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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64화 (64/470)
  • 제64화

    64화

    린린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미 안 채로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 것 같아서였다.

    린린은 의미도 알지 못한 채 구결을 외웠다.

    “글자만 외우지 말고 거기에 써 있는 걸 그림처럼 외워야 해. 글자 크기랑 글자 사이의 간격까지. 지금은 거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거기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을 수 있으니까.”

    “응? 꼭 그래야 하는 거야?”

    린린은 한쪽으로 밀어 두었던 것을 다시 가져다가 그때부터는 좀 더 꼼꼼하게 머릿속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다 외웠으면 소청의 어머니께 갖다 드려. 태우시라고 하고.”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다 외웠어?”

    “아니.”

    “그러면…….”

    “소청에게는 네가 알려 줘. 두고두고.”

    “오라버니.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어서 가져다드려. 이런 일은 꾸물대는 게 아니야.”

    린린은 별수 없다는 듯 소청의 어머니에게 앞장을 가져다주었다.

    “다 보신 모양이군요.”

    그녀는 화톳불에 낱장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혹여라도 타지 않고 남는 게 생길까 봐 겁이 나는 듯 한 장 한 장이 완전히 타는 것을 보고 재까지 잘게 부쉈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그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불안했을지 그 심경이 상상이 됐다.

    린린은 아진의 곁으로 돌아가서 그사이에 다시 쌓인 종이를 보며 그 내용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 작업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한 장까지 재로 변하는 것을 봤을 때는 차라리 후련했다.

    ‘뭐. 어쩔 거야? 나도 충분히 경고했어.’

    린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래 버리면 편하게 죽지도 못하겠네.’

    한숨이 나왔지만 그 뒤에 따라 나온 것은 웃음이었다.

    그렇게나 간절히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 * *

    아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청을 북리세가에 데려다주고 자기는 린린의 병을 고칠 방법을 찾아다니려고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급하게 마음을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공만 해도 그랬다.

    마공서를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지난밤에 아진은 자신의 한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이제까지의 수행이 방에서 그 안을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과 같다면, 마공서를 보면서 자신이 방 밖을 잠시 내다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 이런 게 기연인 건가?’

    그렇게 간절히 답을 갈구했으면서도 매번 벽에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는데 마공서를 본 이후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시야 자체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곧바로 해답을 찾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겼다.

    린린도 아진의 표정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라버니. 이제 북리세가에 가?”

    린린이 묻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분간은 여기에서 머물자. 그러면서 정리를 할 것도 있고 내 제자가 되겠다는 녀석의 복수도 해야 할 것 같아. 모르는 사이라면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사이도 아닌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잖아?”

    아진의 말을 듣고도 린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잠시 알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데?”

    “현령을 만나봐야지. 소청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소청과 소청의 어머니가 괜한 고초를 당했잖아. 그런 자를 그냥 놔둬야 한다고 생각해?”

    “아아. 나도 좋아. 나도 도울게.”

    “그래.”

    린린은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소청과 그의 어머니가 알게 되면 걱정을 하며 말릴 것 같아서 두 사람은 아주 조용히 움직였다.

    그냥 마을을 좀 둘러보려고 한다면서 얌전히 빠져나갔던 것이다.

    소청은 자기가 안내를 하겠다면서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아진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너는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소청아.”

    * * *

    두 사람이 현청으로 향했을 때 그 걸음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행색도 초라하지 않고 얼굴에서 귀티가 흐르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있는 집 자식처럼 보였다.

    관군들은 아진과 린린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평소처럼 함부로 굴지는 못한 채 서로 열심히 두 사람에 대해 추측을 했다.

    도대체 누군데 이런 시골 마을에 온 걸까 하면서 혹시나 불똥이 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했다.

    “누구시오.”

    아진과 린린이 가까이 다가오자 관군들이 신분을 밝히라며 두 사람을 막아섰다.

    “저는 의원입니다. 현령 어른을 뵙고자 해서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의원?”

    의원이라는 말에 관군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는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별것도 없는 위인이었던가 보다고 생각하며 괜히 짜증까지 내는 그들이었다.

    “현령 어른이 아무나 찾아와서 뵙고 싶다면 뵐 수 있는 분인 줄 알았소? 잔소리 말고 썩 돌아가시오!”

    문을 지키는 관군들에게서 큰 소리가 나자 근처에 할 일 없이 대기 중이던 이들이 하나둘 구경을 하러 나왔다.

    “무슨 일이야?”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아진과 린린을 바라보았다.

    “아. 웬 듣도 보도 못한 작자가 의원이라면서 현령 어른을 뵙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의원이라면 혹시 따로 현령 어른의 부름을 받은 것이냐.”

    그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물었지만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일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아니면 현령 어른을 뵙기가 어렵다는 것은 너도 알겠구나.”

