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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71화 (71/470)
  • 제71화

    71화

    이 자리에서 린린을 구하고 두 사람이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오라버니. 잘 됐어. 저자가 성주를 죽인 거로 하면 되잖아. 어차피 본 사람도 없는데.”

    아진은 린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자기를 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린린이 아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링 위에 선수를 올려보내는 코치처럼, 가서 이기고 오라고 응원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녀석은 나를 믿고 있는 거다. 린린이 상황을 판단하는 데 상대에 대한 정보는 필요가 없다. 이 녀석은 나에 대한 정보만을 가지고 결과를 예측하고 멋대로 안심한다.’

    아진은 그 생각을 하고 피식 웃었다.

    “다치지 않게 잘 피해.”

    “당연하지. 바로 죽이지는 마. 성주가 만년화리의 내단을 어디에 숨겼는지 저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알아내고 죽여. 알았지? 어쩌면 병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린린의 말에 아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허공 위에 저렇게 서 있다는 것은, 그저 창밖에 있는 남자가 할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막대한 내공을 바탕으로 평범한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상승 무공을 펼치고 있다는 건데 린린이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공에서 기다리는 것이 생각보다 지루했는지 남자가 창문을 걷어찼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성주를 일별하더니 성주가 죽은 것을 알아차린 듯 아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진은 그가 삼십 대 중반쯤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이 가늘고 옆으로 길었다.

    콧대가 오뚝하고 표정이 없는 것이 아진이 아는 누군가와 아주 비슷했는데 그게 누군지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아 뇌가 가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진은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복수를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철저히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

    그런 편이 오히려 상대하기가 쉬울 것 같기도 했다.

    “남궁진이다.”

    “서도진.”

    “결국 만나게 되는군. 어차피 한 번은 만나게 됐을 것이다. 조금 당겨진 것뿐이지.”

    여러 가지로 희한한 느낌이었다.

    한 번도 상대해 본 적 없는 괴수를 사냥하기 위해 던전에 들어가는 것처럼 대기마저도 아진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 같은 느낌.

    그런 기분을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이만큼이나 긴장을 하게 한 사람이 전에 누가 있었을까 해도 쉽게 그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남궁진의 시선이 린린을 향하자 아진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성주에게 얘기를 들었다. 성주가 죽은 것보다 더 큰 죄를 네가 지은 것 같던데.”

    “그래서 나를 죽이겠다? 할 수는 있고? 할 수 있으면 그러면 될 텐데 왜 말만 하는 거지?”

    그가 말하고 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아진 혼자만 있었다면 아진은 얼마든지 도전 의식을 가지고 그곳에서 그와 겨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린린이 함께 있었다.

    함부로 싸움터를 옮겨 버릴 수도 없었고 린린이 있는 반경 내에서 싸워야 했다.

    싸움이 갑자기 거칠어질 때를 대비해 린린을 보호하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도 아진에게는 족쇄로 작용했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몰랐으니 후회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후회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아진은 자기가 남궁진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자기가 남궁세가에서 벌인 일이 있었고 그곳에서 죽인 자 중에 남궁진보다 훨씬 더 무위가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남궁진을 무시한 것이 사실이었다.

    솔직히 그가 허공답보와 비슷한 술법을 써서 창문으로 걸어왔을 때 아진은 자신이 세운 수식이 틀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

    남궁진은 아진을 들여다보았다.

    단순히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시선이었다.

    “아……!”

    아진이 작은 탄성을 냈다.

    생각났다.

    누굴 닮은 건지.

    처음, 아진이 헌터로 각성했을 때 헌터 연구소에서 나왔던 그 남자.

    그 남자가 그렇게 생겼었다.

    혹시 그 남자도 모종의 일에 휘말려 이곳에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첫인상이 상당히 닮아 있었다.

    ‘와. 그 생각하니까 기분이 확 잡치네?’

    아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 검을 집어 들었다.

    싸우려고 온 거라면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모로 보나 눈앞의 남자는 대화나 하자고 이곳에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는데.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앞으로 네 동생에게 할 일이 정당하지 않은 일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거든. 그래서 그 대가라고 할까. 네 목숨은 살려 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남궁진의 말에 아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평소에는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일단 린린이 연관되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다시 한번 설명해 줄까? 성주가 제대로 설명은 해 주던가?”

    “다시 한번 말을 해 보시지. 나도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까.”

    “그래? 그러지. 나는 성주에게 만년화리 내단을 팔았어. 가주의 보고(寶庫)에 있더군. 다른 건 내가 먹어 버렸고 돈이 되겠다 싶은 거랑 내가 먹었다가 위험해질 것 같은 건 따로 챙겨서 그걸 살 사람을 찾아냈지. 다른 건 쉽게 팔았는데 만년화리 내단은 너무 값이 비싸고 그걸 복용하는 방법이 위험해선지 주인을 찾는 데 애를 먹었어.”

