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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73화 (73/470)

제73화

73화

“오라버니. 그 말을 안 믿는 건 아닌데 죽는다고 해도 나는 정말 행복했다는 걸 더 기억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아. 나는 정말 운이 좋았고 충분히 즐거웠어. 누가 나처럼 오라버니의 누이로 태어날 수 있겠어? 아버지, 어머니의 딸이 되고 큰 오라버니의 누이가 된 것도 그렇고. 그러니까 내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마.”

죽어도 그런 말을 못 할 것 같던 린린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슬퍼할 거니까 그게 걱정되면 네가 살아.”

아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린린은 이제야 오라버니답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아진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산산조각이 난 구슬을 손으로 쓸어 담았다.

그걸 어떻게 할지 아직 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린린이 품에서 작은 향낭을 꺼냈다.

“여기에 넣어줘. 갖고 다니게.”

“그래.”

“그리고 그것도 넣어줘. 만년화리의 내단.”

린린은 남궁진이 죽는 순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내단을 눈길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진은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린린의 몸이 이겨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린린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훌륭한 영약이라는 것은 말을 할 것이 없었다.

일부러 구하려고 해도 찾기 어려울 영약이 저절로 손에 들어온 거였다.

단지 그 극양의 기운이 너무 위험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진의 시선이 깨진 구슬에 닿았다.

‘흑주. 너에게 기대해 봐도 되겠어?’

이제는 어딜 보나 흑주라 불릴 수 없게 깨져 버린 조각에서 잠시 빛이 난 것처럼 보인 건 아마도 환영이거나 착시였을 것이다.

그래도 아진은 희망을 담아 그것들을 린린의 주머니에 넣었다.

밖에서 수많은 사람의 발소리가 우당탕탕 들려오더니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미 벽이 부서져 나가고 지붕이 가라앉았으니 안에서 일어난 소란을 밖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진은 그들이 오기 전에 도망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늦어 버렸다.

그러나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소협. 소협께서…… 소협께서 이 악적을 처단하신 것입니까…….”

검을 빼 들고 서 있는 무인들의 뒤에 서 있던 총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아진이 린린을 바라보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구의 시신은 항변할 수 없었고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진과 린린 뿐이었다.

아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자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창문으로요. 허공답보를 해서 밖을 지키시는 분들이 알아차리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진과 린린의 몸에 튄 핏자국을 보며 얼마나 위험하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건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린린의 새파란 입술은 이럴 때 한층 더 효과를 발휘했다.

누가 보더라도 끔찍한 참상이 벌어진 것을 보고 겁에 질린 소녀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 * *

두 사람은 다시 성주의 관사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형식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총관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린린도 아진도 긴장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래 있지는 못합니다. 동생이 아프고 약재를 찾아야 해서 말입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아진이 말하자 그가 북리의천의 제자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한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끝을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아. 그리고 소협께서 말씀하신 현령 건은 처리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소협께서 말씀하신 일이라 어제 성주님께서 즉각적으로 처리를 하라고 하셔서…….”

어제 명령을 내린 성주가 지금은 죽고 없다는 사실이 섬뜩했는지 총관이 입을 다물었다.

“네. 고맙습니다.”

“소협이 검신 대협의 제자라고 말하자 현령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군요. 자기는 몰랐다고 하더랍니다. 그걸 미리 말했으면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면서 흐느껴 울더라는데 그런 작자가 현령이었다니…….”

총관은 경멸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가며 말했다.

“파직입니까?”

“예. 성주님의 명을 전하면서 그 자리에서 즉각 파직을 시켰고 죄인을 이곳으로 이송하게 했습니다. 아마 내일쯤 도착할 것입니다.”

“현령의 딸도 벌을 받게 됩니까?”

“아직 어려서 그 아이의 벌은 부모가 대신 받게 될 것입니다. 성주님이 이미 엄벌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은 성주님이 돌아가신 지금도 변함없이 시행될 것입니다.”

“투옥입니까?”

“예. 그 전에 아이의 어머니가 무고하게 당했던 태형의 세 배를 가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세 배라면. 그건 태형을 가할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서는 것일 텐데요?”

“예외적으로 허용될 때가 있는데 그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일은 현령을 살려 두는 것보다 그냥 벌을 받다가 죽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형벌의 효과가 좋지 않습니까.”

현령은 자신이 내린 명령이 소청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목숨을 끊게 될 거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린린이 아진을 바라보자 아진은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냐는 얼굴을 했다.

“오라버니. 괜찮아?”

“뭐가?”

“아니. 괜찮냐고.”

오라버니 때문에 현령이 죽게 됐는데 그렇게 돼도 괜찮냐는 질문인 것 같았는데 아진은 그렇게 묻는 린린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괜찮지.”

“그럼 됐어. 나는 오라버니가 안 괜찮을까 봐 걱정돼서 그랬지.”

린린의 말에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청의 어머니에게 태형을 명했을 때 현령은 소청의 어머니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고 아진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도 죽었을 터였다.

