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78화
“린린. 너는 여기에 있어.”
“오라버니랑 같이 갈래. 오라버니랑 같이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서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막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복도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잘해 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정말 실력이 좋네요. 앞으로도 더 일을 맡기고 싶은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소청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아진과 린린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실력이 탐이 나서 그래요.”
“그렇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갈 곳이 정해져 있어요.”
“안타깝네요. 그러면 여기에 머무는 동안 세 벌 정도 더 수선을 해 줄 수 있으세요?”
“예. 그건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다행이에요. 더 챙겨서 가지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일거리가 계속 들어와서 좋네요.”
목소리가 문밖에서 계속 이어지다 소청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 돌아오셨네요? 언제 오셨어요?”
그러면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전에 밖을 내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린린이 묻자 소청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에 있는 동안 혹시 수선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삯을 절반만 받고 바느질을 해 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러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아진은 돈이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꼭 돈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돈도 벌면 좋기는 하지만 주변 돌아가는 얘기도 알아 두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바느질을 하고 있으면 옆에 와서 같이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기도 해서 유익했어요.”
아진은 뭔가 더 중요한 얘기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좀 전의 손님요. 가지고 오는 옷들이 전부 다 평범하지가 않더라고요.”
소청의 어머니는 자기가 알아낸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인피면구를 하고 있었어요. 인피면구는 제가 잘 알아요. 소청이 아버지도 한동안 인피면구를 하고 지냈었거든요. 처음에는 왜 이렇게 표정이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울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인피면구 때문이었죠. 그런데 일을 맡긴 여자가 그걸 쓰고 있었던 거예요. 이상하죠?”
소청의 어머니는 자기가 대단한 걸 알아낸 것 같지 않냐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아진과 린린은 지금 그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자 분위기를 감지한 듯 소청의 어머니가 말했다.
“옷에 검에 베인 자국이 있었어요. 그리고 핏자국도 있었는데 오래된 건 아닌 것 같았고 피가 튄 범위가 넓었어요.”
말이 이어질수록 아진과 린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혹시 연가장에서 죽은 사람들의 옷이라고 생각하세요?”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는 있잖아요. 그렇죠?”
그녀의 말에 아진과 린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청은 어디에 있어요?”
린린이 묻자 때마침 소청이 들어왔다.
소청은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을 보고 반가워하며 조금 전에 제 어머니가 지었던 것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뭘 좀 알아낸 것 같아요. 객잔에 머무는 무인들이 있는데 유명한 무가 사람들이면서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소청아. 소청아. 잠깐만. 너는 아직 어리다. 그런 일을 하면 안 돼. 어른들은 너보다 훨씬 더 머리가 잘 돌아가고 거칠어. 잘못하다가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진이 말하자 소청이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의원님…… 소청이 어렵게 알아낸 것 같으니까 들어는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자기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소청은 다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할 거예요.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낫습니다. 이 녀석은 영리해서 그 사람들이 누군지 분명히 알아냈을 거예요. 그래도 듣지 말아야 하고 칭찬도 해 주면 안 됩니다.”
아진이 말하자 소청이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더니 말했다.
“그 사람들요. 제갈세가 무인이었어요. 분명해요. 제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떤 아이들이 그 사람들 주머니를 낚아채서 도망치려고 했거든요. 그때 애들을 쫓아가면서 신법을 펼쳤는데 그게 제갈세가의 신법이었어요.”
“…….”
아진은 기가 막혔다.
거기에서 제갈세가라는 말을 들은 것도 기가 막혔지만 말을 하지 못하게 할까 봐 뒤로 물러나서 말해 버리는 소청이 더 기가 막혔던 것이다.
“너.”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그리고 제가 위험을 무릅쓴 건 아니고 다른 애들이 하는 걸 보고 알게 된 거니까 괜찮잖아요. 스승님. 저는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제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소청이 말하자 린린이 피식 웃었다.
“제법이네. 그리고 소청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소청은 그런 건 제대로 기억해.”
린린이 말하자 아진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군가 신법을 펼치는 것을 보고 그게 제갈세가의 신법이라는 걸 알아보지도 못했겠지만 소청은 아진의 애제자였다.
