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72화
“내 손에 죽어간 정파 고수의 수가 오백이 넘는다. 고수가 아닌 자들까지 합하면 삼천 명이 넘을 것이다.”
말을 하는 남궁진의 목소리에서는 아직 숨이 찬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긴 건 성실하게 생겼는데 일은 쉬엄쉬엄했나 보군.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은 것 같은데 지금쯤은 더 많아야 했을 것 같은데. 내 자랑은 아니지만 그 나이에 내가 죽인 괴수는 이만이 넘었다. 와…… 그때는 정말 눈물 나게 열심히 살았네. 그때 나는 강하지도 않았거든. 그런데도 이만을 죽였지. 네 나이에 그랬다는 거고 그 후까지는 오만 정도 죽였으려나?”
남궁진은 아진의 목소리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에도 놀랐지만 아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더 놀랐다.
이놈은 왠지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종류의 미친놈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진은 격전을 벌이다 말고 옛 기억을 더듬으려는 것처럼 잠시 멈추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그랬네. 일단 강해지고 난 다음에는 정말 닥치는 대로 학살을 하고 다녔구나. 그 몇 년 동안 내가 죽인 게 더 많은데?”
네놈이 몇 살인데 그런 소리를 한다는 말이냐고 일갈하려다가 남궁진은 입을 다물었다.
아진이 노린 게 그것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흠. 얼굴을 보니까 안 궁금한 것 같은데. 그럼 싸움이나 계속할까?”
내공을 자랑하려던 남궁진의 계획은 수포로 되었다.
그 점에서는 아진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진이 다시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격이 아진을 향했다.
해일 같은 장력이 아진을 덮쳤다.
집채만 한 손바닥이 전력으로 다가와 얼굴을 때린다면 그런 기분이 들까.
그것은 전혀 상상할 수 있었던 공격이 아니었고 아무리 아진이라고 해도 그 순간에는 당황하며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다가 검기와 검강을 베어내는 검으로 장력 역시 벨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진이 검을 휘둘렀을 때였다.
엄청난 폭음이 터지면서 벽과 천장이 부서져 나가고 눈을 아프게 찌르는 빛이 작렬했다.
아진이 남궁진을 놓친 것은 단 한 순간이었다.
‘없어?’
아진은 눈앞에 남궁진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은 순간 린린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고개를 돌려 남궁진이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보다 그게 더 먼저였다.
“린린!”
남궁진의 손이 린린의 혈을 점하려 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진과 린린은 모두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죽일 생각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만년화리 내단을 먹이고 죽이려는 계획을 가진 남궁진이었다.
아진은 그때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기세로 몸을 날리고 검을 휘둘렀다.
함께 이루어질 수 없는 여러 가지 동작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검에는 그의 키를 넘는 검강이 솟구쳤고 그것이 그대로 남궁진을 향해 날아갔다.
보고 도망치라고 날린 일격이었다.
맞고 죽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 틈만 있어도 린린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날린 공격이었는데 남궁진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 검강이 어떤 것이라고 그것을 등으로 온전히 맞은 것이다.
몸이 터져나갈지언정 린린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점혈을 하려던 손이 움직여 린린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등이 갈라지고 하얀 뼈가 드러났다가 그 위에 피가 번졌다.
그래도 바로 쓰러져 죽지는 않았고 남궁진은 그 시간마저 잃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아진은 다급해졌다.
남궁진이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남궁진의 그런 모습은 일견 소청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자기가 죽건 말건 린린을 데리고 가서 린린에게 만년화리의 내단을 강제로 먹이겠다는 일념밖에 없는 자를 상대로 다른 공격은 소용이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생각을 하면서 다시 검을 들었을 때였다.
실제로 지나간 시간은 3초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진의 손이 움직였다.
린린의 손목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입을 향했다.
제 등이 찢겨 나가고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몸이 터져 버려도 린린에게 내단을 먹이겠다는 생각 말고는 어떤 것도 그의 머릿속에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종류의 미친놈은 아진도 처음이라 그는 가슴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목을 베야 한다!’
남궁진은 죽어도 이미 한참 전에 죽었어야 했고 쓰러져도 한참 전에 쓰러졌어야 했다.
뼈에 가로막혀 심장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인간이라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어야 했다.
아진은 진저리를 내며 남궁진의 머리를 노렸다.
단번에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공격을 예상했다는 듯 남궁진은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펼쳤다.
다른 곳을 공격하면 그냥 맞아 주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곳만 번번이 호신강기로 막아대니 아진도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진이 검을 내던지고 남궁진에게 달려갔을 때 남궁진은 린린의 입에 내단을 넣고 얼굴을 틀어쥐려 했다.
“아아악!”
린린은 몸부림을 치며 그의 손을 피하려 했다.
성주가 가지고 있다던 내단이 왜 그의 손에 있는 건가 하면서 아진이 남궁진의 팔을 잡고 어깨뼈를 부숴 버리는 순간 그의 눈에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으으으……!”
“린린!”
아진은 남궁진을 떼어 내면서 린린을 불렀다.
린린은 놀란 얼굴이기는 했지만 내단을 먹지는 않은 듯했다.
“오라버니. 나는 괜찮아. 그보다…… 흑주가…….”
