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56화
“그런데 제선문에 대한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문주가 우군사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봉문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알겠습니까.”
“듣자 하니 신비문파의 흉내를 내면서 떠돌아다니며 무료로 의료 봉사를 한다고 하는 것 같더군요. 북리세가에서도 그것까지는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긴. 환자를 치료하지 않으면 손이 굳어 버릴 테니 그렇게라도 하는 게 좋겠지요.”
우군사는 더 이상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천응문이라고 해서 제선문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고 제선문이 찍혀져 나가는 동안 운 좋게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뿐이었는데 실력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기고만장한 꼴을 보고 있자니 영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이런 시원찮은 자들이 같은 편이라는 것이 가장 짜증스러웠다.
“이번에 산본의가의 애송이들도 온다고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부상한 환자를 치료해 본 적도 없을 텐데 시골 마을 애송이들이 쓰러진 무인들을 보고 기절이나 하지 않을지 모르겠군요. 하도 명성이 자자해서 산본신의라는 자는 한번 보고 싶기도 합니다. 산본신의라니. 촌구석 놈들이기는 하지만 어찌 신의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붙인다는 말입니까.”
“나는 그런 말을 들어 줄 시간이 없어 이만 가 보겠소. 출정할 때 각 진영에 고르게 사람들을 보내 주기 바라겠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군사는 자리를 뜨기 전 의원과 의생들을 둘러보았다.
그중에는 대여섯 살 정도로나 보이는 아이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원래 천응문에 그렇게 나이 어린 의생들은 없었는데 산본의가에는 신동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극을 받은 듯 아이들을 데려다 의술을 가르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뛰어나서 의생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천응문에도 신동이 있다고 보여 주려고 한 일이라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우군사는 천응문주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운 없는 사람들만 내 주위에 득시글거리는군.’
다른 것에서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천응문주의 명령을 받는 천응문 소속의 의원과 의생들이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운이 없어 보였고 운 없는 사람은 그 불운을 몰고 다니며 주위 사람들의 삶도 같이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갔다.
‘애초에 천응문주의 도움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군사는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다시 전방을 한 번 주시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 * *
북리세가와 독고세가의 동향을 살피도록 명령받은 척후들은 그들이 출정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각각의 세가에 심어둔 간자들이 와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북리세가와 독고세가는 출정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산본신의가 와서 북리세가의 가주를 설득했고 가주가 산본신의의 뜻을 받아들여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는 말에 척후들은 다급히 몸을 날렸다.
소식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이번 일로 가문의 전력이 손실될 것을 우려하던 사람들은 크게 안도했다.
이로써 무림맹에 협조했다는 생색은 생색대로 내고 가문의 고수들도 지킬 수 있어 기뻤던 것이다.
그들 중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이들은 그날, 싸움도 없이 강호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리세가. 그중에서도 북리의천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실감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그 뒤의 산본신의에 대해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누구도 그 산본신의를 움직인 사람이 그의 어린 아들인 아진이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 * *
“이렇게. 형님?”
숯덩이 같은 눈썹은 더욱 위용을 발휘했고, 집중을 하면서 미간에 골까지 파이자 그 귀여움이 치명적인 수준이 되었다.
너는 오라버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럼 왜 작은 형님은 큰 형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거냐면서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린린이었다.
“그야 나는 남자니까 그렇지, 인마!”
아진은 그 문제를 가지고 자기가 그렇게 진지하게 열을 올리며 설명을 해야 할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그러는 게 일상이었다.
“그거 안 좋은 것 같아. 내가 아직 뭘 잘 모른다고 형님 마음대로 지어내고 이상하게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거야.”
“그래. 마음대로 해라.”
아진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정면으로 이렇게 내지르라고. 힘껏 뻗어.”
“이게 다야. 아무리 힘껏 뻗으라고 해도 내 팔은 이게 단데?”
린린은 이번에도 또박또박 설명했다.
듣고 보면 다 맞는 말이었다.
팔을 어디다 숨겨두고 안 뻗은 것도 아니고,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몸이라 힘껏 뻗는다고 해도 그 모양인데 어쩌랴.
아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알았으니까 형님이, 아니 오라버님이 알려준 걸 계속 연습해봐.”
아진은 린린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주어지지 않은 시간 동안 힘들게 무공 수련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진을 보러 온 북리의천이 해 준 말이 있었다.
구음절맥에 걸린 아이는 천기를 읽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고 린린도 이미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알고 있을 텐데 린린이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그냥 그걸 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어떻겠냐고.
남은 햇수가 15년이라면 그 사이에는 린린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게 해 주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에 아진은 어떤 게 린린을 위한 길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린린에게 물었다.
-린린. 넌 뭘 하고 싶어?
-형님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어.
-……어?
-형님처럼 무공을 잘하는 사람이 될 거야.
-너는 산본의가 사람이니까 의술을 배워 보지?
-그건 아버지랑 큰 형님이 잘하시니까 나는 무공을 배울 거야.
-……어?
그 결과 지금 그들은 이러고 있었다.
아진은 구음절맥을 다스릴 수 있는 영약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당장 그것을 구하러 가려고 했지만, 그것을 잘못 쓰면 오히려 몸이 버티지 못하고 원래의 수명보다 더 빨리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지금은 병에 대해 연구 중이었다.