지나가며 보여주는 것도 무섭게 기억해 두는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그것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아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소청 모자를 바라보았다.
“제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지금 그 여자가 오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제갈세가의 소저가 아닐까 하는데 옷을 주면 바로 떠나게 돼서 수선을 해 줄 수 없게 됐다고 하세요.”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시간도 없었다.
소청의 어머니는 이게 다 무슨 얘기인가 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어 주었다.
문밖에는 아진이 말한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로.
“여기 있어요. 일을 잘 해 줘서 돈은 조금 더 챙겼어요.”
손에 옷을 든 채 말을 하며 여자가 문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소청의 어머니는 능숙하게 문을 뒤로 닫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죄송해서 어쩌죠? 일행이 돌아와서 바로 떠나는 게 좋겠다고 하네요. 아마 이 일은 못 맡을 것 같아요.”
“……일을 못 맡는다니요? 방금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근사근하게 말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갑자기 냉랭해졌다.
그러나 소청의 어머니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제갈세가에 대해 말할 때 아진의 말투에서 그가 제갈세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도 그들에게 잘 대해 줄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을 전했다.
“선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할 수 없게 됐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제 일행이 떠난다면 저도 떠나야 하는데 부인의 옷을 수선해야 한다면서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말했던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된 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제 사정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쪽 사정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일행이 바로 움직일 것처럼 말하지도 않았고요. 그러니까 나는 믿고 일을 맡긴 거예요.”
“수선을 하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면 나는 책임지고 수선을 했을 겁니다. 일행에게 사정 얘기를 해서라도요. 하지만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았고 부인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있는 상황이에요.”
“당신처럼 그 자국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이제는 숫제 눈에 불을 켜고 고함을 질렀다.
“할 이야기는 마쳤으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기로 한 일을 마치지 못해 미안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쳐. 고치고 얼룩을 지우란 말이야!”
소청의 어머니는 제갈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고 그것이 제갈유진을 더욱 화나게 했다.
“아비 없는 자식을 혼자 키우려면 이런 일 저런 일 따지지 말고 해야 할 텐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토대로 정보를 모아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제갈유진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런 것을 바탕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주특기였다.
제갈유진은 그동안 세가와 무림맹에서의 지위를 기반으로 사람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함부로 말을 했고 그때는 소청의 어머니도 참지 못했다.
“소저. 아직 어려서 세상 사는 법을 알지 못하는 모양인데 세상은 보이는 것 그대로가 아닐 때가 많은 법입니다. 내 모습이 소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나 내 아이는 소저에게 무시당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걸 아나요?”
은씨 세가에 대한 자부심이 그녀를 들끓게 했지만 소청의 어머니는 그 정도만 하고 말을 마쳤다.
제갈유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인피면구만 믿고 제 신분을 완전히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며 경거망동했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인피면구가 그 모습까지 전부 가려 주고 있었다.
소청의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제갈유진은 멍한 얼굴로 문을 보았다.
그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린 건지 제갈유진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얘기를 듣더라도 제갈유진의 편을 들어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늘 제 손으로 상황을 통제해야 하고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지 않으면 참지 못했던 제갈유진은 그때까지도 화를 다 가라앉히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건방지게. 뭐라고? 보이는 것 그대로가 아니야?’
제갈유진은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씩씩거리다가 돌아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이제 곧 한차례 거센 폭풍이 몰아치겠다고 생각했다.
안에서 바깥의 얘기를 다 듣고 있던 아진은 진저리를 쳤다.
“참지 말지 그러셨어요? 저런 인간은 제대로 당해 봐야 하는 건데요.”
아진이 말하자 소청의 어머니가 웃었다.
“그래도 저는 통쾌했는걸요. 방에 의원님이랑 아가씨가 계시다고 생각하니까 용기가 나잖아요? 그래서 두 분 믿고 마구 질렀어요. 속이 다 시원해요.”
“어머니. 저도 믿으셔도 돼요. 다음부터는 저 믿고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세요.”
소청이 분한 듯이 말했다.
원래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보다 가족이 당하는 걸 볼 때가 더 힘든 법이었다.
그래도 소청은 어머니가 아주 당하지만은 않고 온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것도 전부 스승님과 사고님 때문인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이 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