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69화
‘설마하니 오늘 내가 여기에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을 테고. 아…… 아까 요리가 부실하다면서 나가서 한참 있다 오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말이 많아지기는 했지? 안 해도 될 말까지 중언부언 늘어놓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석에서 더욱 말이 적어지곤 한다.
아랫사람들은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별별 이야기를 다 늘어놓지만 그 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주는 유독 말이 많았고 아진은 모든 게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눈엣가시였는데 알아서 호랑이 굴에 들어와 준 거네? 나를 찾아다니는 것도 번거로울 텐데 내가 자기 집 앞마당으로 들어온 이 기회를 잃고 싶지는 않았겠지? 산동성의 성주라면 산동성에서 활동하는 살수 집단도 많이 알 테고 어디가 일을 잘 하는지 어디에 특급 살수가 몇 명이 있는지도 알 테고.’
아진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성주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는 한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려고 할 정도였다.
‘이미 나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따라붙는 자가 있다고 겁먹을 아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소청도 있고 소청의 어머니도 있는데.
안 그래도 두 사람은 조만간 떨어져 살아야 할 텐데 다른 이들 때문에 이별의 시기를 앞당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가 북리세가로 가느라 가족들을 떠나야 했을 때 나이가 딱 지금의 소청만 했을 것이다.
‘남은 시간은 서로 평화롭게 지내게 해 줘야지.’
조금만 수를 쓰면 간단히 될 일이었다.
살수에게 살행을 의뢰했던 자가 의뢰를 철회하는 것처럼 아주 간단히 될 일.
“성주님은 아주 운이 좋은 겁니다. 동생의 절맥을 치료하려고 그동안 연구를 많이 해 와서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약재를 찾는 게 까다롭고 그 약재를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가 없어서 시간이 걸리기는 할 겁니다.”
“사, 산동성에도 약방은 많습니다. 소협. 실력 좋은 약초꾼도 많고 말입니다.”
“이런 일은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할 때는 제가 그동안 함께 일을 해 왔던 약초꾼에게 직접 새로 약재를 준비해 달라고 합니다. 이 경우에는 말린 것보다 생으로 먹는 것이 좋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성주의 눈이 빛났다.
아진은 성주가 곧 밖으로 나갈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살행 의뢰를 취소해야 할 테니 마음이 급하기도 할 터였다.
“내 정신 좀 보십시오. 소협.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 대접이 너무 형편없질 않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귀한 분을 이리 대접한다면 두고두고 한이 남겠습니다.”
아진은 속으로 비웃으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 *
성주가 한참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던 그 시각, 린린은 세 번째로 물을 끓였다.
“이때부터는 아주 약한 불로 끓여야 해요.”
“정말 까다롭네요. 아가씨가 고생이 정말 많겠습니다.”
사람들은 약 하나를 달이는데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이 정말 길다는 생각에 말을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린린과 좋은 시간을 나눌 수 있게 되어 흐뭇해했다.
린린은 얘기를 하는 동안 성주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친절에 감탄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서 북리의천과의 친분을 과시하기도 하고 그들로서는 듣기 힘든 북리의천의 비화도 말해 주었다.
그들은 북리의천의 제자 동생에게서 그런 얘기를 직접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만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북리세가에 들르게 될 텐데 그때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꼭 말씀드려야겠어요. 아아. 북리세가에서 새로 표국을 열게 될지도 모른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걸 산동성에 내도 좋을 것 같기는 하네요.”
그 말이 나왔을 때는 모두 반색을 하며 린린을 향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해도 일단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나오게 마련이었다.
한 번 나온 말은 수습하기가 어려운 법이고 듣지 못한 거로 해 달라거나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해야 한다는 말은 정말 순진한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해서 상대방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거로 하자는 방법을 택하게 되곤 하는데 그 결과 린린은 그 자리에서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손님은 정말 신경이 쓰이네요. 저희도 일찍 돌아가야 하는데 성주님이 놔주시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저희도 저희지만 그 손님은 마냥 그렇게 기다리셔도 되는 건지. 혹시 미리 말씀해 주셨나요? 기다리지 마시라고요. 괜히 저희 때문에 이렇게 돼서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아가씨가 순수하고 착해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주님께서 이미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분은 어디에 계세요? 제가 가서 직접 사과를 해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저도 그런 일을 많이 당해 봤거든요. 오라버니가 워낙 대단한 분의 제자다 보니 오라버니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면 다들 알아서 잘 대해 주시지만 오라버니가 누군지 모르면 사람들의 차별이 정말 심해요. 그럴 때는 기분이 나쁘죠.”
린린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눈썹을 팔자로 휜 채 말하자 사람들이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는 정말 순수하고 마음이 고우시군요. 그렇지만 성주님이 워낙 당부하셔서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안타까워요.”
실망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의문의 남자를 성주가 어느 정도나 차단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뿐이었기에 그로써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은 셈이었다.
