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59화
아진은 린린이 주문한 것이 있었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권술로 놈의 목뼈를 부러뜨렸다.
“으으으윽!!”
순식간에 두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실력 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인지 감히 복수를 꿈꾸는 이는 없었다.
차라리 기회가 있을 때 도망치는 게 낫겠다고 마음을 먹은 듯 몇몇 놈이 움직였다.
남은 사람은 모두 다섯.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다섯 모두를 붙잡는 것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그날의 운이 다하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북리의천과 헤어진 후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오히려 북리의천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맹렬히 수련에 몰두하고 무공을 연마했던 아진에게는 그들 다섯을 한꺼번에 붙잡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린린. 둘은 네가 잡아.”
“응. 오라버니.”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아 있던 린린이 품에서 침통을 꺼내 피리처럼 입에 물고, 도망치는 두 사람의 머리를 향해 날리자 한 사람은 한 번에 쓰러지고 다른 사람은 머리가 고슴도치처럼 된 후에 겨우 쓰러졌다.
그래도 다섯 중 둘을 자기가 해치웠다는 생각에 우쭐해하는 린린을 보며 아진이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한 사람의 머리 위로 발부터 떨어져 내리자 머리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진은 그 자리에서 표홀하게 손을 움직였고 린린은 그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진의 손가락 끝에 아지랑이 같은 것이 짙어지더니 그의 손가락에서 각각 지강이 날아갔다.
날아간 것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거기에 맞은 사람의 몸이 폭포처럼 피를 쏟아내고 뒤늦게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아 참!”
아진은 뒤늦게 린린의 주문이 떠오른 듯, 혼자 남은 산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검을 빼 들었다.
그는 이미 정신이 나간 것처럼 벌벌 떨면서 울었다.
“소…… 소협. 아니. 대협. 제발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고 선량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소협.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진은 웃었다.
“내가 왜, 안 해도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지? 자비를 베풀어서 네가 하겠다는 것도 나를 위한 일이 아닌데. 너를 살려 주면 선량하게 살아가겠다고? 아니? 나는 네 죽음으로 쌓는 선이 더 클 것 같은데?”
아진의 검이 검집에서 나왔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린린은 아진과 검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검기는 사용하지 말고.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초식으로 해 봐. 오라버니.”
“응? 응…….”
검기가 조금씩 검에 깃들다가 린린의 명령을 받고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아진은 린린이 할 수 있을 만한 검술을 펼쳤다.
린린이 할 수 있는 거라고 해서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간단하고 가장 기본적인 검법이라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온갖 묘리를 담을 수 있는 법이었다.
“이건 너도 할 수 있는 검법이다.”
“응. 알아.”
아진과 린린이 말을 하는 동안 그들 앞에 서 있던 산적은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생전 이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검이 지나갔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솟구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자상이 보일 줄 알았는데 자상도 보이지 않아 그는 자기가 큰일을 모면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용서해 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역시 어리고 세상의 경험이 없는 놈들은 이래서 문제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웃었다.
그의 몸에 자상이 없는 것은, 절단된 곳이 너무 빠르게 잘리고 검이 지나가 버려 그런 거라는 것을 그가 알 방법은 없었다.
내장과 혈관조차도 아주 잠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것들은 한동안 제 기능을 다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희미한 혈선에 압력이 가해지고 그 부위가 서서히 벌어지기까지 얼마간 몸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아진의 공격을 받은 산적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만졌다.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던 피가 손에 만져졌다.
그리고 일단 손에 만져진 후에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솟구쳤다.
아진이 그의 가슴팍을 발로 차자 양단된 몸이 뒤로 넘어갔다.
허리 위의 몸이 사라졌는데도 그 아래 부위는 꽤 오랫동안 그대로 멈춰있었다.
“신기하네? 안 쓰러지네?”
린린이 아진의 옆으로 와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진은 린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시신을 보고서 나타내는 반응이 이렇다는 것만 봐도 린린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딱 린린다웠다.
그때 어둠 속에서 부지런히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린린의 품에 있던 구슬이었다.
구슬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산적들을 찾아다니며 남아 있는 진기를 야무지게 빨아댔다.
아진과 린린은 구슬이 그러는 것을 알았지만 딱히 막지는 않은 채 자리를 정리했다.
“자리 옮겨야겠다. 실컷 불도 피워 놨는데.”
“어쩔 수 없지. 낮에 움직이려면 더우니까 아예 지금 좀 더 걸을까?”
린린은 잠도 다 깼겠다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한 듯 말했다.
“그래. 그러자.”
아진은 불이 붙어 있는 장작 하나를 집어 들고 나머지에 붙은 불은 전부 끈 후에 주변을 정리했다.
“린린. 그런데 이런 여행. 너한테 조금은 의미가 있어?”
문득 아진이 물었다.
“아니?”
린린이 쾌활한 소리로 말하는 걸 보고 아진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린린에게 그런 걸 기대한 자기가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많이 있어.”
“어?”