린린의 말에 아진은 그제야 남궁진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으흐으윽!”
지금까지 제 몸이 당하는 고통에 그저 무심하기만 한 것 같던 남궁진이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뭔가 했다.
린린에게서 흑주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알지 못했을 것이다.
흑주는 남궁진의 심장을 보호하는 뼈를 부순 채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대로 구멍을 내 버리려는 것 같았다.
흑주는 그동안 공격이 거의 끝나가는 상대에게서 진기를 빨아들이는 것에 전념했는데 그때는 달랐다.
린린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진 것 같은 형국이었던 것이다.
남궁진은 이대로 있다가는 죽겠다고 생각했는지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에 강기를 덧씌운 채 흑주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그때 흑주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단단한 구슬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본체에 균열이 가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흑주가 몇 개의 덩어리로 나뉘었다.
남궁진은 그 상태로 계속해서 진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어차피 생사를 걸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남궁진은 선천진기까지 전부 써 버릴 생각으로 덤비는 것 같았다.
“린린!”
아진은 린린이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고 그녀의 몸에 재빠르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린린은 아진의 손을 잡으며 자기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보다 흑주를 도와줘. 오라버니.”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궁진의 손목을 잡고 꺾었다.
남궁진은 생각지도 않은 흑주의 공격을 받고 거기에 힘을 너무 많이 써 버린 후였다.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윽!”
이럴 수는 없다고 부르짖으며 남궁진은 몸부림을 쳤다.
그러면서 아진에게서 빠져나오려 애썼지만 아무리 손가락에 강기를 씌웠어도 아진의 괴력 앞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흑주가 나서 준 그 시간이 남궁진과 아진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흑주에서 흩어져 나가던 검은 빛은 다시 흑주로 돌아오지 못했고 균열은 점점 더 커졌다.
“이 자의 진기를 흡수해라. 흑주. 그리고 린린을 지켜라.”
아진은 흑주가 아니었다면 린린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말했다.
그러나 흑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끝끝내 중심축까지 금이 가더니 결국 쩡 소리를 내면서 흑주가 반으로 갈라졌다.
갈 길을 알지 못한 채 검은 기운이 구슬에서 쏟아져 나오더니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 린린이 손을 펼쳤다.
그러자 흑주에서 빠져나온 검은 기운이 린린을 향해 급히 내달렸다.
“린린!”
흑주의 도움을 받고는 있었지만 그 기운이 불순하다는 생각을 했던 아진은 그것이 린린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 불안했고 린린을 막고 싶었다.
“놔둬. 그게 필요하다면 내가 할 테니까.”
아진이 손을 펼쳤지만 흑주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린린은 놔두고 나한테 와!”
그러나 린린은 손을 거두지 않았고 흑주의 기운은 순식간에 린린의 손으로 사라졌다.
“…….”
아진이 돌아보았을 때 남궁진의 가슴에 박혀있던 흑주는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모든 빛을 잃은 채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사념이었을까. 제 몸을 잃은 자들의?’
아진은 그 상황이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이리 와. 린린.”
아진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린린이 아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제 머리 위에 얹었다.
“나 괜찮아.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지켜 줬잖아. 항상 다짐한 것처럼.”
내공을 양껏 쓰고도 흔들리지 않던 아진의 목소리가 그때만큼은 정신없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린린이 말했다.
아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린린의 맥을 확인했다.
흑주에서 쏟아져 들어간 검은 기운이 린린의 몸을 조금이라도 잠식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신의 선천진기를 불어넣어서라도 그 기운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린린의 기혈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표면처럼 잠잠했다.
몰아치던 기운이 어떤 파동조차 만들지 못했다는 듯이.
‘오히려…….’
린린의 혈맥은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동안 혈맥을 보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왔던 아진은 그 변화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기운이 혈맥에 들어간 건가?’
영약을 흡수할 때 내공이 전부 퍼지지 않고 한 곳에 웅크리는 일이 종종 생기곤 했는데 흑주의 기운은 특이하게도 혈맥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것도 구음절맥을 앓고 있는 린린의 취약한 혈맥을 찾아서.
‘…….’
아진은 바닥에 떨어진 구슬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게 린린을 구한 건가? 제 몸을 던져서?’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실체를 갖지도 못한 것이.
물론 구슬로서의 모습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것이 린린을 구했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미안하다. 린린.”
“뭐가 미안해. 약속 지켰잖아. 오라버니. 그리고 나도 오라버니 부탁 들어줬고. 안 죽었잖아. 잘 했지?”
린린은 자기가 잘 했으니까 칭찬을 해 달라는 듯이 아진의 손을 잡고 머리 위에서 흔들었다.
아진의 손바닥에 린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느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사라지고 부서진 게 구슬이 아니라 린린이었으면…….
린린이 그렇게 됐으면 어째야 했을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 점점 무서운 게 생겨나. 소중한 사람이 생겨난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지 알 것 같아.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고 형님이 그러더니 이제는 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나는 더 강해져. 린린. 오라버니가 너를 고칠 거야.”
평소 같았다면 닭살이 돋는 것 같아서 절대로 하지 못했을 말이 그 순간에는 나왔다.
제 동생을 잃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용기가 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