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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67화 (67/470)
  • 제67화

    67화

    ‘그래. 일단 내 손에 들어왔다면 그건 내 거라는 말이야. 그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먹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위험과 비용을 감수했다.

    만약 멈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 말하며 남궁진에게 만년화리의 내단을 돌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사라진 남궁세가의 궁극의 검술.

    그것이 자신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을 떠올렸다.

    이 모든 일이 자기를 위해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때맞추어 남궁세가가 혈겁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검술을 펼친다는 이유만으로 남궁의 무인들에게 추살당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약을 복용하기만 하면 그동안 남궁세가의 가주들도 쉽게 이르지 못했다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다 왔다. 거의 다 이룬 것이야. 여기에 와서 멈출 수는 없어.’

    남들보다 더 많이 갔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큰 유혹에 노출됐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포기를 할 수 있어도 그는 이미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 * *

    아진과 린린은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북리의천의 제자라는 말은 단번에 효력을 발휘했다.

    북리의천은 서도진에게 어렵고 귀찮은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자신의 이름을 대라고 말을 해 두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정진할 거라고 했는데 서도진은 스승이 그 말을 이루었음을 알고 있었다.

    검신 북리의천.

    서도진은 그 이름을 떠올리면서 자랑스러워하며 웃음을 지었다.

    이내 성주가 나왔다.

    성주는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나온 것처럼 서둘렀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산본의가의 서도진이라 합니다. 이 아이는 제 누이인 서이린입니다. 이렇게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진이 예의를 차려 인사를 올리자 성주의 얼굴에 훈훈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서이린을 힐끔거렸다.

    구음절맥에 걸린 여자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극음의 기운을 가진 사람.

    이제 곧 죽을 운명.

    그랬다.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은 열여덟이 되지 못해 죽는다고 했고 그가 알기로 서이린은 이제 열다섯일 터였다.

    어차피 남은 인생이 길지도 않았다.

    고작 3년.

    서이린에게서 목숨을 거둔다는 것은 고작 3년을 뺏는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제 목숨에 대해서는 절대 그런 식의 계산법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남의 목숨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서 안으로 듭시다. 아. 여기에서 이럴 게 아니오. 산동 최고의 기루로 안내를 하겠소. 산동까지 왔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가야 하오.”

    성주는 남궁진이 있는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달갑지 않아 말한 것이지만 아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이가 아직 어리고 지병이 있어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저도 누이의 병간호를 해야 해서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성주님이 이해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러면 내 별장으로 가는 것은 어떻겠소. 가끔 쉬고 싶을 때 이용하는 곳이 있소. 여기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반 시진 정도 마차를 타고 가면 되니 그렇게 합시다.”

    “드릴 말씀이 길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주님.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씀을 드려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성주는 자기가 처음부터 너무 그들을 몰아세운 건가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우선은 객청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군요. 부디 좋은 일이어야 할 텐데 말이오. 그런데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좋은 일로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지.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오.”

    그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관에 오래 몸을 담고 정치에 능숙하다 보니 표정 관리가 능숙했다.

    “사실은 저희가 모종의 이유로 함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폭정을 하는 관리들을 보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오. 어서 말을 해 보시오.”

    성주는 짧은 시간에 아진의 용건을 간파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혈기왕성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젊은 남자가 불의를 보고 피가 끓어 이곳으로 달려온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자신은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성주는 얼굴 가득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아진과 함께 분노하는 것처럼 얼굴을 꾸몄다.

    아진은 현청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현령의 딸이 사고를 냈고 그것 때문에 다친 것인데도 다른 아이가 그 일에 휘말려 현령의 딸을 다치게 한 것으로 지목되었고, 그 일에 책임을 물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하게 매질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차분하게 아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그 권위를 이용해 일을 바로잡아보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에 이런 불의가 있을 수 있냐며 침을 튀어 가면서 역설하기 일쑤였는데 이 남자는 그리 감정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단지 현령을 관리 감독하는 것은 성주의 일인데 성주가 작은 현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다 알 수는 없으니 자기가 알려 주는 거라는 정도의 강도였다.

    성주는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내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진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해당 현령을 잡아 들이고 현령의 딸도 이송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명백백하게 듣고 행여 잘못이 있다면 엄중히 문책할 것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누구도 내 성 내에서 알량한 권세를 가지고 백성을 핍박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명을 받은 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자리를 떠났고 그곳에는 다시 처음의 몇 사람만이 남게 됐다.

