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58화
린린이 어떤 마음으로 아진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 것 같았고, 린린이 세상을 보면서 꿈을 키워나가는 것을 막고 싶지 않았다.
곁에 아진이라는 오라버니가 없었다면 모두 린린을 막았겠지만 아진이 함께 있기만 한다면 산적이 나타나도, 흑도 방파가 나타난다고 해도 걱정할 게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린린을 보내 주었다.
린린이 가끔 발작을 일으켰지만 그때도 아진이 옆에 있기만 하면 효과적으로 잘 대응을 해 왔기에 여러 가지로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어쩌면 린린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린린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린린에게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두 사람을 응원하면서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 여행이 1년을 넘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지만 놀랍게도 조금 있으면 2년을 넘어설 참이었다.
아진은 바닥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마지막에 사용했던 영초를 떠올렸다.
린린이 견뎌낼 수 있는 영초는 딱 그것까지가 한계인 것 같았다.
극음의 기운을 양기로 다스리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이었는데 음기가 워낙 강하다 보니 웬만한 양기로는 다스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너무 강한 양기가 몸속으로 들어가면 린린의 몸이 견뎌낼 수 없을 거라 아진은 린린의 몸이 적응하는 기간을 갖게 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아진도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린린은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고 굳게 버텨나가고 있었다.
‘병을 고치려면 지금까지 써왔던 영초로는 안 되는데. 그런데 린린이 그걸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고. 어떻게 해야지?’
아진이 깊이 생각에 빠진 동안 린린도 아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조용했다.
린린은 쫑알거리기는 했어도 결국 자기 힘으로 토끼까지 잡아다 놨다.
그러고는 불 위에 나무를 올려놓고 고기가 타지 않게 막대를 돌리는 것까지 말끔하게 해냈다.
처음에는 이런 걸 왜 자기가 해야 하는 거냐고 하더니, ‘나중에는 네가 다 해야 하는 거니까 미리 배워두면 좋은 거 아니냐’라는 아진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린린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미래를 아진은 그런 말들로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아진에게 더 툴툴거렸다.
바보 같다는 말을 듣는 건 기분이 나빴지만 아진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자기도 오래오래 살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 그곳 있잖아. 오라버니가 살았다는 곳.”
“으하아앗, 뜨거워!!”
토끼 고기를 하필 허벅지 위에 떨어뜨리고 방정을 떠는 아진을 보면서 린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로운 강호를 분할하는 십천.
그중에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불허하고 천외천이라 불리며 우뚝 선 검신 북리의천.
검제라는 별호를 버리고 스스로 검신이라 부르며 홀로 강호의 주인임을 자처하고 나선 그 북리의천이 늘 그리워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제자가 토끼 고기를 흘리고 뜨겁다면서 눈에 눈물이 맺힌 채 발광을 하는 것을 누가 알까.
“뭐라고 했냐?”
오두방정을 다 떨고 나서 눈물을 닦으며 아진이 물었다.
“오라버니가 살았다는 곳 말이야. 거기 얘기 좀 해 줘. 나도 거기에 갈 수 있을까?”
“네가 어떻게 가? 나도 못 가는데.”
“오라버니도 못 가?”
“응. 여기에 온 것도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그냥…… 상태 창이 나타났어. 그리고 물었지. 무림 세계로 이동하겠냐고.”
“그런데 오라버니는 그때 어떻게 결정을 할 수가 있었어?”
린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진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러나 아진은 이제 편안한 얼굴을 한 채 대답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는…… 미련이 남지 않았거든.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곳에서는 내가 너무 많은 실수를 하고 너무 엉망으로 만들어 버려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았어.”
“왜?”
“어…… 안 좋은 모습을 너무 많이 봐 버렸다고 해야 하나?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그게 오라버니가 한 실수야?”
“응.”
아진은 당당하게 말했다.
린린이 궁금해하는 걸 알고 아진은 그곳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그곳에서도 자신은 서도진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서도진이라서 놀랐다고 하자 린린이 신기해했다.
“거기에 서이린이라는 사람도 살아?”
“그럴 것 같은데? 그런 이름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럼 나도 거기에 갈 수 있을까?”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여기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린린이 귀여워서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린린은 기름 묻은 손가락으로 만졌다고 투덜거렸다.
“야, 인마. 고기는 이 두 손가락으로만 만졌고 네 머리는 다른 손가락으로 만졌거든?”
다른 사람들이 속을 긁을 때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데 아진은 일단 린린이 그러면 억울함이 평소의 열 배 정도로는 치솟는 것 같았다.
린린은 자기가 아진을 화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오라버니. 만약에 내가 죽으면 나 거기로 보내 줘. 방법을 찾아봐.”
“싫어. 죽지 말라고 했잖아. 오라버니를 믿으라고 했는데 말도 안 듣고 죽어 버리면 나도 네 부탁 안 들어줘.”
아진의 말에 린린이 피식 웃었다.
“야. 불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와서 앉아. 많이 추워?”
