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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75화 (75/470)

제75화

75화

아진은 린린이 걱정돼서 린린을 보았다.

얘기를 듣기만 해도 끔찍해서 괜히 그런 말을 듣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린린의 얼굴은 지극히 평화로워 보였다.

오히려 호기심이 생긴 듯 더 얘기해 보라며 등짐 장수를 재촉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대요?”

“살수들이 그런 모습으로 여기저기서 죽어 있어서 지금 그곳은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잖습니까. 그리고 더 이상한 건 그 살수들이 절대로 연가장의 무인들을 죽일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는 거였다고 합니다. 아니. 기척을 숨기고 숨어 있다가 갑자기 기습하면 몇 사람은 죽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연가장 사람들 전체를 죽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거겠네요.”

린린이 대신 말을 잇자 등짐 장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겁니다. 그리고 연가장의 무인들에게 난 상처를 보면 거기에 난 검 자국이 더 말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살수들이 할 수 있는 검격이 아니었대요. 무섭지 않은가요? 저는 말을 하면서도 소름이 돋는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더했어요. 몇 사람은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졌어요.”

그러면서 등짐 장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는 다른 곳에 가서 듣기가 힘들 거라면서 자기 자랑이 대단했다.

“연가장이 평소에 원한 살 일을 많이 했다고 하던가요? 주변에서 연가장에 대한 평가가 어땠어요?”

아진이 묻자 등짐 장수가 고개를 저었다.

“무인들은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죠. 불평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무가가 있으면 사파나 흑도방파나 왈패들이 활개 치고 다니지는 못하니까 나을 수도 있어요. 연가장도 그 지역에서는 그런 역할을 한 것 같고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시신은 지금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아진이 묻자 등짐 장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마 현청에서 조사를 해야 했을 텐데. 아. 무림맹에서 나와 조사를 할 거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마도들이 벌인 짓인지 모른다면서 그 전에는 시신을 치우지 말라고 했다고 한 것 같아요. 이제야 생각이 나네요.”

“그게 언제 일입니까?”

“제가 얘기를 들은 게 이틀 전이고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게 이틀 전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남이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았다.

소청 모자를 데리고 산본의가에 먼저 가 있으라고 말을 하려고 한 거였는데 린린이 아진의 팔을 잡았다.

자기도 갈 거라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소청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자기들은 걱정하지 말고 어서 다녀오라는 것 같았다.

‘그때 그자들이야.’

아진은 등짐 장수의 앞이라 아직 린린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독고세가에서 벌어진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많이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짐이 많이 줄어서 가는 길이 훨씬 수월하겠습니다.”

“좋은 얘기를 해 줬으니 그러면 피풍의도 한 벌 삽시다. 아니, 두 벌 주시오. 어두운색으로 아이와 부인이 입을 걸로요.”

아진이 말하자 등짐 장수는 이게 웬 떡이냐는 듯이 서둘러 피풍의 두 벌을 꺼냈다.

구겨지고 볼품도 없었지만 추위를 막는 데는 유용할 듯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님. 오늘은 객잔에 가서 술이라도 한잔 사 마셔야겠습니다.”

등짐 장수는 그때부터 서둘러서 짐을 싸고 급히 떠나갔다.

“숨어 있으면 되는 거죠. 스승님?”

눈을 빛내며 소청이 물었다.

“시간이 있기만 하면 산본의가에 데려다줄 텐데…….”

“괜찮아요. 돌아오실 거잖아요. 그렇죠?”

“그래. 당연하다.”

아진은 소청에게 손수 피풍의를 걸쳐 주면서 조심히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자세한 것은 가 봐야 알겠지만 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을 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만약 늦어지거든…….”

어디로 가 있는 게 안전할까 하면서 아진이 생각하는 동안 소청의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집에 있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집이 보이는 곳에서요.”

그러고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아진이 머뭇거리자 린린이 나섰다.

“제남이면 여기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말을 타고 가면 하루 이틀이면 갈 것 같은데 말을 타고 같이 가는 게 어때? 오라버니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러는 게 낫겠어.”

괜찮다고 하던 소청 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등짐 장수에게서 무서운 얘기까지 들었던 터라 겁이 났는데 두 사람이 자기들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마웠던 것이다.

그래도 사양을 하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아진이 먼저 재촉했다.

“일단은 서두르시죠. 이번에 못 본다고 해도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죠.”

“그거야말로 무서운 말이야.”

린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청과 함께 가게 돼서 다행스러운 듯했다.

소청과 소청의 어머니는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두 필의 말을 사고 제남까지 가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지만 운이 좋았는지 무림맹은 그때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아진과 린린은 시신들을 볼 수 있었다.

소청과 부인을 객잔에 머물게 한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이 될 만큼 시신의 상태는 끔찍했다.

이미 부패가 시작돼야 했을 시신이 생각만큼 부패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아진은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살수들이 죽기 전까지 그 안에서 살수들을 조종했던 벌레의 영향으로 부패가 다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에서 그곳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고 시신을 치우지 못하도록 했지만 관에서는 시신을 치우지 않는 정도로만 협조했을 뿐 시신의 주위에 관군을 배치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두기는 하고 있었다.

