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60화
“그래 가지고 어떻게 내 부하가 되겠다는 건지.”
그래도 아진이 먼저 간 것이 그저 린린을 약 올리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는지 린린이 객잔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식탁 가득 고급 요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어서 먹어. 먹고 씻어. 세탁도 해 주기로 했으니까 씻고 나서 입고 있던 옷까지 전부 세탁을 맡기자. 여기서 이틀 정도 머물면서 쉬다가 가자.”
“왜 그러는데?”
“급할 것도 없잖아. 돈이 떨어져서 돈도 벌어야 하고 어제 보여 준 초식도 제대로 알려 주면 좋을 것 같고.”
“아아. 나는 좋아.”
린린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바람은 내가 잡을까?”
“아니. 그러지 마. 그냥 내가 아파 보이는 사람한테 가서 말을 해볼게.”
“왜? 오라버니는 편한 길도 어렵게 가려는 경향이 있어.”
그러더니 린린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공자님이 그러면 그 산본의가의 의원님이라는 거예요? 왜 진작 얘기를 안 하셨어요? 산본의가 의원님인 줄 알았으면 진작 아픈 곳을 말씀드렸을 텐데.”
아진은 창피해서 그냥 린린을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그러나 린린의 방법은 금방 효과를 발휘했다.
“산본의가?”
“산본의가 의원님이라고 했지? 거기 의학당 출신인가?”
그 소리를 들은 린린이 또 큰 소리로 말했다.
“네에? 의학당 출신도 아니고 산본신의님한테서 직접 의술을 전수받으신 거라고요?”
‘내가 언제 그랬어, 인마!’
아진은 사람들의 시선이 초집중 되는 것을 깨달으며 부끄러움에 귀까지 붉어진 채 린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린린은 부족한 경비를 조달하는 것과 함께 항상 툭탁거리는 작은 오라버니를 골탕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일석이조라고 여기며 더욱 큰 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럴 때의 부끄러움은 왜 자신만의 몫인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제가 알고 있는 그분일 수도 있겠는데요? 산본신의님은 죽은 사람도 일각 안에만 데려가면 살릴 수 있다고 하던데 산본신의 님의 일대 제자시면 의원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겠네요? 와. 지금 아픈 곳이 없는 게 원통하네. 이렇게 귀한 분을 가까이에서 뵈었는데.”
이 자식. 내가 살던 곳에 가서 약 팔면 진짜 잘 팔겠다.
아진은 린린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 동생이지만 정말 대단했다.
“저…….”
린린의 연기가 빛을 발휘했는지 한 사람이 그들 쪽으로 소심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의원님. 의원님이 혹시 산본의가의 의원님이시면…… 죄송하지만 혹시 제 사제의 병을 봐 주실 수 있을까요?”
“……예?”
아진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저희는 이번에 강호에 처음 나왔는데 며칠 전부터 사제가 몸이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 하면서 그냥 왔는데 오늘은 방에서 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증상이 심해진 것 같습니다.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복부가 부풀었고 손을 대기만 하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사람은 지금 방에 있습니까?”
“예. 원래는 오늘 떠나기로 돼 있었는데 의원을 모시러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두 분이 하시는 얘기를 들어서요. 진료비는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그는 강호에 함께 나온 사제에게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는 얼굴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봐서는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아 아진이 린린에게 눈짓을 하고 남자를 따라갔다.
무복이 허름한 것을 보니 어렵게 경비를 마련해 강호에 나선 것 같았다.
가끔 자신들의 신분을 속이려고 일부러 그렇게 꾸미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이들의 그것은 절대 변장의 수준이 아니었다.
“어느 문파 소속이십니까?”
“하남에 있는 검무문입니다. 의원님.”
역시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복부팽만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해봐.”
남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작은 소리로 아진이 린린에게 물었다.
린린은 그때까지 신이나서 떠들다가 아진의 목소리보다 더 작게 속삭였다.
“오라버니. 저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처음 만난 사이인 줄 알 텐데 이래도 돼?”
“네가 한 거짓말은 네가 수습해.”
“너무해.”
어차피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속인 것도 없어서 아진은 그들이 따진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아진이 다시 물었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복부…… 팽만의 원인은 워낙 다양하고…… 복강 내 장기 질환의 증상일 수 있는데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증상이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게 보통인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그래서 뭐.”
“오라버니가 잘 살펴봐야 할 환자라고 생각해.”
아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증상은 지금 나타나지만 원인이 된 일은 과거에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생각나는 일이 없는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려 주시면 기억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의원님.”
남자의 말에 아진은 혹시 격전 중에 복부를 다친 적이 없냐고 물었다.
“그런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상처는 잘 치료했습니다. 의원님. 상처가 깊지 않아 내상이 없어서 그냥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 치료를 하고 끝냈는데 말입니다.”
“꼭 그게 원인이라는 것은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있어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아…… 싸우다가 다친 것 말고 사제가 전에 무인들에게 끌려가서 맞은 적이 있기는 한데…….”
“그때 복부를 다쳤습니까?”
“네. 의식을 잃었다가 한참 만에 발견이 돼서 그때 상처가 방치되기는 했을 겁니다. 그래도 사제가 아프다는 말은 없어서 그냥 지나갔는데…… 금창약은 발랐고 상처는 잘 아물었습니다.”
“…….”
