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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68화 (68/470)
  • 제68화

    68화

    “오라버니를 따라서 그동안 여러 곳에 다녔지만 이런 곳에는 처음 와 봐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저는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현청만 해도 사람들이 너무 무섭게 굴어서요.”

    린린이 신기하다는 듯이 떠들어 대자 다른 사람들도 말을 받아 주었다.

    성주님이 자상하시고 선정을 베푸신다는 둥 어떻다는 둥.

    “제 오라버니는 스승님과 떨어져 있지만 편지로 온갖 얘기를 다 하거든요. 오라버니의 스승님은 오라버니를 워낙 아껴서 오라버니가 칭찬한 사람은 전부 다 기억을 해 두시고 어떻게든 갚아 주시죠.”

    린린은 경솔한 어린아이가 우쭐한 채 자랑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것이 평소 린린의 성격과는 반대되는 태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린린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게 대단히 좋은 기회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들이 성주에 대해 좋게 얘기를 해서 린린이 감동한다면 북리의천의 귀에 성주에 대한 얘기가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린린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애썼다.

    린린이 호기심을 갖고 물어 보는 것에 대답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사적인 일로 성주님을 찾아와도 성주님이 원래 이렇게 만나 주시는 거예요? 저희는 정식 절차를 밟고 온 게 아니잖아요. 먼저 현령님을 만나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현청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엄청 까다로웠거든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친절한 답변이 경쟁적으로 나왔다.

    “아가씨의 오라버니가 검신 대협의 제자분이 아니었다면 성주님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주님을 뵙기 위해서는 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요. 며칠 전에 연락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그러고도 방문객이 많겠지요? 성주님을 뵙고 부탁을 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을 테니까요.”

    린린은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툭툭 던졌고 그녀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물을 끓이고 그것이 식는 동안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꺼내 놓았다.

    린린은 그들이 얘기해 주는 사소한 것에도 놀라고 신기해해서, 이야기를 한 사람은 흐뭇해하며 얘기를 하게 되었다.

    린린의 반응이 좋다 보니 더 신기한 것을 얘기해 주어서 더 즐겁게 해 주자는 의욕이 넘쳐났고 어느덧 그들은 죽립을 쓴 문사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분이 오시면 성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고 늘 독대를 하시지요. 차조차도 들이지 못하게 하시고 엄격히 거리를 유지하게 하십니다.”

    누군가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린린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지루한 이야기를 참고 들은 것이 수포가 되지는 않았다.

    “아…… 그러면 저희 때문에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야 했겠군요. 멀리서 오신 손님일지도 모르는데. 저희가 예고 없이 오는 바람에 폐를 끼친 것 같아요.”

    “아닙니다. 아가씨. 그분은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 식은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두 번째 식힐 때는 더 차게 식혀야 해요. 온도를 맞추는 게 까다로워서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린답니다.”

    “그렇군요.”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 자체가 희소한데다 그 치료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보니 모두 린린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린린은 시간을 넉넉히 확보해 놓은 채 그들에게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 * *

    “누이가 아침부터 속이 불편하다고 하더니 계속 그런 모양입니다. 누이는 신경 쓰지 마시고 앉으시지요. 어차피 길을 잃는다고 해 봤자 경내를 헤매는 것일 뿐일 텐데 누이가 보이면 다른 분들이 여기로 데려다주겠지요.”

    아진이 말하자 성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방심한 채 혼자 돌아다닌다면 오히려 더 기회가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진은 성주가 무공을 익힌 자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성주 자신은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그동안은 다른 사람들을 잘 속여왔지만 상대는 아진이었다.

    아진은 기감을 펼쳐 성주를 속속들이 파악했다.

    성주가 어떤 심법을 익혔는지 성주의 내공이 어떤 종류인지도 알아내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아진이 의원이라는 이유가 컸다.

    상대의 의심을 받지 않고 맥을 짚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성주님. 제가 스승님의 제자이기는 하나 동시에 의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주님을 뵈니 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혹시 요사이 복부에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평소에 활동할 때는 느껴지지 않다가 잠을 자려고 누우면 심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눕는 것을 반복하지 않으십니까?”

    아진은 눈 밑에 어두운 그늘을 달고 있는 성주의 얼굴을 보고 잠을 잘 자지 못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대충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용하다고 소문난 의원이 그렇게 말을 하면 없던 증상도 생각나기 마련이었다.

    성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면증이 있기는 했어도 복부의 통증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자기가 둔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세한 것을 알아보려면 맥을 짚어 봐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성주님?”

    그렇지 않아도 아진이 말한 것과 자신이 느낀 것에 차이가 나는 것이 이상하고 불안해서 성주는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아진은 맥을 짚는 것처럼 하며 자신의 진기를 성주의 몸 안에 서서히 밀어 넣었다.

    아진이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성주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아진이 자신의 내공을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진의 진기가 워낙 흔적없이 성주의 몸 안을 훑고 다녀서였다.

    ‘흠. 재미있는 일이다.’