아진과 린린은 몸을 낮추고 금줄 밑으로 들어갔다.

어딜 들어가는 거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지만 일단은 빨리 확인을 하고 나갈 생각으로 두 사람 모두 서둘렀다.

“그때는 벌레들이 스스로 나오지는 않았는데. 혹시 그 안에 있다가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도망간 걸까? 탈혼단의 살수들을 조종한 벌레들이랑은 어떤 관계일까?”

아진은 그때 북리의천이 시신을 불태웠고 시신에서 튀어나온 벌레가 흑주가 됐다고 알려주었다.

“그 벌레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오라버니? 멀리 도망쳤을까?”

“그러지 않았겠어?”

아진은 그렇게 말을 하고도 희망을 아주 버리지는 못한 채 주위를 다니며 벌레를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린린. 흑주는 특별했을 거야. 다른 벌레들도 흑주처럼 될 것 같지는 않아.”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기는 해.”

아진은 벌레를 찾는 일은 그만두고 살수를 조종해 무가를 멸문시키는 자들을 색출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알아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화가 스승과 산본의가에까지도 미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정사마 간에 지켜져 오고 있는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의원들이 죽음을 각오한 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거였다.

아진은 그것을 막고 싶었고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 * *

아진은 그곳에서의 일이 좀 더 지체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소청 모자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아진이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것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이곳에 오는 것만 해도 그랬다.

만약 자기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훨씬 일찍 도착해서 아진이 보고 싶어 했던 것을 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진과 린린이 객잔을 떠난 후에 소청과 그의 어머니도 나름대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소청의 어머니는 객잔에 투숙한 손님들에게 바느질거리를 얻어내 바느질을 해주며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묻곤 했다.

그 태도가 자연스러워서 사람들은 경계심 없이 자기들이 아는 것을 아낌없이 말해 주었고 그녀는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아진에게 모두 들려주었다.

바느질을 잘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소청의 어머니에게 일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었다.

“오늘도 바쁜 모양이네요.”

일부러 열어 두었던 방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삼십 대의 평범해 보이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네. 들어오세요.”

소청의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느질을 잘 한다고 해서 나도 일을 좀 맡길까 하고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왜 객잔에 머물면서 바느질을 해요? 객잔에서 머무는 값이 더 나올 텐데.”

그 말에 소청의 어머니는 요령껏 빠져나갔다.

“일행이 여기에서 볼 일이 있어서 객잔에 머무는 동안에만 하는 거예요.”

“그렇군요.”

옷을 가져오겠다며 여자가 돌아가더니 잠시 후에 여러 벌의 옷을 가져와 소청의 어머니에게 건넸다.

“이걸 감쪽같이 꿰맬 수 있겠어요? 다른 천으로 덧대거나. 천은 내가 사 올 수 있는데.”

소청의 어머니는 그제야 옷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말을 하는 여자 역시 좀 더 주의 깊게 보았다.

옷에 난 자국들이 하나같이 평범하지가 않았다.

검에 베인 자국.

그리고 핏자국.

어떤 옷에는 뇌기가 스친 것처럼 그을린 자국도 있었다.

그런 것은 아진이 수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알아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 있는 옷들은 그런 하자만 없다면 옷 한 벌에 은자 스무 냥은 족히 받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

소청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러나 눈에 드리워진 호기심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아아. 아깝잖아요. 수선만 잘 하면 입을 수 있겠던데.”

여자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방심해서 그런 건지 얼굴에 비해 어려 보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 옷을 입고 있던 사람들은…….”

“아! 오해하셨나 보네. 혹시 죽은 사람이 입고 있는 걸 훔쳐온 건가 한 거면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여자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옷은 버린 거예요. 버리라고 한 걸 챙겨 놓은 거죠. 동생이 무가에서 시비로 일하는데 가져왔더라고요. 버리라는 옷인데 너무 좋지 않냐고. 잘 잘라서 팔면 몇 푼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가져가라고 해서 가지고 왔죠.”

소청의 어머니가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길과 손가락이 옷감 위를 부지런히 오갔다.

버리는 부위를 최소화하고 옷을 살릴 방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싸게 해 줘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런데 이 얼룩은 안 지던가요? 이걸 지울 수만 있으면 잘라내지 않고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해 봤는데요? 당연히 안 질 것 같아서요.”

“그럼 제가 해 볼까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당연히 좋죠. 그러면 돈을 더 줄게요.”

소청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이골이 나게 봐 왔다.

소청의 아버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손은 시비로 일하는 동생을 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동생이 남의 집에서 시비로 일을 한다면 여자도 비슷하게 살아왔어야 했을 텐데 여자는 지금껏 험한 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고운 손을 갖고 있었다.

그 손으로 한 일이라고는 좋은 방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하면서 소청의 어머니는 얼룩진 옷들을 챙기며 여자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인피면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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