    그는 일과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나른하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네 동생. 구음절맥이라지? 너에게 복수를 하려고 네 동생을 노린 건 아니야. 나한테는 만년화리 내단을 복용할 방법이 필요했을 뿐이고 그걸 위해서 극음지기를 가진 몸이 필요했던 건데 네 동생이 마침 그렇다고 해서 찾고 있었던 것뿐이야. 내가 너에게 복수를 할 이유는 없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판인데 말이다.”

    “네가 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꿈 깨는 게 좋다는 말이야.”

    “그래. 나도 한번 알아보고 싶군. 꿈만 꾼 것은 아니다.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해 왔지. 이제 얘기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지금부터는 네 검이 하는 말을 들어 보고 싶군.”

    남궁진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검을 들어 올렸다.

    언제 검을 빼낸 건지 알아차릴 틈도 없던, 믿기지 않는 출수 솜씨였다.

    아진은 자신이 남궁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자가 남궁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불가능한 작전을 가능하게 만들어 정파 무가를 봉문하게 한 사파 조직의 고수가 그였고, 귀신같은 책략으로 무림맹의 무력단 하나를 괴멸시킨 이가 그였으며, 믿기지 않는 보법과 쾌검으로 살수들을 죽여 제남에 있는 모든 살수 단체의 성공확률을 3할 아래로 내려놨다는 이가 그였다.

    현장에 남아 있는 자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면서도 꼭 한 사람의 생존자는 남겨두어 자신의 만행을 증언하게 했는데 그로 인해 불린 이름이 백의공자였다.

    살행을 하러 오는 자리에 무복 대신 하얀 비단 도포를 입고 나타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남궁진은 아진의 앞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자락이 바람을 일으키며 펄럭였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남궁진의 주위에서는 유독 돌풍이 일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검신이 아진의 목에 와서 닿았다.

    소리도 없이 신형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움직인 것은 남궁진만이 아니었다.

    남궁진은 자신의 검 끝에 닿는 것이 없자 기이한 기분에 몸을 뒤로 날렸다.

    “이렇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허공에 대고 뭘 하고 있느냐.”

    아진의 검날이 남궁진의 목에 닿았지만 채 목을 베고 들어가지는 못한 채 아진의 검 역시 목표를 잃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수도 없이 허공에 새겨졌다.

    모두가 실체였지만 이내 허상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은 서로를 노리며 몇 번이나 상대의 검에 닿았다가 도망쳤다.

    아진이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처음 그때뿐이었다.

    그 후에는 땀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이 자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처음에 그 생각을 하고 아진은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동안 자기와 마주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파악하기 위해 레이드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 자기가 경험했던 수많은 사냥 중 거기에 해당하는 유형이 꼭 있었다.

    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는 헌터를 하나 정도는 떠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취약했는지를 생각해냈고 그것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 자는 다르다.’

    다르기는 한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 불편한 이질감이 뭔지 퍼뜩 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답답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궁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목을 노리며 정신없이 보법을 펼치던 두 사람이 우연히 그 동작을 멈추고 마주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진은 깨달았다.

    오로지 부수고 싶다는 열망.

    자기가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전부 부수고 싶어서 날뛰는 존재.

    괴수.

    남궁진은 헌터가 아닌 괴수였고 자기 자신의 안위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로지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존재의 파멸을 꿈꾸며 싸우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죽으려면 너나 죽어.’

    아진도 그 감정이 이해가 됐다.

    만약 이곳에 와서 새로운 가족을 얻기 전이었다면 아진도 그런 감정으로 싸웠을지 몰랐다.

    무림 세계로 이동하겠냐는 상태 창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진은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안전을 원하는 본능적인 욕구마저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냥 다 무너져 버리면 좋겠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게 나뿐이라는 건 억울하다. 그러니까 다 같이 내일을 잃어버리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정작 레이드를 그만두지 못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괴수를 죽인 것을 보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세상을 뒤집을 용기나 그런 집념을 타오르게 할 의욕이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서 남궁진을 보자 그가 이해됐다.

    ‘그런 건가? 너를 닮은 헌터가 생각났어. 서도진이라는. 불쌍한 놈이 있었거든.’

    아진이 피식 웃었다.

    아진의 웃음은 남궁진의 눈에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남궁진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남궁진은 일단 격전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혼돈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궁진에게서 뿜어지는 살기는 남궁진 자신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꽤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순간의 판단 착오로 목숨이 오갈 수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그런 당혹감을 느낀다는 것은 남궁진을 상당히 유리하게 만들었다.

    ‘세상이 온통 피로 물들면 좋겠어? 어린애네? 그런데 어쩌면 좋지? 그 세상에 내가 끼어 있는 한 그렇게는 안 될 텐데. 그 세상에 내가 살고 있고 내 가족이 살고 있거든.’

    아진은 제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의 의미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것이, 한 번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엄청난 우월감임을 알아차렸다.

    누구에게도 질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을 가졌다는 가슴 벅찬 감격.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고마웠고 실제로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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