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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65화 (65/470)
  • 제65화

    65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 현령이 있는 곳을 물어봐야 쓸데없는 희생이나 늘어날 뿐일 터라 아진은 현령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갔다.

    린린이 없는 편이 조금 더 수월했겠지만 린린은 그런 재미난 장면을 볼 기회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진도 자기가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되는 일이라 기꺼이 린린을 데리고 갔다.

    외부인이 그곳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나타난 것에 놀란 사람들이 뒤늦게 덤벼들려 했지만 아진은 침통에서 침을 꺼내 그들의 혈을 점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령은 밖에서 소란이 난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진과 린린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막 일어서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있었다.

    “들을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진이 너무나 편안하게 말하자 현령은 아진을 쏘아보았다.

    “네놈은 누군데 이 자리에서 이런 짓을 벌인다는 말이냐. 나는 너를 알지 못하거늘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온 거냐는 말이다!”

    현령은 기세 좋게 관군들을 불러들이는 대신 의미 없는 말을 쏟아냈다.

    밖에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령 어른의 따님이 말에서 떨어져 사고를 당했다던데 그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들으려고 왔습니다.”

    “내가 왜 네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냐!”

    “그 일로 인해서 무고한 사람이 희생을 치렀으니 설명을 해야 할 것이오.”

    현령은 아진이 뭘 얼마나 알고 온 건가 하면서 속으로 주저했다.

    아진의 범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령 어른이 직접 말하지 않겠다면 직접 듣겠습니다.”

    “내 아이에게 네놈이 감히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아진은 현령에게 다가가 침을 꺼내 그의 혈을 점했다.

    “나도 내가 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린린은 아진이 내원으로 갈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먼저 움직였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줘야 일이 빨리 끝나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현청의 내원은 경계가 삼엄했다.

    그러나 아진이 그곳을 지키는 자들에게 의원이라 말하고 현령이 자기를 보냈다고 하자 관군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아진을 통과시켜 주었다.

    설마하니 그곳까지 무력을 사용해 들어온 이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비단옷을 입은 열 살 안팎의 소녀가 혼자서 후원을 걷고 있다가 아진과 린린을 바라보았다.

    팔과 다리를 다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희는 누군데 여기까지 들어왔지?”

    저에게는 당연한 것이라고 해도 초면에 하대를 당하는 것이 아진에게는 기분이 나빴다.

    대한민국에서 근 사십 년을 살았던 현대인이었기에 이놈의 신분제에는 아무리 적응을 하려고 해도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아진은 버릇없는 어린애에게는 영 내성이 없었다.

    “어쩌다가 말에서 떨어진 건지 들으려고 왔다. 네가 이제 와서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테고 네가 한 말로 인해서 생긴 일은 네 아버지가 전부 책임을 지게 될 거다. 아버지가 조그만 현의 우두머리라고 그동안 눈에 보이는 것 없이 엄청나게 건방을 떤 것 같은데 너 정도 나이가 되면 말과 행동에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나이지.”

    “……!”

    처음에는 안하무인의 태도더니 아진이 조금도 눈치를 보지 않고 말을 하자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사라졌다.

    건방지게 말을 해도 알아서 모시던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 같았다.

    “누…… 누구냐. 너희는……!”

    “아직도 반말이네.”

    린린이 너도 참 구제 불능이라는 표정을 짓고 아이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말했다.

    “하긴. 반말을 하면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인상 안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위협을 하면 보통 머리가 굴러가는 애들은 눈치라도 보는 게 정상이 아닌가 해서.”

    아이는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아진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못 한다.

    거짓말을 못 하고 진실만을 얘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능숙하게 남을 속여가면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거짓말을 하면 신체의 여러 부위가 동시에 반응을 보이는데 눈앞의 아이는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머리를 굴리려 하고 있었다.

    머리도 나쁜 애가 머리를 굴리는 것처럼 안타까운 광경도 보기가 힘들었다.

    “말에서 어떻게 떨어졌냐고 물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아. 그리고 네가 버티고 있으면 너를 도우러 사람들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몇 사람은 죽고 몇 사람은 점혈을 당했거든. 아직 아무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아직 안 당했다는 것뿐이야.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들 운명이 정해지겠지.”

    그제야 아이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고 긴장이 된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꼬며 잡아당겼다.

    “그…… 그 애가…… 그 천하고 더러운 것이, 그 냄새나고 더러운 게 내 말을 만지려고 했어요. 그러는 바람에 내 말이 날뛰었고 그래서 내가 떨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다 그 애 잘못이에요. 원래는 그 애가 맞았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 애가 너무 어리다고 그 애 엄마가 대신 맞은 거예요. 애를 잘못 가르쳤으니까요.”

    “그 애가 네 말의 어느 부위를 어떤 손으로 만지려고 했는데?”

