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57화
“그런데 나도 이 손이 마음에 들기는 해. 이 손을 잃은 그 공자가 안 됐기도 했고. 그 공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러면서 도종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쁜 사람의 팔을 달고 사는 건 기분이 어떻냐는 듯이.
그러자 서종욱도 자기 손을 쫙 펼치고 보았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사람. 창천십이대라고 했지. 아진아?”
“네. 아버지.”
“그중에 손이 예쁜 사람을 네가 특별히 고른 거냐?”
“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제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세요. 끝없이 수련해서 창천십이대까지 이른 사람인데 손이 이렇게 예쁘다는 게 희한하잖아요. 이런 손을 가지려고 특수한 무공을 연마했는지도 몰라요.”
“확실히 이 손이 촉진을 하는데도 좋다. 시침하는 데도 좋고.”
그러자 린린이 자기도 예쁜 손을 얻어다 달라며 징징거렸다.
“죽겠군. 할 줄 모르는 게 없으니까 동생이 그런 것까지 해 달라고 조르고.”
아진이 말하자 어머니가 린린의 손을 꼭 잡았다.
“린린. 이건 이 어머니가 힘들게 만들어준 건데 린린은 이 손이 마음에 안 들어?”
“예. 어머니. 안 들어요. 제 손은 못생겼어요.”
“그런데 네 손. 네 얼굴이랑 균형이 맞아.”
아진은 그 한마디를 했다가 다 발라먹은 닭 뼈다귀에 얻어맞았다.
“와……! 너. 이 형님을 때리고 막. 어?!”
이제는 굳이 자기가 오라버니라고 알려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아진이 억울해했다.
서종욱은 그런 가족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모의 눈빛도 한없이 따뜻했다.
그녀는 원래도 지혜롭고 인자한 사람이었지만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전에는 없던 면모를 발휘하기도 했다.
많은 것이 손에서 떠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고 그것이 오히려 더 풍성하게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아등바등하지 않고 멀리 보고 오래 기다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줄 알게 된 것이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딸을 보면서 초조해하지 않고 웃어 줄 수 있는 것도 그 시간을 통해 얻은 교훈 때문이었다.
“어머니. 그럼 저도 그냥 이 손을 갖고 살게요. 저까지 손이 예쁘면 어머니만 따돌림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잖아요.”
린린의 말에 어머니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린린이 이렇게 착하구나.”
한차례 웃음을 터뜨리고 그들은 의학당과 약방, 의원과 의생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천응문에 대한 얘기도 나왔고 제선문의 의원들이 무료 의료원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준다는 말도 들렸다.
“비룡채 아저씨들이 해 준 말이라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선문을 이제 신비문파라고 부른대요.”
권력에 눈이 멀어 있던 그들은 분명히 악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까지 꼬투리를 잡아 험담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 사람들도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잘못한 걸 갚을 기회를 가지는 것도 좋겠지.”
서종욱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제선문이 스스로 의술 실력을 키워서 다시 산본의가와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구음절맥을 고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봉문을 풀어 주는 건 어떨까요?”
도종이 말했지만 아진과 서종욱은 고개를 저었다.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 놔야 연구에 더 몰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선문이라면……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종욱이 조용히 말했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건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가 하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제선문을 통해서라도 린린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 * *
계곡이 가까이에 있는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린이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가자 아진이 정신이 번쩍 들어 그대로 뒤를 쫓아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야, 서이린! 너 이번에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가면 가만 안 둬!”
“덥잖아. 오라버니.”
“이럴 때만 오라버니라고 하지.”
아진은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진이 잡았을 때 린린은 막 계곡물에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두 발이 허공에 떴는데도 아진에게 붙잡혀 버리자 린린은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고 아진을 노려보았다.
이제 열다섯 살이 된 린린의 얼굴에는 만두 같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젖살이 미모를 감추고 있었던 것인지 젖살이 빠지자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만두일 때부터 린린을 예뻐했던 아진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동생이었다.
“그런데 린린. 구음절맥에 대해서 세상에 알려진 것 중에 잘못된 게 정말 많은 것 같아.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머리가 아주 좋다고 하잖아? 그런데 너는 왜 그래?”
“왜 그래, 오라버니? 나 머리 좋잖아.”
“머리 좋은 놈이 뒷일 생각 안 하고 무턱대고 물속에 뛰어드냐?”
“그건 아버지랑 오라버니들도 마찬가지잖아. 술 마시고 다음 날 매번 고생하면서도 다시 술을 마시잖아.”
“야. 그건…….”
아진은 말을 하다 말고 그냥 린린을 내려놓았다.
린린의 숯검정 같던 눈썹은 이제 초승달 모양으로 곱게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린린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손을 보기는 해야겠다며 어머니가 눈썹을 정리해 준 이래 눈썹이 길이 들었는지 그 자리에서만 났다.
전에는 산본의가에 삼 형제가 있다고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가주에게 이남 일녀가 있다고 말을 하곤 했다.
전체적으로 만두보다는 송편 같이 생겼다고 할까.
만두일 때도 예뻤지만 이제는 송편처럼 생겨서 더 예뻤다.
린린이 구음절맥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은 그녀의 검푸른 입술과 창백한 얼굴 정도였다.
“오라버니. 다람쥐다. 잡아줘.”
“약한 척하지 말고 네가 잡아.”
아진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하자 린린의 입술이 튀어나왔다.
