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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54화 (54/470)

제54화

54화

서종욱은 의문을 세우는 데 뜻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산본의문의 문주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다고 생활이 변한 것은 대단치 않았다.

여전히 비룡채는 약초를 캐왔고 혈천방은 산본의가를 도왔으며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산본의가를 철저히 지켰다.

가장 크게 변한 사람은 아진이었는데 이제는 여간해서 진료소나 의방에는 가려고 하지도 않고 아기에게 딱 붙어서 시간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다.

“린린. 너는 정말 신기한 것 같아. 일반적으로 얼굴이 이렇게 생기면 아무리 아기라고 해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너는 안 그렇거든. 객관적으로 말을 하자면 네 얼굴은 정말 웃기게 생겼는데 너무 귀여워. 너만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와.”

아진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아기 침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것이 누가 옹알이를 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리고 네가 대단한 이유는 또 하나 있어. 아까도 북리세가에서 사람이 왔거든. 스승님이 나에게 언제 돌아오냐고 물으셨는데 아마 나는 이제 안 갈 것 같아. 무공은 충분히 배웠고 이제부터는 나 혼자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할 것 같거든. 그리고 이제 이 형님이 지켜 줘야 할 동생도, 아. 오라버니지.”

린린의 얼굴을 집중해서 바라보다 보면 자꾸만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린린은 또랑또랑하게 눈을 빛내고 아진을 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구슬을 꼭 잡고, 이가 나오지 않은 잇몸으로 앙 물기도 하고 혀로 핥기도 했는데 요즘 구슬은 내내 그런 신세였다.

침이 하도 묻어서 늘 윤기가 주르르 흐르면서 반짝거렸다.

“린린. 그런데 말이야. 이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은 얘긴데 이 형님, 아니, 오라버니한테는 비밀이 한 가지 있어. 너한테 말해 줄까?”

“부아아아.”

린린이 입술을 부르르르 떨면서 침을 튀겼다.

“아. 좀. 이런 것 좀 하지 마. 이러면 누가 너를 데려가겠냐? 네 지참금을 벌려면 오라버니가 허리가 휘겠다. 여자가 지참금 가져가는 거 맞지? 남자가 가져가나? 모르겠다.”

그래도 린린은 사회의 관습에 상관없이 린린이 돈을 싸 들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없어서 시집을 못 가고 평생 자기와 살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짜 신기하다니까?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안 예쁜 구석도 하나도 없는 게 말이야.”

아진이 참지 못하고 린린의 볼때기를 주욱 잡아 늘이자 린린이 울까 말까 고민되는 듯 아진을 노려보았다.

“진짜 찰진 반죽 같네. 아 참. 그래서 말이야. 오라버니는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야. 원래는 다른 곳에서 살았어. 거기에는 괴수가 나오고, 아. 그 전에 게이트가 나왔다는 얘기부터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 여러 등급의 헌터가 있고 오라버니는 그중에 가장 높은 헌터였지. 자그마치 SSS급 헌터야.”

아진이 말을 하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창 바쁠 때라 건물 안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아진도 바빠야 했지만 린린과 놀려고 꾀병을 부렸다.

다들 아진이 꾀병을 부린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작은 오라버니가 막내를 챙기고 싶은가 보다, 라며 흔쾌히 속아 주었다.

“이 오라버니는 말이야. 딜러였어. 그리고 힐러였지. 딜러가 뭐냐면 말이야.”

아진은 뜻도 알아듣지도 못할 린린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림으로 온 이후 그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스승인 북리의천에게는 먼저 말을 해 볼까 하기도 했지만 결국 매번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비밀을 가진 사람이 돼 보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진 딴에는 스승과의 사이에 비밀이 남아 있지 않기 바라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만 북리의천은 아진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런 결론밖에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하면 쉬웠다.

북리의천이 갑자기 아진에게 자기는 사실 이 대륙 사람이 아니고 이 시대 사람도 아니라고 말을 한다면 아진 자신도…….

‘믿을 수는 있으려나?’

어쨌건 아진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처음에 헌터가 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헌터 연구소의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얼마나 설렜는지.

“와. 그 일은 정말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정말 창피해서. 그 사람들은 얼마나 웃겼을까? 내 표정을 다 봤을 텐데. ‘너는 낙제했다’라는 말을 하려고 왔는데 ‘저 수석인가요, 차석인가요?’ 하고 물은 거나 다름이 없었던 거잖아.”

그러나 아진은 결국 웃었다.

결국 웃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진은 이제 알고 있었다.

“린린. 그런데 이 오라버니는 말이야.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텼어. 대단한 사명감으로 그런 건 아니고 나도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알고 싶었거든. 그리고 오라버니가 최고라는 걸 알게 된 거지. 최고라는 걸 알게 됐을 때도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더라.”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아진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아진은 완벽하게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린린. 사람들은 오라버니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데 말이야. 오라버니는 사실 아주 강해. 정말로 강해.”

린린이 침을 튀기면서 웃었다.

하필 아진이 그 말을 할 때 웃는 바람에 놀리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아진은 잘 웃지 않는 동생이 웃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린린.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뭐든 말해. 오라버니는 언제나 린린의 편이니까.”

