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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55화 (55/470)

제55화

55화

“아진아. 이 스승 얼굴이 기억이 나기는 하는 것이냐.”

“네. 스승님.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아진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하자 북리의천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이 스승은 잘 지냈다. 너는 어땠느냐. 당장 검술을 확인하고 싶구나. 어서 안으로 들자. 아마 가주님도 가주전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실 거다. 아진이 네가 왔다는 말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형님. 저도 왔는데 저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내 눈에 아우가 보이지 않을 리가 있나. 다만 내 제자 옆에 서 있으면 관심이 십 분지 일도 안 가는 게 사실이네.”

북리의천의 얼굴을 보며 두 사람은 모두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일각쯤이 지난 후, 북리의천은 더 이상 그렇게 웃지 못했다.

서종욱의 부탁으로 북리세가의 수장들이 모두 모였고 독고소영도 북리의천의 곁을 지켰다.

그들은 젊은 서생 같은 서종욱이 수많은 고수에게 둘러싸이고도 전혀 기가 눌리지 않은 채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한편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하고 큰 맹수들의 싸움은 결코 그 맹수들만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던 작은 짐승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그보다 더 작은 짐승들은 누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밟혀서 목숨을 잃게 되지요. 저는 형님과 북리세가가 큰 결단을 내려 이 싸움을 시작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북리의천은 서종욱의 말에 당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할 말이 그렇게 꽉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희가 그날의 일을 아느냐고 소리를 높일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하필, 그 자리에서 조용조용히 말을 이어 가는 사람이 서종욱이었다.

아내의 배 속에 있던 딸을 잃을 뻔했고 자신과 큰아들의 손목을 잃었던 그 서종욱이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북리의천을 더욱 머뭇거리게 한 것은 그 옆에 앉아 있는 아진이었다.

북리의천은 자기가 아진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아진이라면 전쟁을 막을 것 같지 않았다.

“아진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북리의천이 어린 아진에게 생각을 물었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북리의천이 아진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며 철저하게 믿고 있는지를 알아서이기도 했고 그들 스스로가 아진을 곁에서 보며 아진의 믿기지 않는 무공을 알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예. 스승님.”

“왜인지 말을 해 보겠느냐.”

“예. 스승님. 만약 전쟁이 일어나고 북리세가와 독고세가에서 출전을 한다면 산본의가에서도 의원과 의생, 의녀들을 파견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님이나 형님, 아니면 저도 그곳에 가야겠지요. 저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주셨던 여러 무사님이 다치고 죽어 가는 것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가고 싶지 않고 아버님이나 형님께 저 대신 전쟁에 나가 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마냥 해맑고 천진하게 웃던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느덧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아진은 또박또박 말을 했다.

“그것은 왜냐. 아진아.”

“저희에게는 린린도 있고 의가의 가솔들도 있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이 모두 소중합니다. 바람이 불면 저희는 그 바람이 부는 대로 같이 휘겠지만 이제는 린린을 위해서 그 바람을 멈추고 싶습니다. 그 바람을 일으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진의 말은 조용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아진이 신의를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항전의 결심이 투철했던 무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 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서종욱이 말을 이었다.

“지금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손도, 그리고 그 바람을 멈출 수 있는 손도 모두 북리세가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짐승들의 삶도 소중하다고 생각해 주시고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 잊으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결단코 응징하십시오. 다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만약 서종욱이 아닌 다른 이가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면 성질 급한 무사들 몇 명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면서 지금 본가를 능멸한 것이냐고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서종욱과 아진 앞에서 그들은 순한 강아지처럼 눈을 내리떴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협상력을 높였다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던져야 하는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린린에 대해 말하는 아진을 보며 사람들은 그 말에 조금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이윽고 가주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리의천을 향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내 제자가 하는 말을 아주 잘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지었다.

벼락같이 달려나가려 하다가 옷자락을 붙잡힌 것처럼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장들도, 대주들도, 그리고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커져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내 발아래에서 작은 동물들이 죽는 것을 몰랐구나. 앞으로는 발밑을 더 세심하게 살펴야겠어.”

가주가 말하자 아진의 얼굴도 비로소 밝아졌다.

서종욱 역시 환하게 웃으며 가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말씀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신의님. 신의님이 본가의 무인들을 살리신 겁니다. 신의란 그런 것인가 보군요. 다친 후에 고치는 것도 능력이지만 다치지 않도록 중재하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겠습니다.”

가주가 그렇게까지 말을 해 주자 서종욱은 고마워하며 자리를 갈무리했다.