“알았어. 물에 안 들어가면 되잖아.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 고생을 했는데 내가 또 찬물에 들어가겠어?”
“린린. 그럴 때는, ‘내가 바보인 줄 알아?’라고 묻는 게 아니라 ‘내가 바보라는 걸 알아차렸어?’라고 묻는 거야. 너는 바보고 나는 그 사실을 아니까.”
아진의 말에 린린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아진은 조금도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린린의 꼬임에 빠져서 린린을 데리고 산본의가를 떠나온 후, 아진은 린린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린린이 시원할 것 같다면서 계곡물에 퐁당 뛰어들었고 그로부터 꼬박 나흘 동안 사경을 헤맸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열이 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린린의 체질은 그런 순간에도 린린을 괴롭혔다.
혈맥을 보하고 양기가 강한 영초를 쓰는 일반적인 치료법을 사용해서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진은 지금도 화가 났다.
린린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은 열여덟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는데 린린은 이제 벌써 열다섯 살이었다.
그 말은 린린에게 남은 시간이 대략 3년 정도라는 거였다.
-오라버니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며. 내가 죽으면 오라버니가 나도 살릴 수 있어?
그렇게 묻는 린린에게 아진은 대답해 주지 못했다.
자기가 하는 말은 전부 다 믿을 동생이라서 더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확답을 해 주고 싶은 아진이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잘 몰라. 죽은 사람을 전부 다 살릴 수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은 다 살린 거잖아. 그렇지?
-아니야. 못 살린 사람도 많아. 독고세가를 공격한 살수들도 그랬고.
그때만 해도 린린은 살고 싶다는 의욕이 강한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문득문득 자살 충동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리고 병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북리의천에게 미리 들었지만, 그래도 린린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아진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배신감.
남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배신감이라는 게 희한했다.
그런데 배신감이 맞았다.
이제 린린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데 자꾸만 포기해 버리려고 하는 린린이 미웠다.
“린린. 오라버니 못 믿냐? 오라버니가 너 꼭 낫게 해 줄 거라고 했잖아. 내 부하가 되겠다며. 나는 그 말만 믿고 아직 다른 부하를 뽑지도 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떻게 하냐?”
“오라버니. 사람들은 토끼 고기는 먹으면서 다람쥐 고기는 왜 안 먹을까?”
쪼르르 지나가는 다람쥐를 보면서 린린이 말했다.
이 녀석과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살이 별로 없어서?”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골똘히 생각해서 답을 내놓기는 했다.
“토끼는 많은가?”
“아니. 그보다. 다람쥐 고기는 안 먹어?”
“오라버니는 먹어 본 적 있어?”
이게 아닌데.
이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고 알아듣게 따끔하게 말을 하려고 한 건데 이상하다.
그러다가 아진도 결국 포기했다.
서이린은 자기가 말하고 싶지 않은 얘기에서 빠져나가는 것만큼은 선수였다.
“나뭇가지나 빨리 모아와. 오늘은 여기에서 자게.”
“나 힘든데?”
“어. 힘드니까 모아와. 너는 운동 부족이야.”
“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네. 오라버니. 오늘 몇십 리를 걸은 줄 알아? 아니. 말을 잃어버린 게 언젠데 한 필 좀 사지. 병약한 여동생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도 꼭 이렇게 걷게 해야겠어?”
“어. 그래도 집 나오고 나서 너 혈색도 좋아지고 몸도 건강해진 것 같지 않냐? 어차피 구음절맥을 완치시켰다는 사람은 없어. 나았다는 사람도 알아보면 몇 년 후에 다시 병이 도져서 죽었다고 하고.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얘기만 믿어서는 안 돼. 그 말은 들을 필요도 없어. 나는 너를 완치시킬 거야.”
“그 전에 쓰러지겠다고.”
“그러는 사이에 나뭇가지를 모았으면 벌써 다 했겠다.”
“아니거든?”
그래도 아진은 동생이 말 안 듣고 바락바락 대드는 게 좋았다.
죽으면 반항도 끝날 테니까.
아진은 짧은 풀들이 고르게 자란 곳을 찾아 그 위에 누웠다.
“병약한 동생한테 나뭇가지를 모아 오라고 하고 오라버니는 쉬는 거야?”
“어. 네가 앙알거리는 거 다 상대해 줬더니 너무 진이 빠져서.”
린린이 도끼눈을 떴지만 어차피 아진이 그렇게 나오면 도중에 변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포기하고 나뭇가지를 모아왔다.
“나뭇가지 다 모으면 불 지피고 토끼 잡아다가 구워라.”
“하!”
린린이 아진을 노려보았지만 아진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몸을 굴려서 벌레처럼 말고 눈을 감았다.
“와…… 서이린의 형님 노릇을 하는 건 정말 극한직업이야.”
린린은 아진이 형님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피식피식 웃었다.
자기도 아진을 형님이라고 부르던 게 기억나서였다.
“하여간 그때부터 말을 안 들었지.”
아진은 몸을 굴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하늘은 찢어진 걸레처럼 보였다.
그래도 푸른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린린이 아진에게 밖에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 아진은 그러자고 말했다.
린린은 당연히 안 된다고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진이 허락하자 눈이 동그래졌다.
아진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했고 도종에게는 자기들이 집을 떠나 있을 거라고 통보했다.
세 사람은 모두 걱정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