그 말은 걸음을 한참이나 걷다가 나왔고 아진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며 린린을 보았다.
“의미. 많이 있다고. 적어도 이렇게 살다 죽으면 인생이 허망했다는 생각은 안 들 것 같아. 나는 뭘 하다 떠나는 걸까 하는 생각도 안 들 것 같고.”
“그래. 다행이다.”
아진이 훈훈한 기분에 린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했을 때 린린이 하필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아진도 알았지만 일단 그러고 나니 뻘쭘하기는 했다.
“오라버니. 구슬이 밤에는 빛도 나던데 구슬을 띄워놓으면 횃불을 안 가져가도 길이 보이지 않을까? 횃불을 들고 가면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린린이 주섬주섬 구슬을 꺼냈다.
그 구슬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그리고 그 후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는 사람들은 린린이 구슬을 갖고 다니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아직도 구슬은 린린과 함께 다니고 있었다.
린린이 구슬을 꺼내 두 손으로 들자 구슬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빛을 냈다.
칠흑같이 어두운 구슬에서 그런 빛이 나온다는 것은 얼핏 상상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앞길을 밝히기에는 충분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 정도의 밝기.
그리고 빛이 인위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도 달빛과 더 비슷했다.
“좋지?”
린린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너도 도움이 되네.”
“치. 나도 도움 많이 되거든?”
린린의 말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이 태어난 후.
그리고 린린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아진은 이곳에 온 이후 가장 큰 좌절을 경험했다.
아진은 이곳에 온 것이 너무 좋아서 누군가 자기를 불쌍하게 여겨서 상을 준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린린이 태어나고 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린 것을 안 후에 그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건 상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이건 누군가 나를 벌하려고 꾸민 일인지도 몰라.’
그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들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는데 그 후로 다시 몇 번이나 떠올랐다.
그러더니 그 후부터는 견고하고 확실하게 아진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정말 그런지도 몰라.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는 다 통하는 치료법이 왜 린린에게만 안 통하는 거야?’
마나도 그랬다.
마나를 불어 넣을 때 몸이 보이는 반응조차 린린의 경우에는 너무 달랐다.
세상의 누구보다 린린을 고치고 싶은데 린린만큼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아진은 이곳에 온 이후로 한동안 느낄 일 없던 두려움을 다시금 느끼곤 했다.
내 동생은 어떻게든 반드시 내 손으로 고치고 둘 다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님과 함께 다섯이서 오래 오붓하게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금방 떠날 거면 이렇게 예쁘지나 말지.’
아진은 린린을 볼 때마다 그런 것들이 서운했다.
린린이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자신을 화나게 할 때는 혹시 정을 떼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냥 바보여서 그런 거라는 걸 깨닫게 되기는 했지만.
아진이 린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오라버니. 그 얘기 좀 해 줘. 그 세계에 나타났던 괴수. 오라버니가 싸워서 이겼던 가장 무서운 괴수. 오라버니는 거기에서 최고라고 했지?”
“응.”
남 앞에서 그런 자랑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남이 그런 말을 한다고 우쭐해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린린이 그렇게 말하면 부정하지 않고 말해 주었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자기를 서로 데려가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네 오라버니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해 주면 린린이 기뻐할 것 같아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자랑을 하면 린린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때마다 린린의 눈은 아진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반짝였다.
* * *
쉽게 끝날 치료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치료 방법이 알려지지 않은 만큼 끈기를 가지고 오래 버텨야 한다는 것 역시 알았다.
아진은 자신이 있었다.
린린이 버텨주기만 하면 아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혈맥을 보하는 일은 린린의 체질과 반대되는 성질의 마나를 불어넣어 린린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작업이었다.
아진은 치료과정이 린린을 고통스럽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린린은 그래서 희한하게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동생이 그런 상황이면 오라버니가 동생에게 잘해 주는 게 정상이 아닌가.
그런데 아진은 자기가 얼마나 힘들게 병간호를 하고 있는지 생색이라는 생색은 다 내면서 린린에게 고맙다는 말을 강요하곤 했다.
린린도 그래야 자기가 산다는 걸 알고 있어서 고맙다고 말을 해 주기는 했는데 어떤 때는 참 더럽고 치사했다.
“오라버니. 나 배고파. 간도 안 된 산짐승만 먹는 것도 너무 질려. 그 고기는 너무 질기고. 그리고 안 씻은 지도 너무 오래돼서 나한테서 냄새나는 것 같아.”
“어. 엄청 심해.”
“야!”
린린은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아진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자연 객잔이래. 저기 가 보자.”
“어?”
안 보이던 객잔이 갑자기 나온 것도 신기했다.
“저거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어?”
“간판이 허름한 걸 보니까 적어도 몇십 년은 같은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데?”
아진은 객잔이 눈앞에 보이자 동생은 신경도 안 쓰고 경공을 펼쳤다.
“오라버니. 같이 가야지!”
린린도 경공을 시도했지만 영 시원치 않았다.
객잔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걸 움직이고 헉헉거리면서 죽겠다고 하자 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