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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74화 (74/470)
  • 제74화

    74화

    린린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진맥을 해서 린린의 맥은 아진에게 익숙했다.

    아프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린린이 아진을 바라보면 아진은 눈꺼풀이 까지도록 눈물을 닦았다.

    대신 아파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게 신기했다.

    정말로 그래 주고 싶었다.

    이렇게 힘들게 숨 쉬지 않고 잠시라도 편안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린린. 정말 안 아파?”

    “응. 오라버니. 내 입술 어때? 붉어?”

    “붉긴. 개뿔이 붉어.”

    “개뿔? 그게 뭔데?”

    “개뿔도 모르냐?”

    “아아. 뭔지 알겠다. 오빠가 살던 거기에서 쓰던 말이지?”

    린린이 웃으며 말했지만 아진은 무시했다.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붉지는 않았지만.

    달랐다.

    여느 때와 확실히 달랐다.

    “소청아. 집에 명경 있어?”

    린린이 묻자 소청이 위험하게 깨진 거울을 가져왔다.

    “없었는데 땅에 떨어져 있어서 주워 왔어요. 제가 들고 있을까요?”

    그러면서 소청이 린린의 앞에서 거울을 들어 주었고 린린은 거기에 잘 맞춰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 안 보이세요?”

    실컷 조준에 성공했는데 소청이 도와준답시고 거울의 방향을 틀자 린린이 소청을 말렸다.

    “너는 그대로 있어. 우리 중에 한 사람만 움직여야 해.”

    “아아. 네.”

    린린은 마침내 자기 입술을 보는 데 성공했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는지 뾰로통해졌다.

    “그래도 어제보다 훨씬 나아요. 어머니. 그렇죠?”

    소청이 분위기를 띄우자 그의 어머니도 정말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의원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 것 같아요. 이때까지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을 고쳤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는데. 세상에.”

    “이곳이 터가 좋은가 봐요.”

    아진이 말하자 소청이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면 여기에서 좀 더 살아도 돼요. 스승님?”

    “응. 당분간은 그래도 될 것 같다. 나도 연구를 더 해야 하는데 여기가 조용해서 좋기도 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건 힘이 들기도 했고 돈도 들었지만 언제 어디서 귀찮은 사람들이 들러붙을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여기에 있는 동안 아진은 연구를 바짝 해서 성과를 낼 생각이었다.

    소청에게 마공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남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이곳이 좋았다.

    “그런데 스승님. 밖에서는 이런 걸 하면 안 되죠?”

    소청도 자기가 하는 무공이 위험한 거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아진에게 물었다.

    “응. 옆에 내가 있을 때만 해.”

    “네. 스승님.”

    소청의 어머니는 밝은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제 곧 소청과 떨어져야 하는 건가 하다가 얼마간은 같이 있을 수 있어 기뻤던 것이다.

    “오늘은 바느질할 걸 얻으러 다녀올 건데 혹시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의원님.”

    소청 어머니의 말에 아진이 급히 두 손을 젓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진작 챙겼어야 했는데 생각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동생이 작작 먹어야 할 텐데 너무 많이 먹어서 식비가 많이 들지요?”

    “아이고. 무슨 말씀이세요. 고기반찬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잡곡에 풀밖에 없어서 늘 죄송한 마음인데요. 아직 치료비도 드리지 못했고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중에 소청이에게 전부 다 받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소청이가 일류 고수만 돼도 한 달 몸값이 은자 서른 냥은 될걸요?”

    “히익! 은자 서른 냥요? 정말요?”

    소청이 깜짝 놀라자 소청의 어머니도 그게 정말이냐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네. 일류 고수도 일류 고수 나름인데 소청이는 같은 일류 고수 중에도 특별할 거니까요.”

    “의원님. 제가 빨리 일류 고수가 돼서 돈 갚을게요.”

    “한 달만 하면 다 갚겠다.”

    린린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소청이 배시시 웃었다.

    드디어 밥값을 하는 제 모습이 상상되어서 기쁜 것 같았다.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올 때 사 올게요. 오는 길에 시장이 있으니까 나간 김에 사 오면 돼요.”

    “그러면 오리고기를 사다 주시겠습니까? 많이요.”

    소청의 몸을 키울 생각으로 말하자 소청의 어머니가 다른 건 더 필요하지 않은지 묻고 밖으로 나갔다.

    “소청아. 그동안 배운 걸 한번 해 보자.”

    “예. 스승님.”

    소청은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아직 내공을 사용하는 것이 미숙하고 동작에 위력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구결에 대한 이해 자체는 높은 편이었다.

    린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가 봤다면 린린이 소청 같은 아이를 알고 있어서 소청을 보며 그 아이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진은 린린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우선은 소청의 동작을 지켜보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게 잘 안 넘어가요. 의원님.”

    “명문혈을 지날 때 속도가 충분치 않아서다. 지금 나오는 속도의 세 배는 되도록 빠르게 움직여야…….”

    그 말은 아진이 아닌 린린에게서 나왔다.

    린린은 말을 해 놓고 나서 자신도 당황한 듯했다.

    그러면서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아진이 그녀를 바라보자 린린 역시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냐는 듯이 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린린이 모르는 걸 아진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청은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조용해졌다.

    “그래. 잘 했다. 소청아. 어쨌건 이걸 중점적으로 익히기는 해야겠지만 이건 사람들의 앞에서 내보이면 안 되니 다른 무공도 익히도록 하자.”

    “그건 정파의 것인가요. 스승님?”

    “그렇지. 내가 창안한 것이라 조금만 손보면 네 심법으로도 할 수 있을 거고 누가 문제 삼는 일도 없을 거다.”

    “예. 스승님.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계속 연습해라.”