    “그, 그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꾸며낸 정보를 상대방이 믿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정보를 너무 많이 내보이곤 한다.

    자기가 생각해둔 단어나 문구를 자주 사용하는 것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기가 미리 생각해 두지 않은 질문을 받게 되면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게다가 거짓말을 하는 아이가 능수능란하게 상황에 대처할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하면.

    “그건…… 오르, 오른 손으로 눈을 만졌어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만지려고 했다는 것도 아니고 만졌다고 당당히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했다고 해야 아이의 죄가 더 크게 느껴질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냥 내질러버린 듯했다.

    말이 아닌 다른 짐승도 타인이 제 눈을 만지는데 가만히 대 주지는 않는다.

    더 재미있는 것은 현령의 딸이 아진의 질문에 그렇게 순순히 대답할 의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아이가 정말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소청이 말을 자극해서 사고가 나게 한 게 맞았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든 대답을 하려고 하는 대신 아진에게 화를 내는 게 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랬어? 그 애 엄청 조그맣지 않았나? 그 애 손이 말 눈에 닿았다고? 말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해도 나는 안 닿았을 것 같은데. 모르는 사람이 눈을 만지려고 하는데도 대주고 있을 만큼 순한 말도 아니라고 들었고.”

    “그, 그래서 말이 날뛴 거예요!”

    “그 말을 믿고 네 아버지는 그 애의 어머니에게 매질을 한 거네? 매질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대로 놔뒀으면 죽었을 것 같던데. 죽기를 노리고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 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네가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건지 알 테니까.”

    “…….”

    아진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성주님을 보러 갈 건데 그건 너와 네 아버지를 위해서야. 그나마 파직을 당하는 게 네 아버지에게는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 될 거다. 파직을 당하면 그동안 도와주던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릴 테고 그때는 저절로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되겠지만.”

    아이의 얼굴이 조금씩 변해 갔다.

    서서히 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된 것 같았다.

    “그때는 네 아버지와 연관된 게 새나가지 않게 하려고 자객을 보내는 사람들도 생길 거야. 사람들은 네 아버지와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성주님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을 거거든. 네 아버지가 믿었던 사람들도 그러겠지.”

    “왜…… 왜요? 뭐라고 할 건데요? 나는 사실을 말했어요. 다친 건 난데 왜 그래요?”

    아이는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질러댔다.

    “창피했나? 말 위에 앉아 있으니까 애를 괴롭히고 싶어졌어? 그래서 겁을 주려고 했는데 말이 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떨어진 거야?”

    “아니라고요!”

    현령의 딸이 소리치자 아진이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찰과상과 열상이 있고 어깨 탈골에 오른팔과 골반에 골절이 있군. 내가 의원이라고 말했지? 이런 상처는 네가 말한 상황에서 생기는 상처가 아니야.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낙마 환자를 봐서 나는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진의 거짓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설마 그게 거짓말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를 속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너와 네 아버지가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나는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

    아이는 겁을 먹은 와중에도 금방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말에서 떨어질 때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뛰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도 다리를 조금 절뚝거렸는데 저 모습을 봤으니 눈이 뒤집혔겠구나 하고 현령의 마음이 이해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진과 린린은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가다 내원을 지키던 이들에게 가로막혔다.

    그때부터 아진은 불필요한 공격을 단행하는 대신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의 혈을 점해 그들을 막는 데만 중점을 두었다.

    현령의 딸은 제 아버지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제 아버지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나무토막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언제나 강했던 아버지가 산 송장 같은 모습을 한 것을 봤으면 이제 뉘우칠 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소청이 그런 식의 사과라도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억울하게 당한 기억은 평생 따라다니며 사람을 안에서부터 좀먹어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령의 딸은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저어댔다.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냄새나는 게 거기에 서 있었다는 말이야! 왜 내 말이 멈춰야 해? 그 거지 같은 게 꺼지면 되는 건데 왜 내 말이 멈춰야 해? 그래서 달려간 것뿐인데! 그런데 말이 갑자기 두 발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떨어진 것뿐인데 왜 내가 사과를 해? 놀란 건 나랑 내 말이라는 말이야! 나는 아무 잘못 없어!”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오냐오냐하면서 키운 탓인지 아이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아진은 현령을 향해 침을 날려 점혈한 것을 풀어 주었다.

    현령은 아진이 자기에게 한 모든 것에 놀란 상태였고 아진에게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당신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할 생각이 있는지 묻겠소.”

    그러자 현령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주춤거리다 말했다.

    “나, 나는…… 나는 내 딸이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는 것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 듯했다.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청은 지금쯤 아진이 시킨 대로 어머니와 함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해 있을 터였다.

    여기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그들이 불안해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진은 곧바로 일을 해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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