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53화
마침내 북리의천이 돌아왔다.
그의 곁에는 서종욱과 도종이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가모에게 간 사이 사람들은 북리의천이 안고 있는 시신을 이상하다는 듯이 보았다.
어린아이의 시신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세가에서의 격전이 끔찍했나보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이의 시신을 가져온 이유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천…… 이 아이는 누구야?”
조용히 다가간 독고소영이 묻자 북리의천이 남궁세가에서의 일을 간단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기묘해졌다.
“그럼…… 아진이 가주를 죽였다는 말이야, 의천?”
“그런 것 같아.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어. 나는 신의와 도종을 돌보느라고.”
“의천…… 두 사람을 아진에게 맡기고 의천이 가주와 싸웠어야지. 아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런 거야?”
독고소영은 그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말했다.
북리의천도 설명을 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아진이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맡기고 갈 때까지만 해도 뭘 하러 가는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결국 독고소영만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서 남궁세가에서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독고소영은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나도 몰라. 가주가 있던 자리에 창천십이대도 있었는데 그자들도 전부 다 처치한 것 같아.”
“아진이?”
“응.”
독고소영은 더 물으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진이 대단한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입을 열면 말도 안 된다는 말만 나올 것 같았던 것이다.
어느 정도 독고소영에게 설명을 해 놓고 북리의천은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이 아이는 좋은 곳에 잘 묻어 주었으면 하네.”
북리의천이 말하자 독고세가의 무인 몇이 아이의 시신을 데리고 나갔다.
아진은 밖으로 나와 북리의천에게 인사를 올리고 북리세가 무인들을 찾아냈다.
어머니를 치료한 후 가장 급한 사람들은 그들이었다.
비룡채 사람들이 약초를 붙여주어 어느 정도 응급처치는 되어 있었지만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고 앞으로 검을 들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서종욱과 도종도 자리를 잡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북리의천과 아진은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두 사람이 치료하는 모습을 보았다.
서종욱은 조금씩 어색한 것처럼 팔을 크게 빙글빙글 돌리는 일이 있었지만 도종은 그런 것도 없이 치료를 해 나갔다.
서종욱도 나중에는 적응을 해 나가는 것 같았고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큰 고초를 겪었을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치료를 해 주는 것에 고마워했다.
아진은 그들 각자에게 마나를 불어넣어 주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지금 특별한 방법으로 치료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고 산본의가에 닥친 이 비극은 곧 사라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혈풍은 남궁세가로 옮겨져 이제는 그들이 세가에 불어온 불을 어떻게 끌지 허둥댈 터였다.
이제 정파 무림의 축이 요동하게 될 거라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다.
나중에 북리의천에게서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독고세가와 북리세가 무인들의 표정은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협. 조용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는가 해서 말입니다.”
“남궁세가라서 그렇겠지. 안휘성의 패자로 그곳에서는 황제 폐하보다 더한 삶을 살던 그들이네. 강호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우러름을 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들의 명예가 실추됐다고 느꼈을 거네.”
북리의천의 말에 모두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들 중에는 두려운 시선으로 북리의천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다못해 다른 무력대라도 대동하고 간 것도 아니고 거의 단신으로 남궁세가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죽이고 돌아온 북리의천.
북리의천은 아진이 거의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생각을 하려고 해도 그 말은 쉽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북리의천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변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제 누가 북리세가를 막을 것인가. 남궁세가가 없는 곳에서 북리세가가 강호의 주인이 되겠구나.’
독고세가 무인들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강호에 불어닥칠 맹렬한 강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냥 그들이 있는 곳에 그대로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마음이 움직여 그곳으로 왔는데 어느덧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아진이 북리의천을 찾아왔다.
“남궁세가에 다녀오고 싶어요. 스승님.”
“그래. 가자.”
복수를 하고 싶을 거라는 것을 북리의천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전부 끝을 내 버렸어야 했을 텐데 가모가 걱정돼서 남궁세가의 잔당을 남겨두고 온 것이 북리의천도 못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아진은 조용히 말한다고 했는데 독고소영이 그들의 은밀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다가왔다.
“이번에는 나도 가. 수신호위는 놓고 다니는 게 아니야.”
어차피 지금은 독고세가의 무인들도 와 있겠다.
북리세가의 무인들도 다 나았겠다, 독고소영을 두고 갈 이유도 없었다.
“네. 사고님. 같이 가주세요.”
세 사람이 조용히 산본의가를 빠져나갔고 그 시각, 황궁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호의 큰 별들이 한꺼번에 떨어지고 무림의 주인이 쓰러지다니. 남궁세가가 져 버린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기사로다. 기사로다.”
* * *
까만 머리카락이 동그란 머리에 듬성듬성 성의 없이 돋아나 있었다.
숯덩이 같은 눈썹은 새카만 데다 숱이 많았다.
“조금만 머리 쪽으로 가 줘도 좋았을 텐데. 그러면 균형이 맞았을 텐데.”
아진은 아기의 눈썹을 보면서 말했다.
눈썹은 끝으로 갈수록 조금 올라가 있어서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때 보면 신기하게도 꼬리가 내려와 있었다.
“아부, 바바바…….”
커다란 눈은 어찌나 맑게 빛나는지 아진의 얼굴이 다 비쳤다.
