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79화
“제갈세가도 강호에서 이름이 사라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저렇게 되도록 아무도 옆에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건지.”
아진은 혀를 차다가 린린을 보았다.
“왜 나를 봐?”
“너도 잘해. 밖에서 네가 저러고 다니면 본가가 욕을 먹는 거야. 알았어?”
“여기에서 어떻게 더 잘해?”
그러자 소청의 어머니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건 아가씨 말이 맞다고 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고도 이렇게 잘 자라셨는데 정말 여기에서 뭘 어떻게 더 잘 하시겠어요?”
“들었지? 나 이런 사람이거든?”
린린이 얄밉게 혀를 내밀자 아진이 린린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고 소청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정말 재미있어요.”
한 번 더 보여 주면 안 되겠냐는 바람까지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아진은 남은 사람들을 모두 재촉했다.
“빨리 분타로 가서 그곳에서 먼저 일을 시작해 놔야 다른 분들이 편해질 겁니다.”
“예. 의원님. 소청아. 네 짐은 네가 챙길 수 있지?”
소청의 어머니가 말하자 소청이 큰소리로 대답을 하고 제 짐을 챙겼다.
아진과 린린도 각자 자기 짐을 챙겼고 일각이 채 지나기 전에 그들은 모두 객잔을 나갔다.
그들의 뒤를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따라붙은 것은 전혀 놀라울 것도 아니었다.
* * *
두 마리의 말이 쉬지 않고 달려 무림맹의 분타로 향하자 그 뒤를 바짝 쫓아가던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리로 계속 가면 무림맹 분타가 나오는데 저자들이 왜 저기로 가는 거지?”
“일단 가 보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상한 자들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수확이 클 수도 있겠는데요? 제남에 무림맹의 요인이 나타난 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런 정보라면 정보각에도 아주 유용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어. 빨리 가자.”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명 더 데려오는 건데 그랬습니다, 조장님.”
그러자 조장이라 불린 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겠어. 지금이라도 가서 몇 사람을 더 데리고 오도록 해. 이대로 가면 무림맹 분타야. 다른 곳으로 샐 길이 없으니까 그곳으로 와. 혹시 방향을 바꾸면 그때는 내가 신호를 보낼 테니까.”
“예. 조장님.”
무인이 말머리를 돌려 달리기 시작하자 조장이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채찍을 휘둘렀고 요란한 투레질과 함께 말이 전속력으로 달렸다.
조장과 헤어진 자가 객잔으로 돌아가 그 소식을 전하자 제갈유진은 눈이 동그래졌다.
이미 인피면구라는 걸 들킨 후라 그것을 벗고 있었는데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그동안 영 어색했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당장 말을 준비하세요. 모두 함께 가도록 하죠.”
“전부 말씀입니까, 아가씨?”
“내가 한 말 못 들었나요?”
제갈유진은 날카롭게 말하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아진과 린린 일행은 일찌감치 무림맹 분타에 도착했고 당채운의 연락을 먼저 받은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조용한 전각에서 편안히 쉬며 당채운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 반응이 제각각이네.”
린린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북리의천이 맹주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제갈세가에서 맹주가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갈려 아진 일행을 각자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다.
“일단 여기에 있는 이상 제갈세가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고 오히려 잘된 것 같기도 해.”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며 소청 모자와 함께 있으라고 말했다.
“오라버니는 어디 가는데?”
“객잔에. 지금쯤 우리가 여기로 온다는 게 알려졌을 거고 그 여자도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도 따라나섰을 거야. 제갈세가가 원래 무공이 뛰어난 곳은 아니잖아? 머리 좋은 걸로 강호에서 한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고 있는 거지. 그 속도로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으면 짐까지 챙겨서 오지는 못했을 거야.”
“빈집을 털러 가려는 거구나? 좋아. 재미있겠어.”
“그 여자가 머무는 방이 어디인지 알고 계시죠?”
아진이 묻자 소청의 어머니는 자기가 아는 것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세세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텐데 소청의 어머니는 남다른 관찰력으로 아진에게 도움을 주었다.
아진은 린린에게 몇 가지 당부를 더 하고 소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청아. 이제부터는 네 책임이 막중하다.”
“네. 의원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여기는 저에게 맡겨 주시고요.”
어린 녀석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 마음가짐만큼은 어른 못지않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그들을 놔둔 채 밖으로 나갔다.
경비 무사들이 다른 곳으로 갔을 때를 노려 지붕 위로 올라간 아진은 그때부터 지붕과 담장을 밟으며 빠르게 몸을 날려 객잔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갈세가 무인들을 피해 객잔으로 돌아갔다.
제갈유진과 제갈세가의 무인 중 자기들이 객잔의 방비를 너무 허술하게 하고 급히 나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뭐야, 이 여자?’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객잔에 숨어들어 가 제갈유진의 방을 뒤지던 아진은 인피면구를 보면서 생각했다.
소청의 어머니에게서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고 있자니 더 놀라웠다.
인피면구는 정말로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것처럼 상당히 정교했다.
‘뭐.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면서 아진은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며 안에 있는 물건들을 샅샅이 뒤졌다.
제갈세가의 사람이 남에게 이런 개인적인 공간을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 이것저것을 뒤지던 아진의 눈에 목함이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절대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아진이 주저 없이 목함의 뚜껑을 열자 그때만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안에서 구슬이 튀어나왔다.
“흑주!”