그래도 영약을 찾는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는데 비룡채 사람들이 곳곳의 약방과 약초꾼들을 찾아다니며 구음절맥에 좋다는 약초를 사 오곤 했다.
물건만 있다면 영약도 일단 사 놓기는 하려고 했는데 영약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구해지는 것도 아니고 시중에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라 그쪽으로는 영 성과가 없었다.
북리세가와 독고세가에서도 영약이 나오기만 한다면 천만금이 든다고 해도 사 줄 거라며 영약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린린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린린은 성과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얏! 얏!”
소리를 지르며 린린은 주먹을 교차해서 내질렀다.
주의하라고 한 것을 또 잊고 멋대로 하고 있었는데 아진은 야단칠 수가 없었다.
린린은 아진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숯검정 같은 짙고 굵은 눈썹.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
조그맣고 동그란 코.
구음절맥을 앓고 있어 늘 푸른 기가 감도는 약간 두툼한 입술.
아무리 봐도 예쁜 얼굴이 아닌데 너무 예뻤던 것이다.
“와. 우리 만두는 왜 이렇게 귀엽지?”
“형님. 만두한테 맞아봤어?”
“아니?”
“맞아볼 거야?”
“아니?”
아진이 말하다가 린린에게 다가가서 린린을 꼭 안아주었다.
“린린. 이 오라버니가 린린의 병을 꼭 낫게 해 줄 거야. 알고 있지?”
“응. 형님. 그때까지 린린도 건강하게 살고 있을게.”
“그래. 이 형님이, 아니 오라버니가 얼마나 강한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알아. 형님은 가장 강했잖아. 괴수도 다 죽이고. 형님보다 강한 딜러는 없었잖아. 형님은 딜러이자 힐러였고.”
“……!”
아진의 가슴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린…… 린.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그걸 어떻게…….”
“형님이 말해 줬잖아. 와. 이 형님 좀 봐라? 갓 태어난 애라서 못 알아듣는 줄 알고 그냥 뱉은 거야?”
“야. 아무리 그래도 누가 생후 한 달도 안 됐을 때 일을 기억해?”
“형님. 나 무시해? 나 이래 봬도 구음절맥 걸린 사람이야.”
“……어.”
온몸 가득 뿌듯함을 내뿜고 있는 린린을 보고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얘기가…… 언제 생각났어?”
“며칠 전에 갑자기. 아버지랑 형님들이 영수 얘기를 했잖아. 그때 갑자기 생각이 나던데?”
“내가 괴수를 사냥했었다는 얘기가?”
“응. 그게 영수랑 비슷한 거 맞지?”
“내가 영수를 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괴수가 더 강하지 않을까?”
“그럼 형님은 영수도 잘 잡겠네?”
“그럴 것 같아.”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야기였는데 린린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 것도 같았다.
“형님은 정말 대단해. 나는 형님의 부하가 될 거야. 우리 같이 다니면서 영수를 잡아서 팔자. 형님. 내단은 아버지랑 큰 형님 드시라고 드리고.”
린린은 벌써 꿈에 부풀었다.
아진은 자기도 정말 너무나도 그러고 싶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래. 그러자. 린린. 이 오라버니가 꼭 그렇게 되게 해 줄게.”
린린은 아직 좀 더 연습하고 싶어했지만 아진은 린린의 차가운 손을 주물러 주었다.
‘신기하네. 어떻게 그 얘기를 기억한다는 거지?’
그러면서 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안 했어. 형님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형님도 아직 말 안 했어?”
“응.”
“그럼 나도 계속 비밀 지켜 줄게.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나서 되게 좋은 것 같아.”
“네가 내 동생이라서?”
“응.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고 형님들의 동생이고.”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던데 린린은 왜 아직 자기가 여동생인지 남동생인지도 모르는 걸까 하다가 아진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천재들이 원래 쉬운 부분에는 약하기도 하잖아.’
이유가 뭐건 상관은 없었다.
뭐라고 하더라도 린린이 가장 소중한 동생임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 * *
오랜만에 가족들의 식사 시간이 여유롭게 주어졌다.
식사를 하다가 도중에 급한 환자 때문에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는 식사가 끝나도록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사람들이 움찔하며 오늘은 왜 이러는 거냐고 서로 묻기도 했다.
“와. 정말 웃겨요. 이런 게 정상일 텐데 우리는 이제 이런 삶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네요.”
도종은 이제 제법 의젓한 소리를 했다.
“나도 저거 줘. 작은 형님. 큰 형님 손은 정말 예뻐.”
도종이 허공에 손짓을 하면서 말하자 린린이 매의 눈을 하고 그 손을 보더니 아진에게 말했다.
그러자 도종이 훗 하고 린린을 비웃었다.
“린린. 이런 건 말이야.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가문을 위해서 진정으로 희생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거지.”
“그건 아니라고 본다. 아종아. 이건 아진이의 측근이라 얻을 수 있는 거였지.”
서종욱이 정확하게 지적하자 도종이 고개를 숙였다.
“제 편은 아무도 없네요.”
밖에서는 권위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통솔하며 위험한 시술도 성공하는 도종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마냥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