아진은 손을 들어 어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하다가 자신의 손을 보았다.
‘내가 손을 씻고 왔던가?’
기억에 자신이 없어서 다시 손을 씻으려고 밖으로 달려가는데 아버지와 도종이 경쟁이라도 하듯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형님. 손 씻었어요? 아기는 손 씻고 만져야 해요.”
“그래. 씻었다. 그런데 도종이 너는 안 씻지느냐?”
“아앗.”
도종은 들어오다 말고 몸을 돌려 내달렸다.
“아아앗!”
저러면 형이 더 빨리 오겠다고 생각하며 아진도 서둘렀다.
가면서 구슬을 향해 소리쳤다.
“너! 내 동생 건드리면 죽어!”
구슬은 억울한 듯했다.
자기 꼴을 보라는 듯이.
지금 누가 누구를 건드리고 있냐는 것 같았다.
구슬은 처음에 봤을 때 비해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아기의 얼굴만큼 커져 버렸다.
아기가 태어나고 구슬은 아기 주변을 맴돌았다.
구슬의 실체를 알고 있는 아진에게는 그게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구슬을 다른 곳에 두고 와도 졸졸 따라왔다.
아기 근처에 가면 깨 버릴 거라고 했더니 소심하게 아기 침상 주변을 규칙적으로 계속 굴러다녔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어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것 좀 내다 버리면 안 되겠냐고 했는데 그래 봤자 다시 굴러들어왔다.
아진은 구슬이 음습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구슬이 아기의 눈앞에 둥실 떠올랐을 때 아기가 두 손을 펼쳐 구슬을 잡았다.
“안 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아진은 겁이 나서 말했지만 이미 구슬은 아기의 혀에 닿아 있었다.
구슬이 처음처럼 작았다면 목구멍 속으로 쏙 넘어 가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압아아압아아아…….”
아기는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구슬을 핥았다.
구슬 주위에는 아기의 침이 묻어서 흥건히 고였다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구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거라고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그랬다.
그리고 그때부터 구슬은 계속 그런 처지였다.
손을 씻으러 가는 동안 도종이 의기양양하게 아기방으로 달려갔다.
아진은 자기도 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손을 씻고 돌아갔다.
아버지가 벌써 아기를 안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고 도종은 그 옆에서 자기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진도 두 손을 꼭 모으고 너무나 예쁘고 장군처럼 의젓하게 생긴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여. 동. 생.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들 모두는 떡두꺼비 같은 남동생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기가 셋 중에 가장 우람하게 태어났다고 말했다.
서이린.
그래서 린린.
린린은 혼자서 접시 하나를 넉넉히 채우는 커다란 만두같이 생겼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애교 없던 온 가족이 린린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린린은 귀찮은 표정만 지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린린. 이제 오라버니한테 와 보자.”
아진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건 도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 새치기하려고 하지 마라? 나는 지금까지 이 시간만 기다리면서 일했어. 아버지가 환자 서른 명은 진료를 해야 갈 수 있다고 하셔서 변소도 안 가고 진료만 했다고.”
“그런 건 하나도 안 궁금해. 아버지. 이제 저도 좀 주세요. 린린이 불편해하는 것 같잖아요.”
아진이 방방 뛰며 말했지만 아버지는 더욱 높이 들어 올려서 린린을 꼭 안았다.
“정말 귀여워. 어쩌면 이렇게 예쁘지?”
아버지는 말을 하다가 이제 환자들에게 돌아가 봐야 한다고 생각한 듯 도종에게 린린을 넘겼다.
린린을 넘겨 주고 넘겨받는 두 사람의 손에 아진의 시선이 닿았다.
두 사람도 아진이 자기들의 손을 보는 것을 알아차린 듯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팔이 새롭게 이식됐었다는 사실을 자주 잊었다.
만약 처음에 잘려나간 대로 손목만 이식했다면 그 부위가 자주 눈에 띄었을 텐데 어깨 아래부터 전부 이식을 한 탓에 그 부위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자. 그럼 나가서 또 진료를 해 보자. 이번에도 오십 명만 보고 와야겠어.”
그것은 희한한 결과를 초래했다.
두 사람이 진료를 보는 시간이 점점 단축되었던 것이다.
시침만 해도 그랬다.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언제 침을 놨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시침이 끝났다.
린린을 보러 가려고 서둘러서 그런 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충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갈수록 속도가 늘었다.
의원 하명준이나 북리소은도 이제 상당히 실력이 숙달됐는데 서종욱이나 도종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침을 여러 군데에 많이 놓는 것도 아니고 어느 때에는 한 개, 많이 놓는다고 해 봐야 네 개 이하로 놓았는데 진료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만족하며 돌아갔고 산본의가에 대한 입소문은 더욱 번졌다.
제선문 산본지부가 사라지면서 멀리에서도 환자들이 모여들었고 산본의가는 나날이 번성했다.
의학당에서 배출한 의원들은 산본의가에만 두지 않고 근처에서 개인 의료원을 낼 수 있게 했는데 그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가까운 곳에서 진료를 받거나 산본의가에 와서 진료를 받았다.
의원들은 산본의가 의학당에서 과정을 수료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산본의가와 의학당을 산본의문이라 부르며 제선문의 뒤를 잇는 새로운 의문처럼 대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