라나섰다.

아진은 당채운의 기척을 이번에도 느끼지 못했고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의원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의원님의 속도에 맞춰서 움직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거기에 맞추겠습니다. 저는 옆에서 견식만 하려고 하는 것이니 저와 의논을 하지 않으셔도 되고 그냥 모든 것을 의원님에게만 맞춰서 하시면 됩니다.”

“네. 그러려고 했습니다.”

아진은 그때부터 집중했다.

제갈세가의 무인 하나를 찾아서 족치는 것이 계획이었기에 그들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생각했다.

‘아마 객잔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테고.’

숨어서 지켜보는 자들을 감지해내는 것은 아진에게도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렵다고 해서 마냥 미루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아진은 강수를 두기로 했다.

“제갈세가의 무인이 이 자리에 있다면 즉시 이 앞으로 나오는 게 좋을 거요. 나는 의원의 신분으로, 무림맹에서 파견 나온 현무단과 함께 연가장의 사건을 조사했소.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확인한 결과 죽은 연가장 무인들 모두의 몸에서 같은 표식을 발견했소.”

아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

당채운은 아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었고 근처에서 작은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바로 감지하기 위해 기감을 펼쳤다.

아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중을 향해 외치고 있었고 그 모습이 남들 보기에는 꼭 미친 사람이 비 오기 전에 날궂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진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무림맹 무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호령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구천섬뢰장으로 내가 알기로 구천섬뢰장은 제갈세가의 직계만이 배울 수 있소. 그래서 당장 제갈세가의 가솔에게 이 일에 대해 해명을 들어야겠소.”

당채운은 처음에 아진이 하는 말에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그냥 되는대로 말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채운이 알기에도 구천섬뢰장은 제갈세가에서 방계나 외인을 가리지 않고 전수하는 무공인데 아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떠들어 대며 제갈세가를 욕보이니 제갈세가의 가솔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도발에 넘어가 몸이 꿈틀거릴 것 같았던 것이다.

아진이 하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며 당채운에게 집중하고 있던 현무단의 단원들은 당채운의 눈이 빛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채운은 오랫동안 합을 맞춰 왔던 단원들에게 눈짓과 손짓으로 지시를 내리고 곧 자신도 미약한 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략과 책략을 떠나 무공으로만 하자면 제갈세가는 다른 명문세가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고 곧 제갈세가의 무인들 몇 명이 현무단에 의해 붙잡혀 왔다.

“당신들이 왜 여기에 있는가!”

당채운이 추상같은 소리로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그 말에 변명을 하기는커녕 아진에게 화를 내기에 바빴다.

“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네놈이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놈이 우리 가문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냐!”

“뭘 알고 지껄이거라. 이놈. 네놈이 무엇인데 그런 소리를 지껄인다는 말이냐. 네놈이 누군지나 알아야겠다. 당장 네 사문을 밝히거라!”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미쳐 날뛰는 동안 제갈유진만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먼저 객잔으로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상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며 아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소청의 어머니 앞에서 성질을 부리던 것을 생각하면 앞뒤 모르고 설치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럴 때는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그건 당신들이 알 바가 아니오.”

제 스승이 그 검신 대협이라고 자랑하고 자기가 산본의가의 둘째라고 뻐기고 싶었지만 지금부터 상당히 비열한 방법을 사용할 예정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모두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 의원님은 우리와 함께 무림맹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그 말은 서 의원님이 이 일을 하는 동안 그에 준한 대우를 받게 될 거라는 것이다. 너희는 죄를 의심받고 있는 자들이다. 무림맹 분타에 허락 없이 숨어든 것만 해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터! 지금부터는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말도록 하라!”

서슬 퍼런 기운으로 당채운이 말하자 제갈세가 무인들은 아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진은 현무단원들이 제갈세가 무인들을 붙잡아두고 있는 동안 빠르게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펄럭이며 바람 소리를 내는 동안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로 아진을 보았다.

아진은 마치 지상의 작은 사냥감을 낚아채 날아 올라가는 독수리처럼 제갈세가의 무인 한 사람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의 몸이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고 당채운은 당황한 얼굴로 부단주에게 뒷일을 맡기고 황급히 아진의 뒤를 따랐다.

“놔라, 이놈! 놓으란 말이다!!”

아진에게 붙잡힌 자가 소리치자 아진이 빙긋 웃었다.

“정말 놔? 정말 놔도 되는 거야?”

아진이 말하자 제갈세가의 무인은 얼굴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진은 계속해서 몸을 날렸고 당채운이 자기를 따라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너무 멀리 갈 생각이 없었고 당채운을 떼어낼 생각 역시 없었다.

이 정도는 그에게 보여 줘도 될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적당한 장소에서 멈췄다.

통행이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드디어 아진이 멈추자 당채운도 아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의원님.”

아진은 당채운의 말에 따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제갈세가의 무인을 바라보았다.

“네 이름이 무어냐.”

“…….”

제갈세가의 무인은 그것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은 자기에게 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버틸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아진은 무인의 어깨를 눌러 억지로 바닥에 꿇어 앉혀 놓고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무인의 손을 잡았다.

다른 무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라고 해도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특히나 정보각과 연관이 되어 있는 자들은 아주 상세히 잘 알고 있는 게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산본의가의 가주와 대공자를 잡아가 손목을 잘랐을 때 서도진이 어떻게 했는지와 같은 것들.

처음에 서도진이 자신을 의원이라고 했을 때만 해도 그는 서도진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당채운이 그를 서 의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당채운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깍듯한 것과 의원에게서 풍기는 여러 기세를 종합하며 그가 서도진일 거라는 것을 점점 확신했다.

의원이지만 그와 동시에 실력 있는 무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자는 천하를 다 뒤진다고 해도 많지 않을 거였다.

눈앞의 남자처럼 초고수라고 부를 정도의 무공 실력까지 가진 사람이라면.

‘북리의천의 제자…….’

그는 소리 없이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오늘은 아주 운이 나쁜 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즈음 아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갈마령이오!”

그가 토해내듯 소리쳤지만 아진은 상관없다는 듯 그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끔찍한 기분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뚝.

두둑-.

“으아아악!”

그의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커다란 비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는 아진에게 붙잡힌 손을 잡아빼려고 했지만 그것은 절대 쉽지 않았다.

아진은 손을 꼭 붙든 채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리고 있었다.

단지 자신의 손가락 두 개만을 써서.

손가락 안에 있는 뼈가 가루가 되고 피부가 납작해졌다.

피가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아진은 흙장난을 하는 아이처럼 집요하고 신중해 보였다.

제갈마령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어떻게든 아진에게서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아진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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