그 결과를 아진이 막았다고 해서 현령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총관은 내내 아진과 린린의 곁에서 그들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알려 주었다.

그래서 관부의 사람들이 들어와서 엄한 표정으로 질문을 해도 그리 겁이 나지 않았다.

모두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니 그냥 본 것을 사실 그대로 말하면 된다고 했지만 사실 그대로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많은 부분을 각색해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진은 순발력이 대단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질문이 들어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거짓말을 이어나갔다.

린린마저도 그런 아진의 대담함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다 됐습니다. 성주님을 구하지는 못하셨지만 악적을 처단하셨으니 그 공이 큽니다. 만약 소협께서 그자를 처리하지 못하셨다면 수많은 인력이 동원돼야 했을 것입니다. 현장을 보니 악적을 잡기 위해 관군들이 수도 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 같고 말입니다.”

총관은 진심으로 아진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곧 새로운 성주님이 내려오실 겁니다. 말이 곧이지, 부임하시기까지 두 달 정도는 걸리겠지요.”

총관은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아진이 더 이상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돌아가도 되는 것입니까?”

“예. 소협. 부디 검신 대협께 본성에 대해 좋게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좋게 말을 할 게 뭐가 있는가 했던 것이다.

* * *

그들은 결국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늦게 소청에게 돌아갔다.

소청의 집으로 가자 내내 그곳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소청과 어머니가 달려왔다.

“스승님. 오셨어요? 무사하신 거지요?”

소청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며 두 사람을 걱정했다고 했다.

“현청에서 사람들이 나오지는 않았어?”

“네. 스승님. 저도 사람들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안 왔어요. 처음에는 조금 멀리 도망가야 할까 했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해서 가까이 와 있었어요.”

“그래. 잘 했다. 일이 다 잘 됐다. 현령은 파직당했어.”

아진은 그 정도로만 말을 하고 성주가 죽었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할까요, 스승님?”

소청은 혹시 그사이에 계획이 바뀐 것은 없는지 궁금한 듯이 물었다.

“당분간은 여기에서 머물러도 될 것 같다. 구결은 외웠고?”

“네……, 스승님.”

어째 목소리에 자신이 없는 것을 듣고 아진이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은 못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포기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너 자신도 몰라보게 변해 있을 거다.”

“네. 스승님. 포기는 절대로 안 할 거예요.”

“배가 고프시겠어요. 얼른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소청의 어머니가 급히 말하며 사라졌고 아진은 소청에게 그동안 연습한 것을 해 보라고 말했다.

“그동안이라고 해 봐야 하룬데요. 스승님?”

소청이 말하며 웃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루지. 그런데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내가 그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단다.”

“네…….”

소청은 본전도 못 찾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진이 가르쳐 준 것을 해 나갔다.

린린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지만 아진은 린린이 소청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임지고 가르치라고 하니까 긴장된 거야?”

“응? 응.”

린린은 아진의 목소리에 놀란 듯했다.

뭔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빠져나온 것 같은 린린의 모습을 보며 아진은 린린의 머리를 헝클었다.

“정신 차려. 인마. 그렇게 넋 놓고 있지 말고.”

“응.”

린린은 그 후로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청이 연습할 때마다 묘한 시선으로 소청을 보곤 했다.

아진은 그게 신경 쓰여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변변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소청에게 마공을 가르치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건가?’

아진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소청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아진도 소청에게 정파의 무공을 가르치는 게 어떨까 했지만 소청의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소청에게 해 온 벌모세수와 모든 것이 마공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소청의 몸을 만들어 온 것이라 이제 와서 그것을 포기하는 게 아까웠다.

그리고 아진은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게 미지의 적을 상대할 때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공을 익혔다고 소청을 핍박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먼저 자신이 나서서 응징할 터였다.

‘그래도 일단 스승님의 의견은 들어 보는 게 좋으려나?’

그러면서도 아진은 쉽사리 북리세가를 향해 떠나지 못했다.

만에 하나 북리의천이 소청에게 마공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 *

아진은 아침을 들기 전 린린을 진맥했다.

린린은 칭찬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나 많이 나아진 것 같지?”

아진은 무책임하게 낙관적인 말을 해서 희망을 품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리고 약해도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맞춰서 준비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막연한 희망을 주는 게 아니었다. 린린의 몸이 전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 그에게도 느껴졌던 것이다.

“너. 뭐했냐?”

아진이 멍한 얼굴로 묻자 린린이 장군처럼 웃었다.

“음흐하하하하하!! 정말 나은 거지? 정말 나은 것 맞지?”

“다 나은 건 아니야. 상태가 나아진 것 같다는 거지.”

“그래도 나아졌잖아. 그렇지? 오라버니. 이런 거 나아졌다고 말한다고 돈 들어? 되게 야박하게 구네. 아니다. 오라버니가 말 안 해도 돼. 내가 느끼니까.”

“느껴? 정말 너. 아무렇지도 않냐?”

아진이 린린의 얼굴에 머리를 들이밀고 물었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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