입술이 파란 것을 보고 묻자 린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구워지게 생겼어.”
푸짐하게 먹고 린린이 먼저 잠이 들었다.
아진은 린린에게 제 다리를 베고 자게 하고 린린의 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조금만 마나가 들어가도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유독 린린에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때는 마나를 불어넣는 자신의 손을, 수면 아래에 있는 어떤 존재가 갑자기 잡아채서 확 끌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비명을 질렀고 린린도 깜짝 놀라며 일어나서 아진을 달래주었다.
그 일은 몇 번 반복이 됐고 요즘에도 그런 느낌을 받는 때가 종종 있었다.
아무래도 린린의 안에 있는 기운이 아진을 싫어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아진은 겨우 그런 거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는 린린을 고쳐야 할 사명이 있었고 자신의 마나로 린린의 혈맥을 강해지게 해서 더 강한 영약을 버틸 수 있게 할 책임이 있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어디선가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진은 한밤의 불청객이 누구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 근처를 터전으로 삼고 활동하는 산적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진이 손가락으로 린린을 톡톡 두드렸다.
린린은 벌써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며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숨어 있을래?”
“아니. 자는 척하고 있을게.”
“그래. 보고 싶은 거 있어?”
“검 가지고 싸울 거야?”
“상관은 없는데 왜?”
“그럼 검 가지고 싸워. 다른 건 어려운데 그래도 검은 나도 배우면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아진은 린린이 보고 따라 할 수 있을 만한 걸 떠올렸다.
다른 집안에서 구음절맥에 걸린 아이가 태어났다면 문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불면 날아갈까 손대면 터질까 하면서 키웠겠지만 아진은 린린이 바라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린린이 직접 그런 것을 펼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정말 멋진 모습을 보이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기를 보는 동안 린린이 이입을 해서 마치 린린 자신이 산적들을 쓰러뜨린 것처럼 느끼기를 바랐다.
아진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이윽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우연히 아진과 린린을 발견한 이가 돌아가서 동료들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바닥을 밟으며 다가오는 수가 여섯에서 일곱은 되는 것 같았다.
조그만 산채의 산적들이라면 그만해도 적다고 할 수 없었다.
‘소리를 죽일 생각이 애초에 없는 건가?’
그들의 발아래에서 마른 낙엽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작은 돌들이 서로 부딪혔는데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산적들은 계속 걸어왔다.
“여기에서 자리를 폈으면 돈을 내야 하는데. 여기는 처음인가 보지?”
목소리로 봐서는 사십 대 정도나 되는 것 같은 자가 말했다.
시비를 걸겠다는 의미가 다분했다.
“어. 처음인데.”
아진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그곳에 모인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형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인데요? 이런 놈은 그냥 돈만 뺏고 돌려보낼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여자가 같이 있다고 센 척하려고 그러는 모양이다. 귀엽게 노는군.”
어느덧 산적들은 아진과 린린을 에워쌌다.
아진은 린린이 전혀 동요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빨리 아진이 활약해서 산적들을 전부 쓰러뜨리기를 기다리는 듯 미약한 흥분감이 감지되고 있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데려갈까요, 형님? 생긴 게 구미를 당길 것 같은데요? 높은 집안 자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부잣집 여식인 것 같습니다. 인질로 잡고 있다가 돈을 뜯어내도 좋을 것 같네요.”
놈들이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며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것을 들으며 아진은 그들이 먼저 나설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자기가 먼저 시작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저년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이놈은 너희가 처리해라.”
“예, 형님!”
모두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형님이라 불린 자는 아마 채주였던 듯했는데 린린을 일으키려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린린의 팔에 채 닿지도 못하고 아진에게 붙잡혔다.
초식이랄 것도 없는 동작이었다.
감히 그런 놈이 린린의 손을 잡게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놈의 손목을 잡아 돌리자, 극심한 통증이 괴로워 채주가 스스로 몸을 꼬았고 결과적으로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산적들은 자기들이 상대를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진은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다리를 뻗어 채주의 목을 발꿈치로 내리쳤다.
“으아악!”
짧은 비명이 그가 낼 수 있는 마지막 소리였다.
개구리가 튀어 오르는 것처럼 몸이 움찔했다가 가라앉은 후에 채주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설마하니 그것이 죽음이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 산적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혀…… 형님…….”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채주를 불렀다.
그러나 채주는 대답이 없었고 미동조차 하지 않자 산적들이 급격히 동요했다.
아진은 본격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를 죽일 생각이었나?”
“…….”
“그런 것 맞지? 나는 죽이고 내 여동생한테는 어쩌겠다고? 내가 원래는 성격이 참 좋은데 내 동생한테 험한 소리 하는 놈들을 보면 못 참겠더라고.”
아진은 언제 다가간 건지 모르게 한 남자의 앞에 우뚝 섰다.
“죄…… 죄소…… 죄송합니다. 소협. 귀한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아. 사과하지 마. 사과 안 받아 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