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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52화 (52/470)
  • 제52화

    52화

    “아진아. 다 됐으면 이제 가는 건 어떨까?”

    “네. 아버지.”

    도종은 손가락을 마구 움직이면서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자연스럽게 움직여. 손목이 잘렸을 때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해서.”

    아진은 도종을 안아주었다.

    “포기하지 마. 형님. 항상 기다려. 내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려. 알았지?”

    “그래. 아진아.”

    결국 도종도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서두르자.”

    북리의천이 말하고 어린 시신을 들었다.

    “고마운 공자니까 이 공자의 시신은 좋은 자리에 묻어 줘야지.”

    세가에 들어올 때는 아진과 북리의천뿐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서종욱과 도종까지 지켜가면서 나가는 거라 그 길이 만만치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저항이 거의 없었다.

    이미 패배의 기운이 짙게 깔려 있었고 세가가 입은 타격이 너무 커서 남은 사람들은 괜히 목숨을 던지느니 가문의 훗날을 기약하자고 마음을 먹은 듯했다.

    북리의천은 그래도 방심하지 않은 채 산본의가의 남자들을 지키며 걸었다.

    서종욱과 도종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손이…….”

    두 사람이 지나갈 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북리의천은 산본의가의 가모만 아니었다면 이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도륙하고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승님. 제가 먼저 어머니에게 갈게요.”

    아진은 마음이 급해서 북리의천에게 말했고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을 보냈다.

    다행히 아직 마나는 남아 있었다.

    ‘어머니. 조금만요.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간절하게 애원하던 아진의 신형이 허공에서 빛살처럼 사라졌다.

    * * *

    산본의가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환자가 아닌 사람들로 산본의가가 이렇게 넘쳐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독고소영이 보낸 전서구를 받고 온 독고세가의 무인은 자그마치 스무 명이 넘었다.

    무가에서 그만한 병력을 차출해서 보내 주었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위험을 크게 감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고세가의 무인들은 산본의가에 도착하자마자 북리세가 무인들의 빈 자리를 채워주었다.

    그들이 때맞춰 오지 않았다면 북리세가의 무인 중 대부분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뼛속까지 무인이었고 그런 자리에서 자기들이 지켜야 할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크게 다치고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의가의 다른 이들을 먼저 보살핀 탓에 그들의 상태는 점점 악화하고 있었는데 독고세가에서 와주어 그들도 누워서 안정을 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의원과 의생, 의녀 할 것 없이 큰 고초를 겪었고 당장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북리소은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북리소은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그곳을 습격해 왔을 때 가장 먼저 도망쳤다.

    남들은 그 모습을 보고 비난하고 조롱했을지 몰라도 그녀는 자신이 무사해야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몇몇 사람들에게도 숨으라고 말한 덕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떠난 후,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이들이 몇 명 정도는 있었다.

    북리소은은 누구보다 가모의 치료에 매달렸다.

    하혈은 멈추지 않았고 가모는 가주와 도종이 끌려간 것 때문에 충격이 큰 상태였다.

    “소은 소저.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는 무사한 거죠?”

    푹 꺼진 것 같은 배를 안고 그렇게 말하는 가모를 바라볼 용기가 차마 없어서 북리소은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자신이 침묵하면 가모가 불안해할 거라는 생각으로 이내 표정을 밝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가모님. 걱정하실 것 없어요.”

    소은은 약초가 효과를 발휘하기를 바라며 가모를 지켜보았다.

    혈천방과 비룡채 사람들은 독고세가의 무인들이 오기 전부터 자리를 지켰다.

    남궁세가가 산본의가를 친 것은 경고의 의미가 강했다.

    가모의 배를 때려 가주의 아이를 위험하게 하고 가주와 대공자를 끌고 갔다는 것은 산본의가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미일 터였다.

    지금 시점에 산본의가를 돕는 것은 남궁세가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곧 죽음을 각오한다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산본의가로 향했다.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나 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걸음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쓰러진 의가의 식솔들을 봤을 때는 울분이 치솟았다.

    그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다친 사람들을 병상으로 옮기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약초를 개어 상처에 발라 주었다.

    그나마 약초에 대해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은 미약하나마 힘을 보탰다.

    산본의가가 이대로 사라지게 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끌려간 가주와 대공자는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없을 듯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잔해 속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찾아내고, 못 쓰게 된 것들은 모아서 정리를 하며 다음 날을 준비했다.

    아진이 돌아온 것은 그들이 치료와 복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안으로 들어오는 아진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막도였다.

    “고, 고…… 공자님……!”

    아진은 막도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어깨에서 팔을 뽑아내느라 피를 뒤집어썼고 그 피가 지금도 옷을 적신 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공자님. 대체…… 대체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신 겁니까! 그놈들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어린 공자님에게……!”

