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76화 (76/470)

제76화

76화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얼굴과 손의 피부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손의 피부는 고작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막 들어선 것처럼 보송보송해서 어떻게 봐도 얼굴의 피부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은 처음부터 그 여자만을 위해서 지어진 것처럼 꼭 맞았다.

값비싼 재질의 옷감으로 솜씨 좋은 장인에게 옷을 맞춰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소청의 어머니는 여자가 무엇을 위해 자기에게 접근했는지는 몰라도 어쩌면 아진과 린린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으로 돌아간 제갈유진은 서탁 앞에 앉아 불편한 듯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비싸더라도 편한 걸로 사 오라고 했더니.’

표정이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건 마음에 들었지만 오래 쓰고 있으면 답답하고 땀이 찼다.

금방 다시 밖에 나가야 할 것 같으니 아직은 계속 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제갈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인피면구를 벗어 버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후기지수 중 당당히 무림제일화라는 별호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답게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았지만 짜증스러운 표정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힘든 분위기가 풍겼다.

‘지금까지는 내 예상대로 됐어. 벌레도 직접 봤고 구슬도 찾았고. 무림맹에는 그렇게 보고가 되지 않겠지만.’

제갈유진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어졌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의가 가득해 보였던 것이다.

그녀가 암적색의 목함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자 그곳에 있던 묵빛 구슬이 밖으로 나오려다가 가로막혔다.

곧바로 뚜껑을 닫지 않았다면 구슬을 놓쳤을지도 몰랐다.

벌레가 구슬이 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던 제갈유진은 구슬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하나같이 손에 심한 화상을 입고 구슬을 놔 버렸는데 그대로 두면 구슬이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함께 있던 무인의 목에 검을 드리웠다.

-놓치면 목이 잘릴 테니 살고 싶으면 손이 녹더라도 그걸 목함에 넣어라.

무인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협박이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갈유진의 서슬 퍼런 말에 부들부들 떨며 구슬을 목함에 넣었다.

구슬은 들어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무인의 팔을 태워 버리는 것으로 화풀이를 끝내야 했다.

“이래서야 이게 뭔지 알아볼 수도 없고…….”

구슬을 손에 넣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뚜껑을 열기만 하면 이렇게 구슬이 난리를 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서도진이라고 했나? 그자는 구슬에 해를 입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서도진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지금 제갈세가는 차기 맹주에 가문의 사람을 올리기 위해서 물밑 작업을 하는 중이었는데 유력한 경쟁자인 북리의천의 제자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가 괜히 그들이 더 점수를 딸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가와 살수단.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에는 두 거대한 세력이 결합하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 일에 연루된 곳 중 독고세가를 제외하고는 생존자가 없었다.

임무를 위해서 다른 곳에 가 있다가 우연히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제갈세가는 가문의 자랑인 정보각을 이용해 모은 정보를 독점하고 개방(丐幇)에서 얻은 정보와 하오문을 통해 얻은 정보까지 모두 손에 넣고 그것을 분석해 나갔다.

그 결과 어떤 무가와 어떤 살수 단체가 그 일에 선택되는지 하나의 규칙을 발견해 냈다.

이번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제갈세가에서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자기들이 알게 된 것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누가 다음 희생자가 될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꼭 그 일을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는 것이 세가 수뇌부의 중론이었다.

제갈유진의 생각도 같았다.

정보를 공유하는 순간 정보의 가치는 퇴색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줄어들게 된다.

무엇보다 규칙을 파악했다는 것을 알리는 순간, 그동안 일을 저질러왔던 자들은 더 이상 기존의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애써 규칙을 알아낸 의미도 사라지게 될 거였다.

제갈세가에서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제갈유진을 그곳으로 보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고 그녀는 세가에서 함께 보내준 무인들과 객잔에서 지내며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일찍 움직여 쓸만한 정보를 모았다.

독고세가의 사건에서 탈혼단의 살수들 몸에서 벌레가 나오고 그것이 구슬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던 제갈유진은 이번에도 그 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했다.

제갈세가에서 그 일에 공을 들인 이유 중 그 벌레나 구슬을 손에 넣고 싶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간혹 개방이나 하오문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 중에 북리의천의 제자인 서도진이 그 구슬을 가지고 다니며 신비한 능력을 사용한다는 얘기들이 있었다.

서도진에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는 말은 널리 퍼졌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반반으로 갈렸다.

눈속임이었을 거라며 그의 재능을 폄하하는 사람도 있었고 서도진이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걸 봤다면서 전부 다 헛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구슬에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고 제갈세가에서는 구슬을 얻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그녀는 구슬을 택했고 연가장은 멸문을 맞이했다.

아무리 정보력에 남다른 제갈유진이라고 해도 서도진이 여동생과 함께 그곳에 와 있다는 것이나, 자기가 옷을 맡긴 사람이 그들의 일행이라는 것은 역시 알지 못했다.