    아진은 성주가 린린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는데 그 관심이라는 것이 그동안 다른 이들에게서 봐 오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린린도 마찬가지였다.

    린린은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태도와 눈빛에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자의 경우에는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설마하니 자신에게 극양의 영약을 먹여 죽게 하고 자신의 몸을 태워서 먹으려 한다는 상상은 아무리 머리가 좋다는 린린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주는 두 사람을 극진하게 대접했고 온갖 좋은 음식과 귀한 차를 가져왔다.

    술은 마시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말을 해 두었지만 술도 빠지지 않았다.

    성주는 술을 마시지 못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주면 마셔야지 어쩌겠냐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린린에게는 술을 권하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린린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있다가 만년화리의 내단을 잘 복용하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다 보니 아진과 린린은 성주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검신 대협의 제자에게 대접을 할 기회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내가 운이 좋아 이 자리에서 검신 대협의 제자분과 대작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려. 그러니 한잔합시다.”

    그동안 아진이 완곡하게 거절한 것은 들은 바 없다는 듯이 말을 하는 성주를 보며 아진이 웃었다.

    “성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환대에 대해서는 저도 스승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스승님께서 아마 북리세가와 무림맹에도 말씀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이라고 하나 꼭 대립하는 관계로만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지요.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치안과 질서를 지키는 일에도 많은 도움을 받으시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주는 애송이인 줄만 알았던 아진이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강권하면 아진이 별수 없이 술을 마실 거라고 생각했던 성주도 나중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많이 마시게 될 것 같소.”

    성주는 말을 하고 술상을 바라보더니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안 되지. 대 북리의천 대협의 제자분께서 오셨는데 아무래도 이래서는 대접이 너무 소홀하오. 이래서는 내 체면이 서질 않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러면서 성주는 아진이 말릴 새도 없이 휘적휘적 밖으로 걸어나갔다.

    품새로 봐서는 사람들을 다그쳐서 술상을 건하게 차려오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밖으로 나간 성주는 은밀히 그림자들을 불러모았다.

    성주가 비밀리에 부리는 자들이었다.

    주위에서 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처럼 몇 사람이 성주에게 말없이 다가갔다.

    “영약의 주인이 왔다.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같이 있는 자는 검신의 제자다. 너희만으로는 어려울 수도 있으니 인근에서 활동하는 살수와 쓸만한 낭인들도 불러들여라. 성공하면 은자 이천 냥을 주겠다고 하고 특급 살수를 끼어 일급 살수 셋 이상을 투입하라고 해라.”

    은자 이천 냥이면 살수 단체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액수였다.

    성주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수긍했다.

    “관내의 살수단 모두에 연락하는 것이 좋을지요.”

    누군가 말하자 성주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가장 성공률이 높은 곳 중 세 곳으로 정해라. 목적을 이룬 곳에만 돈을 지불할 거라고 해. 여자는 사로잡고 남자는 죽인다. 여자는 먼저 죽여서는 안 된다. 죽기 전에 그 몸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이다. 착오가 없도록 정확히 알리거라.”

    그림자들은 성주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이 조용히 사라졌다.

    아진과 린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성주는 남궁진이 있는 곳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그냥 돌아가면 좋으련만.’

    혀를 차던 성주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저자가 필요하겠군.’

    만약 일이 성사되어 린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만년화리의 내단을 린린에게 복용시켜야 할 텐데 그는 그런 것을 할 줄 몰랐다.

    어쩌면 남궁진도 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역천마의와 같은…….

    성주가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린린이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린린은 길을 잃은 듯 경내를 방황하고 있었다.

    “저분은 검신 대협의 제자분과 같이 오신 분이 아닌가.”

    린린이 성주의 귀한 손님임을 알고 있던 사람들 몇이 급히 다가와 린린을 안내했다.

    “길을 잃으신 듯한데 제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린린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제가 지병이 있어서 시간에 맞춰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약의 복용 방법이 까다로워서 끓였다 식히기를 여러 번 반복한 물에 마지막으로 약을 넣고 한 번 더 우려야 하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 줄 몰라서 준비도 없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맞춰서 먹지 않으면 발작을 할 수도 있는 일이라…….”

    그러자 모두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러면 우선 소주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우선 그곳으로 가서 설명을 더 해 주시지요.”

    “감사합니다.”

    린린은 그들을 따라가며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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