린린은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내면서 구슬을 침 범벅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린린이 보일 수 있는 가장 경청하는 자세가 아닐까 했다.

* * *

“꾀병은 다 나았냐?”

아진이 밖으로 나가자 도종이 말했다.

“어. 형님. 들어갔다 나오면 줄 좀 줄어 있을 줄 알았더니 그대로네?”

“그대로긴?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어. 백 명도 더 봤구만.”

도종이 말하며 처방전을 적어 주자 의녀가 환자를 데리고 나가며 설명을 해 주었다.

“비룡채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비룡채 아저씨들이 새 약초를 캐와서 이번에도 약초를 바꿨더니 환자들 반응이 좋더라. 전보다 효과가 더 빨리 나타난대.”

“다행이네.”

아진은 도종이 촉진을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종도 아진이 자기 손을 본다는 걸 알았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왜 이렇게 예쁜 손을 붙여놨냐?”

“아니. 예뻐도 뭐라고 하네?”

“고마워서 그러지.”

“다른 사람들은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을 하던데.”

아진은 도종에게 말대답을 하면서 웃었다.

하마터면 이런 좋은 형님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남궁세가에 대한 울분이 다시 치솟곤 했다.

그래도 지나간 일은 웬만하면 잊으려고 했다.

시신을 꺼내서 다시 죽일 수도 없는 일이고.

이제 아진에게는 의가 사람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린린 그 어린 것이 기특하게도 죽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살아 주었으니 이제 가족을 지키는 것은 자기가 할 거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아진아. 너는 스승님께 안 돌아가?”

도종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을 물었다.

도종은 아진이 그곳에 있는 게 너무 좋아서, 혹시 이제 곧 갈 거라는 말을 듣게 되면 서운할 것 같아서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한 번 정도 묻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도종이 묻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귀를 열었다.

“응. 안 돌아가. 내가 있을 곳은 여기야. 전에도 내가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겼잖아. 무공을 배우고 싶었는데 이제 배웠어. 그러니까 안 가도 돼.”

“야. 몇 달이나 있었다고 그래? 무공을 배우는 건 끝이 없는 건데. 평생 수련을 해도 검의 끝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잖아.”

도종이 아는 척을 하며 말했지만 아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도종의 말도 맞는 말이지만 아진은 이미 답을 찾았기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지막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은데.”

“지금은 북리세가도 많이 바쁘고 하니까 나중에 시간이 되면 찾아 뵈어야지.”

“그래. 많이 생각하고 하는 말이겠지.”

도종이 아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린 형님이 그사이에 부쩍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강한 사람은 도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헌터였던 서도진에게는 죽음을 목도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도종은 그렇지 않았다.

액면가 그대로 일곱 살, 이제 한 살을 더 먹어서 여덟 살짜리 아이일 뿐인데 그 끔찍한 일들을 모두 겪어 내고 버텨내며 몰라보게 성장했던 것이다.

도종은 아진을 보고 어린애답게 씩 웃고 다시 환자를 불렀다.

* * *

강호에 혈풍이 불어닥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들을 중재한 사람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산북의문의 문주였다.

북리세가는 남궁세가의 잘못을 징치하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갔던 일로 인해서 산본의가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잊지 않았고, 남궁세가를 지지했던 무림의 무가들까지 적으로 돌린 채 대격전을 치르려 했다.

북리세가의 사기는 대단했고 독고세가도 뜻을 같이했다.

구파일방은 그것이 무가들의 일이라면서 거리를 두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북리세가에 도움이 되었다.

북리의천이 검제가 되어 돌아왔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상황이었다.

정파의 명문 무가들은 이대로 그냥 놔두면 북리세가와 독고세가가 득세하는 새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생각하며 자기들끼리 은밀한 화합을 이어 나갔다.

북리세가에서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만약 격전이 벌어지기 전, 이제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남자와 여섯 살 난 어린아이가 북리세가를 찾지 않았다면 강호에 피바람이 부는 것은 아무도 막지 못했을 터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북리세가의 위사들은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신의님. 의원님!”

위사들은 왜 이제 왔느냐는 원망까지 담아 그들을 부르며 한달음에 달려가 예를 갖추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찾아오지도 않으시고. 혹시 본가에 서운한 일이라도 있었나 했습니다.”

위사들이 환한 얼굴로 반기자 서종욱과 아진은 덩달아 웃었다.

“이렇게 반겨 주어서 고맙습니다. 형님은 안에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신의님. 신의님과 의원님이 오셨다는 것을 아시면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위사들이 말하는 동안 한 사람은 벌써 경공을 펼쳐 안으로 들어갔다.

서종욱이 안으로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북리의천이 달려왔다.

내공도 갈무리가 되지 않은 듯, 격정적으로 반가워하는 북리의천을 보며 서종욱과 아진은 동시에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무정한 사람들을 봤나. 다시는 두 사람을 보지 않으려 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와 달라고 청한 게 몇 번이냔 말이네.”

북리의천은 칭얼거리듯 말했다.

정말로 이만저만 서운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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