“혹시 그게 문제일까요. 의원님?”
“일단은 가서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아진과 린린은 걸음을 조금 더 서둘렀다.
아진의 머릿속에는 남자의 사제에 대한 걱정도 들어 있었지만 무인들이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때렸다는 일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혹시 그자들은 사파인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의원님.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파 무림인들이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지요.”
그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게 별로 달갑지 않은 듯 말을 줄였다.
아진도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부지런히 잰걸음을 놀렸다.
“여기입니다.”
남자가 말하고 문을 열자 오래된 농 냄새가 훅 끼쳤다.
남자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서 그 냄새를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이미 안에서 병이 상당히 진행된 듯했다.
“끓인 물이 필요합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주방에 물을 끓여달라고 말하세요. 두 동이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린린. 너는 이걸 불에 달궈 소독해 와라.”
아진은 메스의 형태와 비슷하게 만든 칼을 린린에게 주며 말했다.
그러고는 침통을 꺼내 환자의 옆에 앉았다.
“저는 의원입니다. 지금부터 환부를 눌러 볼 텐데 아픈 부위를 자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남자의 사제는 눈을 간신히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통증 때문인 듯 몸을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진은 복부를 돌아가며 손가락으로 눌렀다.
어디가 환부인지 짐작이 갔지만 보다 확실히 하려고 물은 거였는데 처음에는 참을 만해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아진의 손이 환부를 직접 누르자 마치 야차를 본 것처럼 변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아진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고 여기며 침을 놓기 시작했다.
“고통을 어느 정도 줄여 주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참으십시오.”
“예, 의원님…….”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이윽고 그의 사형과 린린이 돌아왔다.
린린은 아진의 보조 역할을 제법 해냈다.
끓인 물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계속 기다릴 수는 없어서 아진은 복부를 절개했다.
이런 경우 주위로 병세가 전이가 될 수 있어 그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일단 복부를 절개한 후 그는 손으로 장기를 만지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럴 때 수술이 어려워지는 것은 환자의 몸 상태가 너무 약해져 있어 수술 과정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우선 마나를 불어넣어 몸이 수술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직접 환부에 마나를 불어넣어 낫게 할 수도 있었지만 아진은 린린을 생각했다.
린린도 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 수술을 성공시킨다면 린린도 나중에 그것을 시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삶에 이런 작은 목표들이 생겨난다면 린린도 삶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 강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진의 바람이었다.
린린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환부에서 농을 제거하는 동안 린린은 끔찍하고 더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지 깨끗한 천을 들고 있다가 그것이 멀리 튀지 않도록 막고 닦아 주었다.
덕분에 아진은 수월하게 시야를 확보한 채 수술을 해 나갔다.
수술이 끝나고 아진은 너무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마나를 불어넣었고 나머지는 환자의 몸이 알아서 힘으로 회복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수술은 끝났습니다.”
“의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은 채로 방치되고 있다가 몸이 지치고 스스로 방어할 힘을 잃으면서 악화한 것 같습니다. 그사이에 어떤 계기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일단 농은 그곳에서 생겼고 지금은 다 짜냈습니다. 다른 곳으로 번질 일도 없을 겁니다. 처방전을 써 드릴 테니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이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의원님.”
아진은 비싸고 귀하다는 약재들 대신, 효능은 비슷하면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이 싼 약재들을 알려 주었다.
약방 입장에서는 서운한 일이겠지만 돈 없는 사람들에게 괜한 부담을 시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정말 이것만 먹이면 되는 건가요. 의원님?”
“예. 금방 차도를 보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그런데 치료비는 어느 정도나 드려야 할지…… 저희가 형편이 좋아서 강호에 나온 것은 아니라서 돈이 많은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 말은 진작했어야 할 것 같았는데 사제의 얼굴색이 좋아지는 것 같으니 이제는 흥정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듯했다.
“나도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무인이 일을 의뢰받아 돈을 받고 일을 해 주는 것처럼 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자 스무 냥은 받아야 할 중대한 수술이었습니다만 열여덟 냥까지는 해 주겠습니다.”
“…….”
무인에게 은자 열여덟 냥이라면 몇 달간 조금 불편하게 지내야 할 정도는 되겠지만 당장 굶을 걱정을 해야 할 돈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돈이 바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며 아진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돈을 줄 수 없으면 두 사람의 검을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는 무인이 검을 들고 다닌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주 위험한 일일 것 같은데요.”
아진이 말하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제를 고쳐 준 건 고맙소만 그렇게 무례한 말을 듣고 참을 수는 없소.”
“그렇습니까? 그러면 나에게 훈계라도 할 생각인가 봅니다? 그리고 가르침의 대가로 치료비를 깎자고 할 생각이시오?”
아진이 빙글빙글 웃자 남자는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이곳에서 의원의 지위는 사회적으로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나마 산본의가의 의원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는 대우해 줬지만 자신을 모욕한 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 남자가 흉흉한 기세를 떨쳤다.
아진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처음에 이들이 다른 무인들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들었을 때는 이들이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정말 단순했다.
먼저 만난 사람에게 그의 입장에서 얘기를 듣고 상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선악 구도를 어느덧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정리를 하게 된다.
“내 사제를 고쳐 준 게 고마워서 특별히 말학에게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하시오. 강호에서 이렇게 굴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어느덧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