북리의천과 세가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며칠이라도 머물다 가라고 했지만 서종욱은 미안해하며 곧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고 북리의천은 그들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북리의천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라서 서종욱과 아진이 말을 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그때까지 밝은 얼굴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북리의천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개인적인 자리를 마련하자 이제 더 이상은 숨길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한 듯 조용해졌다.

북리의천은 지금 한가하게 차나 권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가 말하겠나. 자네인가. 아니면 아진이냐.”

북리의천은 확신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들이 아직 뭔가 말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서종욱이 낮게 한숨을 쉬고 그를 바라보았다.

“린린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형님.”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혹시 린린에게 병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북리의천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오랜 세월 동안 병마와 싸워야 했던 그였기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는데 린린 그 어린 것이 병을 갖고 태어났다는 말인가 해서 잠시 동안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슨 병인데 그러는가. 그리고…… 아진이라면 고치지 못할 병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라면. 두 사람이 있는데 왜 고치지 못하고…….”

그는 말을 하면서 자기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안 했겠는가.

자기가 아무리 린린을 걱정한다고 아버지와 오라비가 걱정하는 것만큼 할 수 있을까.

백방으로 방법을 알아보고도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데 대체 무슨 병이기에 그러는 건가.”

“구음절맥입니다.”

침통한 표정의 서종욱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린린에게 그런 시련이 주어진다는 말인가……!”

두 사람에 비해 의술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북리의천도 구음절맥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음기가 강한 여자의 혈맥이 막혀 음기가 빠져나가지 못해서, 빨리 치료를 하지 못하면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병이 왜 하필 린린을 찾아온 것인지.

구음절맥을 다스리는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영약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영약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문제를 차치하고 영약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강한 음기를 강한 양기로 누르는 것이라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극음의 기운으로 인한 병증은 완화되는 것 같아도 마침내 균형이 깨지고 몸이 버티지 못해 시기에 차이만 있을 뿐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북리의천이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의 어깨가 떨려왔다.

새로운 검제라 칭송받는, 작금의 무림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고 일컬어지는 그가 린린의 소식에 무너지며 슬픔에 잠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아. 어떻게 된 것이냐. 안 되더냐. 네 능력으로도 안 되더냐…….”

북리의천은 결국 아진에게 물었다.

“예. 스승님. 되지 않습니다. 왜 안 되는 것인지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진이 특이한 능력으로 모든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지 못했다면 구음절맥을 왜 고치지 못하냐고 묻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을 테지만, 지금껏 아진이 보여준 능력이 워낙 절대적이고 완벽했기에 북리의천은 미련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스승님. 린린도 버텨 내고 있는데 제가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나도 그럴 것이다. 나도 린린을 고치기 위해서 방법을 알아볼 것이다. 영약이 필요하면 영약을 구할 것이고 구음절맥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천금이 들더라도 모실 것이다. 그러니 아진아. 너도 포기하지 말고 버텨 주거라. 이보게, 신의. 용기 잃지 말게. 우리가 다 같이 힘을 모은다면 왜 못 고치겠는가.”

“예. 형님. 그러겠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어느 순간 적막감이 감돌았지만 누구 하나 쉽게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 * *

천응문주 악산철은 무림맹 우군사와 함께 전국 각지의 지부에서 불러들인 의원과 의생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군사는 상황이 마침내 이렇게까지 치달았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악산철은 우군사가 자신의 희생과 업적을 칭찬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시일이 촉박하여 충분히 모을 수 있을까 저어했으나 충분한 수가 모여들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모두가 뛰어난 인재들이니 전장에서 부상하는 무인들을 적시에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군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칭찬의 말을 건넬 여유는 없었다.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하더라도 이번에 가문의 병력을 내보낸 이들은 불가피하게 전력 손실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때 손을 뗐어야 했다. 남궁세가가 제선문과 손이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살점을 떼 내는 고통이 느껴지더라도 그때 잘라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한 결과 너무 뼈아픈 일이 벌어졌다.

남궁세가는 좋지 않은 전례를 남겼다.

징계를 해야 할 일을 벌이고도 무림맹의 소속 가문들은 남궁세가와 자신들을 왜 차등을 두는가 하며 반발하곤 했다.

“우군사께서 말씀하신 수의 두 배입니다. 이렇게 의원의 수가 많으면 혹시 밀린다고 하더라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맙소. 역시 중원 제일의 의문답소. 천응문이 우리와 함께해 주어 이번 전쟁의 명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오.”

우군사는 별수 없다는 듯 칭찬을 해 주었고 문주는 거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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