    아진은 진기를 밀어 넣어 혈맥을 살폈다.

    그리고 신기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북리의천을 스승으로 두고 독고소영을 사고로 두지 않았으면 알기 어려웠을 일이었지만 그는 두 사람을 통해서 두 가문의 독문무공을 전수 받은 상태였다.

    비단 두 가문의 절기만을 배운 것이 아니고 북리의천이 친분으로 얻어낸 소림사의 무공뿐 아니라 이런저런 다른 절기도 여러 개 알고 있었다.

    아진은 구결을 이해하고 거기에 담긴 무리(武理)를 깨닫는 것도 좋아했지만 내공을 운용하는 방식에 차이가 나고 그 때문에 각 문파에 소속된 무인들이 혈맥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신기해했었다.

    아직 그것을 실제로 시도해본 적은 없었지만 아진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무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혈맥을 살펴 그가 어느 문파의 소속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왔었다.

    물론 죽은 무인이 익힌 무공을 아진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아진이 느끼는 흥미는 클 수밖에 없었다.

    산동성의 성주 혈맥에 남궁세가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남궁세가의 일반 제자나 방계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주와 차기 가주만 익힐 수 있는 것을 익힌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다른 심법으로 먼저 단전을 만들고 축기를 했다가 나중에 남궁세가의 심법을 배운 것인데. 이런 걸 누가 가르쳐 줬다는 거지?’

    문제는 심법만이 아니었다.

    아직 숙련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궁세가의 독문무공을 익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런 건 비밀이 철저하게 지켜질 텐데?’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구결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고 그 과정에서 실전이 되어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실전이 되어 후대에 전해지지 못하면 그것도 큰 문제지만 다른 이에게 유출되는 것보다는 비밀 유지에 더 중점을 두느라고 그렇게 하는 문파가 여럿 있었다.

    남궁세가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일단 살아남은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다.

    세가가 혈겁을 당할 때 세가에 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고 임무 수행을 위해 다른 곳에 나가 있던 자 중 숨어 버린 사람이나 몇몇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가주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던 자가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가주가 세상에 밝히지 않은 사생아. 그에게 가주가 직접 전수한 것이다.

    태상가주가 다른 이에게 전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 보았지만 아진은 남궁세가의 태상가주를 알고 있었고 그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확신할 수가 있었다.

    ‘사생아라. 멸문한 세가의 사생아가 산동성의 성주에게 접근했고 성주가 그자를 받아주었다……. 말은 되네.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성주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면 이 정도 것은 내밀어야 했을 테니까.’

    뇌검십식과 섬전십삼검뢰. 거기에 제왕검법까지.

    ‘아주 싹싹 긁어다 바쳤구나. 단순히 인맥만 쌓자고 한 거면 이렇게까지 다 갖다 바칠 건 아니었을 테고. 이자에게 뭘 얻은 거지?’

    아진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성주는 없던 병이 생겨날 것 같았다.

    아진이 맥을 짚은 채 말이 없이 미간만 찌푸리고 있으니 성주의 입장에서는 꼭 자기가 큰 병에 걸려서 차마 말을 하지는 못한 채 고심을 거듭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소…… 소협…… 혹시 많이 안 좋습니까?”

    성주가 물었지만 아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답은 영약이겠군. 영약으로 늘어난 내공이야. 양기가 강한 이유는 그런 쪽의 영약을 먹어서 그런 거고. 가주의 사생아가 영약을 중개했으려나?’

    관에 있는 자 중에 무림에 경외심을 가진 이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돈과 권력이라면 부족하지 않게 가진 자들에게 접근해 무공 한 자락을 알려주고 무재라고 잔뜩 띄워준 후에, 너무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내공이 받쳐 주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라 말하고 영약을 팔아먹는다면?’

    생각해 보니 그것처럼 좋은 사업을 찾기도 어려울 듯했다.

    남궁세가주의 사생아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자신만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남궁세가의 독문무공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얼마나 유혹적인 미끼가 됐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재미있어.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자도 그걸 익혔겠지? 사생아건 뭐건 남궁세가 사람이라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겠네?’

    “소협…… 그렇게 심각합니까?”

    성주의 목소리는 이제 아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진은 이대로 더 잡고 있다가는 성주가 기절해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놓았다.

    “이건 병이 아니라 잘못된 축기로 몸 안에서 기운이 충돌하고 혈맥이 손상돼서 생긴 증상인 것 같습니다. 성주님의 혈맥 중 중요한 혈맥 두 개가 거의 막혀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반년이 지나기 전에 완전히 막힐 것이고 성주님은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아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까지 제 앞에서 잘도 웃고 있었지만 남궁세가와 그런 식으로 연을 맺어오고 지금까지 도움을 주고받아왔다면 그동안 서도진이라는 이름이 그들 사이에서 좋은 않게 거론되었을 거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주의 사생아가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에 따라 아진을 죽이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일이 어느 정도나 진행됐을지 아진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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