아진은 깜짝 놀라서, 자기가 지금 남의 방에 몰래 들어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소리쳤다.
구슬이야말로 아진의 소리에 깜짝 놀란 듯, 맹렬한 기세로 허공에 떠올랐다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는 얼굴인가 하고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동안 흑주가 하는 짓을 많이 봐 왔던 아진이라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였다.
그저 반질반질한 구슬 표면일 뿐인데 거기에서 표정이 읽히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흑주. 네가 왜 여기에…… 아. 아니지. 네가 흑주일 리는 없고…… 이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던 거구나. 연가장 무인들이 죽어가던 곳에. 그리고 너를 발견한 거고.”
발견했다고 해야 할지, 만들었다고 해야 할지.
제갈세가라면 살수의 몸에서 나온 벌레를 구슬로 만드는 법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고 구슬을 얻으려고 일부러 벌레를 불태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건가 보네.’
흑주는 아직 아진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거기에서 더 도망치지는 않았다.
“나랑 같이 가자. 어차피 너 혼자는 너를 지키지도 못하잖아.”
흑주는 기분이 나쁜 듯 팽 토라졌고 아진은 흑주를 놔둔 채 다른 물건들을 더 찾아보았다.
흑주는 아진이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진은 그런 흑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흑주에는 죽은 자의 원념이 담겨있는 것 같았고 구슬이라고 해서 그저 단순한 사물이 아닌 듯했다.
“너랑 비슷한 녀석이 있었어. 탈혼단의 살수 몸에서 나온 벌레가 불에 타서 만들어진 거였는데. 내 동생을 지켜 주다가 깨졌어. 내 동생은 지금도 그 조각들을 가지고 다녀. 그 일을 겪고 나서 슬펐을 거야. 혹시 네가 나랑 같이 가 준다면 고맙겠다. 내 동생이 좋아할 거야.”
아진은 그 정도로 말을 하고 짐을 뒤지는 일에 더 집중했고 나중에는 흑주가 제 옆에 둥둥 떠서 짐 안을 같이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았다.
“같이 갈 거야? 그럼 목함도 가져갈까?”
그러자 흑주가 목함을 향해 맹렬히 날아가더니 몸으로 힘껏 밀어 뚜껑을 쾅 닫아 버렸다.
이놈의 목함에 갇혀 있던 걸 생각하면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는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럼 가자. 내 주머니로 들어올래? 나는 경공을 아주 잘해.”
그러자 흑주는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아진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아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건들을 전부 다 원래 있던 자리에 옮겨놓고 그곳을 떠났다.
제갈세가의 여자가 한 가지는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가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 * *
아진이 돌아갔을 때 소청 모자와 린린은 방 안에서 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와. 안 늦었네? 다행이다. 내 것도 있어?”
“당연하지. 어서 먹어. 그런데 뭐 좀 건졌어? 특별한 거라도 있었어?”
젓가락을 챙겨주며 린린이 묻자 소청 모자도 궁금한 듯 아진을 바라보았다.
“어. 완전.”
아진이 린린을 보며 싱글벙글거리자 린린은 아진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데 그래? 돈이라도 있었어? 아니면 황금?”
“아니. 그것보다 더 좋은 거야. 눈 감아봐.”
“아. 됐어. 밥 먹는 중인데 뭘 그렇게 귀찮게 해? 충분히 놀라줄 테니까 보여줘 봐.”
린린의 말에 소청이 웃으면서 덩달아 재촉했다.
“스승님. 뭔데요?”
그러자 아진이 재미없다고 투덜대고는 흑주를 꺼냈다.
흑주는 처음에 얌전히 있더니 린린을 발견하고 그대로 린린을 향해 돌진해 그 머리 위에서 미친 듯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어차피 이것도 검은 구슬이고 전에 있던 것도 검을 구슬이니까 그냥 흑주라고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절대 그 둘이 같은 구슬은 아닐 텐데 린린을 알아보는 것 같은 행동을 보고 아진은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린린도 마찬가지였다.
“흑주는 네 극음지기가 좋은 걸까?”
아진이 묻자 린린이 그럴 수도 있겠다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사람들은 우리가 독고세가에서 탈혼단에게 얻은 구슬을 가진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원래 갖고 있던 구슬인 걸로 하자.”
“그래. 좋아. 오라버니.”
그때 소리도 없이 당채원이 들어왔다가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제가 기척도 없이 들어왔다가 그만 못 들을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아진은 정말 그가 그곳에 올 때까지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당문이 워낙 암기술에 강한 곳이 아닙니까. 암기의 기본은 기척을 죽이고 은밀히 다가가는 거고요. 어려서부터 워낙 강도 높게 훈련을 받아 오다 보니 특별히 하려고 생각을 안 해도 저절로 이러고 있네요. 죄송합니다. 의원님.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미 다 들은 말을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것도 웃기고 무림맹 내에서 북리의천파라고 할 수 있는 당채운에게라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그간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러면 그게 제갈소저의 구슬이라는 말씀입니까, 의원님?”
놀란 얼굴을 하고 묻는 그에게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게 그 여자에게 있다는 것은 연가장이 공격을 당하고 살수들이 죽을 때 그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건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수의 몸에 벌레의 형태로 있던 게 나중에 불이 붙어서 이런 모양이 되는 거지요.”
“예. 의원님. 저도 검신 대협께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올 때 독고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려 주셨거든요.”
당채운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