    소청은 아진이 린린과 따로 할 얘기가 있는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조용히 물러났다.

    “린린. 혹시 흑주의 기운 때문일까?”

    “아아…… 그래서 그런 건가?”

    린린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였나 보구나.”

    “그런데 소청의 내공이 흐르는 것도 보였어, 린린?”

    “보인 건 아니고 느껴진 것 같아.”

    “신기하다.”

    “그러게.”

    린린은 생각난 김에 주머니를 꺼내 만년화리의 내단과 함께 든 구슬 조각을 보았다.

    아진도 함께 그것을 보다가 구슬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네가 막 태어났을 때 구슬이 네 침대 주위를 굴러다녔는데 네가 태어난 게 반가운 것 같았어. 그때는 내가 너무 구박을 했었지. 그래서 새 주인을 찾아보려고 네 주위를 어슬렁거렸나 봐. 우리는 흑주가 너한테 가는 게 좀 불안하고 불길하고 그랬는데 너는 그런 것도 모르고 두 손으로 흑주를 잡고 핥아 댔었어. 흑주가 말은 못 하고 기분만 더러웠을 거야. 그때 네 손가락이 이만했는데.”

    아진이 제 손가락 두 마디를 잡고 보여주며 말하자 린린이 피식 웃고는 주머니를 넣었다.

    “아주머니만 혼자 가시게 해도 되는 거였나 모르겠네.”

    린린이 문 쪽을 보며 말하자 아진도 뒤늦게 걱정이 돼서 나가 볼까 하며 주섬주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었다.

    바느질거리를 얻으러 간다던 소청의 어머니가 등짐 장수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 * *

    등짐 장수는 거저 주는 것이라는 말로 순식간에 물건 몇 개를 팔아 치웠다.

    “집에 동경도 없는 게 창피했는데 마침 이 분이 보여서 동경도 파냐고 했더니 바로 따라오잖아요?”

    소청의 어머니는 그것이 내내 신경 쓰였던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린린은 괜한 일로 돈을 쓰게 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진은 돈을 내주며 필요한 건 이 사람에게 사면 되겠다면서 금세 큰손으로 등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청의 옷이 작아진 것이 계속 눈에 밟혔던 터라 소청의 옷도 여러 벌을 사주고 소청 어머니가 입을 옷도 사주었다.

    앞으로는 산본의가에 가서 지내게 될 텐데 지금 가지고 있는 옷이 여기저기 기운 것 두 벌 뿐인 것 같아서 옷을 골라 주자 소청의 어머니는 거절도 못 하고 받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희를 재워 주고 먹여 주시는데 이 정도는 받으셔도 돼요.”

    린린이 말하자 소청의 어머니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경과 먹을 것을 좀 사려고 데려온 건데 자기와 소청의 옷만 잔뜩 사게 된 것 같아서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등짐 장수는 생각지도 않게 장사가 잘 됐다고 생각했는지 싱글벙글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 있으면 외부 소식을 듣는 건 어렵겠네요. 제가 아는 얘기가 좀 있는데 해 드릴까요?”

    그는 일어나서 가는 게 귀찮아졌는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아진도, 린린도 그런 얘기에 혹하지 않았지만 소청은 다른 듯했다.

    “네. 아저씨. 얘기해 주세요.”

    “그럼 그래 볼까?”

    그러면서 등짐 장수는 자기가 아는 얘기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얘기를 해 보면서 좋은 반응이 나오면 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할 생각인 것 같았는데 처음 몇 개는 반응이 다들 시큰둥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듯 그는 무림맹의 얘기며 세가지연 얘기 같은 것들을 했는데 그건 더 관심이 안 갔다.

    “아. 그럼 혹시 이런 얘기는 좋아하실지……. 이건 사람마다 하는 소리가 워낙 달라서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의심이 가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아주 없는 소리를 지어낸 것 같지는 않아요.”

    그때는 모두 집중력이 떨어져서, 등짐 장수에게 산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이제 그냥 가라고 할까 하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연가장에 대해서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래도 제남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난 무간데 그곳에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난리요?”

    소청의 어머니가 조금 관심을 보이자 등짐 장수가 옳다구나 생각했는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예. 그곳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고 합디다.”

    “무가라면서요?”

    “예. 그래도 연가장이라면 제남 삼십 대 고수에 두 명 정도는 이름을 올리는 곳인데 하룻밤 사이에 전부 다 죽었대요. 연가장의 장주는 특히 절정 고수로 이름이 알려진 분인데……. 그런데 이상한 게 뭔지 아세요? 연가장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제남의 살수들이었는데 그자들도 모두 죽었다지 뭡니까?”

    “살수들이 죽어요? 살행을 하다가 들켜서 죽은 걸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죽었으면 다른 사람들은 살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된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살수들이 죽은 곳은 연가장이 아니었대요. 살행을 성공하고 나서 돌아가다가 죽은 겁니다. 그런데 그 시신들이 이상했다고 하던데…….”

    등짐 장수는 아이가 들어도 될까 하는 듯이 소청을 한 번 바라보았다.

    소청의 어머니는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소청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등짐 장수가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게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얼굴이 터져서 죽었다지 뭡니까? 목이 잘린 것도 아니고 얼굴 앞쪽이 터져 버렸다는 겁니다.”

    “얼굴이…… 터져요?”

    소청의 어머니는 그 말이 잘 이해도 안 되고 상상도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네. 말 그대로입니다. 얼굴이 터져 버렸는데 자세히 보니까 입이 찢어져 있었대요. 목뼈가 전부 부러져 있었고요. 그런데 그게 외부의 가격 때문이 아니라 몸속에 있던 게 목을 뚫고 입으로 나오면서 생긴 것 같은 자국처럼 보였대요.”

    “으으으윽!!”

    소청의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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