린린은 마침내 약을 풀어서 섞었고 사람들은 그 긴긴 여정이 비로소 끝나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보기에 린린은 유쾌하고 착한 아가씨여서 이런 병을 앓으며 고생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으으으으…….”
린린은 약이 아주 써서 괴롭다는 듯 얼굴을 잔뜩 구겨주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후 아진에게 돌아갔다.
가는 동안 린린의 시선은 미지의 남자가 있다는 전각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린린이 돌아갔을 때 성주는 아직 자리에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재미있는 걸 알아냈어.”
“나도.”
린린과 아진은 거의 동시에 말을 했고 아진이 먼저 자기가 알아낸 것을 빠르게 말을 해 주었다.
“신기하네?”
린린이 말하더니 자신이 모아온 정보를 들려주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걱정할 건 없는 거네? 섣불리 오라버니를 공격할 수는 없을 테니까?”
린린이 말했지만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주에게는 공격을 멈출 이유가 생겼지만 가주의 사생아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괜한 말로 린린을 걱정하게 하느니, 그건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자기가 처리하자고 마음먹으며 아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는 모처로 자리를 옮겨 극진한 대접을 이어나갔다.
아진은 이제 지겨워서 그냥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도 성주는 극진히 대접하고 싶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사실 자리를 옮긴 후부터 성주는 진심이었다.
아진이 자신도 모르는 문제를 짚어 주어서 큰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하고 구명줄을 잡듯 아진에게 의지를 했던 것이다.
성주는 그즈음 남궁진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남궁진은 그렇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배에 타기는 했지만 그는 성주를 믿지 않았고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하는 문제를 자기가 해결해 주지 않으면 언제 갑자기 돌변해서 돈을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금 서른 관.
그것은 고수를 영입하고 무인들을 모아들여서 무가를 세울 수도 있는 돈이었다.
이름깨나 날리는 초고수도 몇 명 초빙한다면 돈이 더 들겠지만 그래도 만년화리의 내단은 막다른 골목에서 그에게 희망을 주었다.
성주는 자기가 일을 망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하는 대신 남궁진에게 책임을 물어 돈을 내놓으라고 할 위인이었다.
기껏 이룬 꿈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었기에 남궁진은 오늘 밤 서이린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이런 곳에도 장원을 가지고 있었군. 도대체 얼마나 해 처먹은 건지 감도 안 잡히네.’
표홀한 경공으로 마차를 따라온 남궁진이 혼자서 생각하며 별장 지붕으로 올라가 몸을 숨겼을 때 아진은 이미 그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다.
린린도 아진의 표정을 보고 그 사실을 깨달은 후였다.
아진은 지붕 위에 몸을 숨긴 자가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의 고수라는 사실에 잠시 놀랐다.
‘그렇군. 몰락한 남궁세가에 가자마자 영약을 먼저 먹어 버린 모양이네.’
아진의 눈에는 그 모습이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뒷전으로 하고 가문의 보고를 찾아내 그 안에 있던 영약을 챙기는 그의 모습이.
‘저자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겠군.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슬퍼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아진의 시선이 잠시 린린에게 닿았다.
‘뭐. 괜찮지. 나도 슬프지 않을 거니까. 절대로 이 녀석이 죽어 버리게 놔두지 않을 거고.’
아진이 린린의 등을 툭툭 두드리자 린린은 아진의 두서없는 생각의 흐름이 어디에서 끝을 맺었는지 알 것 같아 속으로 웃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소협.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것입니다. 소협의 명성은 전에도 들었지만 명불허전이군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소름이 끼쳐서 혼이 났습니다. 사실 지금껏 제가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늦게 시작한 무공을 이 정도까지 익히셨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성주는 아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는 지금의 성취가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마치 네 주제에 그 정도 했으면 용한 거라는 분위기를 느끼고 확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견식에 욕심이 났던 것이다.
“검을 잡지 않은 지 오래됐습니다. 삶이 순탄치 않아서 수련도 거의 하지 못했고 말입니다.”
린린은 아진이 아무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술술 하는 걸 볼 때마다 기가 막혔다.
그런데 워낙 자연스러워서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그냥 믿어 버리곤 했다.
연못과 나무로 고즈넉한 정취가 풍기는 정자에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여러 개의 화톳불이 있어서 조명과 온도가 모두 적절히 유지되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요리가 있으시면 내일 아침에는 그것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소협은 저에게 은공이십니다. 소협이 아니었으면 어찌 제가 그런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혈맥이 막혔다니 누가 그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은 몸에 증상이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 아닙니까. 오음절맥이나 칠음절맥, 구음절맥 같은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말이지요.”
어느덧 성주는 자신을 저라고 낮추기까지 했다.
아진이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젊었는데도 그랬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주는 말이 많아졌고 아진과 린린은 그를 막기가 힘들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기왕 그렇게 된 것 성주를 통해 이야기나 더 많이 알아내자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