제갈유진이 맡긴 옷 중 몇 벌은 연가장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제갈유진은 비단을 볼 줄 알았고 연가장에 있던 몇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쉽게 구하기 어려운 새외(塞外)의 상등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아보고 챙겨 왔던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듯이 힐끔거리는 무인들도 있었지만 활동비는 거저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는 누가 나오려나? 현무단주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사천당문의 당채운이 새로운 현무단주가 되면서, 사파의 공격으로 존립이 위태로웠던 현무단은 단번에 이전의 영화를 되찾았고 그 후에는 사사건건 제갈세가의 의견에 반대 표시를 하며 북리의천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나이도 제갈유진과 비슷했는데 세가지연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사이가 가까워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그가 유일했다.

가깝다고 느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뿐이고 제갈유진 자신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당채운은 그런 것마저 없었다.

후기지수 중 으뜸이라는 칭송은 늘 남궁세가에서 가져갔는데 남궁세가가 몰락한 후 다른 문파가 아닌 사천당문에서 고수가 나왔다.

열여섯의 나이에 벌써 검강을 다루기 시작한 사람.

언젠가 검으로 제일인이 될 거라는 말을 듣는 이가 당채운이었는데 그는 북리의천이라면 껌벅 죽었고 북리의천과 묘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제갈세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흥. 그러라지. 그래 봤자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밖에 안 될걸? 이제 와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할 일을 다 마치고도 제갈유진이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은 당채운이 좌절하는 걸 보고 싶은 이유가 가장 컸다.

‘빨리 좀 오지. 슬슬 지루해지는데.’

제갈유진은 당채운이 이미 제남에 도착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

아진과 린린은 주먹밥을 먹으면서 무인들의 시신이 놓인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 산짐승이나 새가 와서 사람들의 시신을 뜯어먹으려 하면 그때마다 아진이 돌을 던져서 맞췄다.

처음에는 그냥 위협만 했는데 위협만 하고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이놈들이 얼마쯤만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결국 적극적으로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천령개를 맞춘 거야. 오라버니? 여기에서 그 각도가 어떻게 나와?”

“와아…… 너는 못 하냐? 어디 가서 네가 산본의가 딸이라는 말은 하지 마라.”

“왜 안 해? 내가 서도진 동생이라고 말하고 다닐 건데? 옷에다 바느질로 써서 다닐까? ‘서도진 동생임’ 이렇게?”

“진짜 그럴까? ‘서’만 새겨서 다니는 거야. 동창(東廠)이 ‘동(東)’을 새겨서 다니는 것처럼.”

아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린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진이 주위에 있던 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 번에 여러 개를 던지자 시신을 향해 다가가던 새와 짐승이 동시에 넘어졌다.

“아무리 멍청해도 저만큼 겪었으면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포기가 안 되나?”

이제 그 주위에는 그가 잡아놓은 짐승들이 수북했다.

그래서 그것을 노리고 더 많은 짐승이 모여드는 지경이라 아진은 일어나서 그걸 밖으로 한 번 치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쌓일 테니까 한 번에 해. 한 번에.”

그러면서 린린은 주위에 있는 돌들을 주워다가 제 오라버니의 주위에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아진은 그런 린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린린은 아진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온 가족이, 그리고 그녀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이 린린의 입술을 얼마나 열심히 봐왔는지 린린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입술 색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도 알았고 그것이 사람들을 실망하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건강해져서 붉은 입술을 갖게 된다면 저 얼굴에 웃음이 지어지겠지 하면서 이로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입술을 보면 검사라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항상 ‘오늘은 얼굴색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기대했지만 그런 말이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달랐다.

린린의 입술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흐뭇하게 씩 웃는 아진을 보면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제 파랗지 않아?”

“어. 붉은 기가 좀 돈다.”

“얼굴도?”

“얼굴은 여전히 강시같이 하얗지.”

린린이 주먹으로 퍽 치자 아진이 웃었다.

“핏기 좀 돌게 해 줄까?”

그러면서 아진이 린린의 볼을 쥐고 흔들자 정말로 핏기가 조금 돌았다.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아.”

아진은 생각난 김에 린린의 맥을 짚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동생이다. 내 동생인데 건방지게 구음절맥 따위가 찾아와? 멍청한 자식. 번지수를 잘못 찾았지.”

“번지수가 뭐야?”

“응? 아. 있어. 그런 거. 건물마다 붙여놓은 숫자.”

“그 이야기 해 줘. 오라버니. 거기에서 오라버니는 몇 살이었어? 몇 살까지 살았어? 아. 혼인도 했고 아이도 있었어?”

“무슨? 아니야.”

“몇 살이었는데? 거기에서 여기에 올 때.”

“서른여덟.”

“아아.”

“그냥. 좋은 사람을 못 만났어. 그리고 고민을 하느라고 시간이 없었어.”

“잘된 걸 수도 있네. 거기에 남겨두고 온 사람이 없는 거잖아. 그렇지?”

“뭐…… 그렇지. 가족들이 있기는 하지만 별로 좋은 기억은 없고.”

“아이고. 우리 불쌍한 오라버니.”

“그러게.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다시 연달아 다섯 개의 돌을 던진 아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은 짐승들의 사체를 그곳에 방치할 수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 그들이 일어섰을 때 짙은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