    눈물을 흩뿌리는 막도의 손을 떼어 내면서 아진이 웃었다.

    “제 피 아니에요. 아저씨. 아버지와 형님도 오고 계세요. 스승님도 오실 거고요. 여기에서 지켜 주셔서 고마워요. 아저씨. 저는 먼저 어머니를 뵐게요.”

    아진은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북리세가와 독고세가의 무인들도, 혈천방과 비룡채의 사람들도 모두 고마웠다.

    최대한 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눈이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내원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소리를 듣고 독고소영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진아……!”

    그녀 역시 그것이 아진의 피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러고도 놀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고님.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아진아.”

    독고소영은 아진을 붙잡지 않았다.

    그에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아진은 어머니를 찾아갔다.

    몇 번이나 심호흡하고,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효과는 없는 듯했다.

    아진은 자신의 옷 때문에 어머니가 놀랄 것 같아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먼저 보자는 생각에 서둘렀다.

    “어머니.”

    “아진아. 아가야……!”

    아진을 본 가모는 설움이 북받쳐 오열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랑 형님이 스승님이랑 같이 오고 계세요.”

    아진은 그 말을 반복하며 어떻게든 안심을 시키려 애썼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말을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모든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버린 것처럼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아진아. 괜찮은 거야?”

    소은은 아진이 걱정스러워 물었고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상태가 어떤지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자기가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마나를 사용해 치료하는 모습을 소은의 앞에서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남궁세가의 공격을 당하고 가주까지 끌려간 마당에 이 자리에 남아서 어머니를 치료해 준 소은에게는 아무것도 감출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동생아. 형님이다. 너무 늦었다고는 하지 마라. 그동안 왜 안 왔냐고 하는 건 이해하겠고 사과도 하겠는데 너무 늦었다고는 하지 마라. 그 말만은 하지 마라. 너무 늦어 버렸다는 말만은…….’

    아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머니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숨이 막힐 것처럼 고통스럽고 긴장이 됐다.

    제발 아이의 맥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덜덜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어 만져 봤지만 어떤 반응도 잡히지 않았다.

    “…….”

    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괴로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살점이 뭉텅이로 잘려나가고 심장이 뿌리뽑혀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진아. 힘내야 해. 네가 그러면 안 돼.”

    북리소은이 옆에서 그를 다독였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어머니의 앞에서 자기가 그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네. 누님.”

    아진은 자신의 고통을 접어 두려 했다.

    지금은 제 상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죽은 사람도 살려냈지만 아직 사람의 형체를 다 이루지 않은 태아에게는 그것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미안하다…….’

    아진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어머니의 몸으로 마나가 흘러 들어갔고 그녀는 조금씩 안정이 되는 듯했다.

    안심환을 먹이고 상처에 약초를 붙이고 시침을 하는 것은 이미 소은이 전부 해 놓은 상태라 아진은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누님.”

    아진이 치료를 하면서 다시 말하자 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생길 거라고 이제 자기가 형님이 될 거라며 좋아하던 아진의 모습이 선했다.

    아진은 이제 어머니의 몸을 낫게 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아주 미약한 맥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

    아진은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하면서 기운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기가 오해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을 때 아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놀라고 감격했다.

    “누님…… 누님!”

    아진이 소은을 불렀을 때 그녀는 아진이 왜 그러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진…… 아. 왜?”

    “맥이, 맥이!”

    아진의 목소리에 어머니가 깼을 정도였다.

    소은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왜 그래. 아진아?”

    “누님. 아기가…… 아기가 살아 있어요. 아기 맥이 잡혀요. 누님도 만져봐요.”

    아진의 말에 소은은 놀라며 그를 보았다.

    없는 것이 느껴진다니.

    충격이 너무 커서 이 어린 것이 드디어 실성을 해 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소은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진은 소은의 손을 가져다 태아의 맥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져다 댔다.

    눈물을 흘리던 소은의 눈이 점점 커졌다.

    “……?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분명히 아무 느낌이 나지 않았는데?”

    “저도 그랬었는데 이 녀석이…… 이 녀석이 우리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한 모양이에요…….”

    아진은 감격에 겨워, 그리고 버텨 준 동생에게 너무 고마워서 엉엉 울었다.

    “아진아?”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야 아진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런 건지도 알 수 있었기에 원망은 없었다.

    오히려 고마웠다.

    아직 어리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먼저 살폈다는 생각 때문에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아진아. 아이는…… 괜찮은 거지?”

    “네. 어머니. 돌아왔어요. 살아났어요. 살아났어요. 어머니!”

    “고맙다. 아진아. 고마워요. 소은 소저.”

    북리소은은 눈물을 흘리느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맙다. 동생아. 정말 고맙다. 앞으로 이 형님이 정말 잘 할게. 정말. 아주 잘 할 거야.”

    아진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몇 번이나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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