    그는 아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곧 린린에게 향했고 남다르게 아름다운 린린을 보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남자를 가두고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함께 있던 관군들은 상사의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어차피 현령과 약속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현령에게 데려갈 필요도 없고 그런 자는 자기들 선에서 알아서 처벌하면 되는 거였다.

    관군들의 얼굴에 비슷한 표정이 지어지는 것을 보고 아진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몇 놈이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계집이 꽤 반반하고 쓸만한 것 같은데 오늘 밤 시중을 드시게 하겠습니다.”

    “그래. 오래간만에 재미있겠군. 앙칼진 것이 길들이는 재미도 있겠고. 아직 사내를 모르는 몸인 것 같으니 새벽까지 친히 운우지정을 나누며 가르침을 내리고 그 후에는 너희에게 줄 테니 다른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서 오늘 특별히 대기하고 있도록 하여라.”

    “감사합니다.”

    아진은 린린이 그 추잡한 말을 듣지 못했기를 바라며 린린을 힐끔 바라보았는데 린린에게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은 듯했다.

    아진도 내공을 사용해 겨우 들은 말이었으니 린린에게 들리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군들은 저희끼리 그렇게 짜고 나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이런 곳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지 못해 그런 것 같아서 잠시 깨달음을 주려고 하는데 이 자들을 따라가야겠다.”

    나이 어린 린린을 두고 운우지정을 운운하던 자가 말하자 아진이 웃었다.

    “나는 현령을 볼 것이다. 다른 놈들을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말에 관군들은 그 자리에서 득달같이 다가와 덤벼들었다.

    “이놈이 기어이 제 명을 재촉하는구나.”

    놈들이 창끝을 겨눈 순간 아진의 몸이 빛살처럼 움직여 사라졌다.

    “흑주는 이놈들의 진기를 빨아들여라!”

    아진은 놈들이 린린을 향해 무슨 마음을 품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고 린린의 품에 있던 구슬은 그 흑주라는 게 혹시 자기인 걸까 하면서 조심스럽게 나와보았다가 아진의 표정을 보고 확신에 찼다.

    아진은 단지 빠르게 보법을 펼쳐 움직여 권각술만으로 관군들을 쓰러뜨렸는데 흑주에게 뒷일을 맡긴 터라 스스로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아진에게 처음으로 흑주라는 이름으로 불린 구슬은 이게 웬 횡재냐고 생각하며 날뛰었다.

    린린은 아진이 구슬까지 불러내서 날뛰는 것을 보고 관군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짐작했다.

    아진 자신은 정작 자기 자신이 모욕받았을 때는 꽤 잘 참았다.

    그러나 산본의가나 가족을 건드리면 그야말로 눈이 뒤집혔다.

    관군들이 자기를 어떻게 봤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사이에 무슨 계획이 꾸며지고 오고 갔을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아…….”

    린린은 그저 아진이 일을 너무 크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게 걱정될 뿐이었다.

    현청에 있던 관군들이 소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달려왔다.

    그들은 절대 구슬이 관군들을 죽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그곳에 있는 자들을 쓰러뜨린 것이 전부 아진의 짓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자들은 죽을 만 해서 죽였소만 당신들은 꼭 죽일 필요가 없소. 그렇지만 내 생명을 위협한다면 당신들도 죽일 수밖에 없소.”

    아진이 말했지만 그 말을 듣고 주춤거리거나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는 아진도 조금 난감했다.

    현청에 있는 관군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현청에 소속된 관군으로서 지금과 같은 광경을 봤을 때 이렇게 행동하는 게 옳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아진은 그들에게 선택하게 했다.

    “죽은 자들은 내 동생을 욕보이려고 계획을 세웠소. 나를 가두고 내 여동생을 데려가 윤간을 하려고 했다는 말이오. 그렇게 하기로 한 게 잘못이 아니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만 나를 공격하시오. 단언하건대 나는 그자들을 죽일 것이오.”

    그 말을 듣자 몇몇 사람들이 멈췄다.

    그동안 함께 일을 해 왔으면 아진의 말이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전혀 없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나는 현령을 만나 봐야 합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나를 보지 못한 것으로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건 어렵소. 우리는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라서.”

    “그러면 여러분이 현청에서 일어난 습격 사건을 처리하는 동안 우리가 몰래 들어간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보지 못한 것으로 한다면 우리도 여러분을 봤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하건 아진이 뜻을 굽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곳에서 일을 마치는 대로 성주님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현령의 폭정을 고할 겁니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허풍을 떠는 사람은 많지만 이 자는 그런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현령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알려주십시오.”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자가 가는 곳을 알려 주었다.

    아진은 그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을 보며 그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아랫사람에게 시켰으면 자신은 책임을 면하면서 위험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진과 린린이 그들의 곁을 지나는 동안 두 사람을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거기에 맞춰 움직였다.

    아진은 린린과 눈빛을 교환한 후에 현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가의 가주전과 비슷하게 생긴 곳에 현령이 집무를 보는 곳이 있었다.

    아진은 곧장 그곳으로 가서 현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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