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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51화 (51/470)
  • 제51화

    51화

    아진은 가주의 손을 붙잡았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창천십이대도 어느새 그에게 제압되어 있었다.

    허공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던 손이 창천십이대의 혈을 짚고 그들을 쓰러뜨려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상태였다.

    그래도 아직 의식은 있는 상태였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궁세가에는 북리의천보다 뛰어난 고수가 여섯 명은 더 되었다.

    다른 이들도 합격을 한다고 하면 얼마든지 북리의천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속절없이 쓰러져 있었다.

    북리의천도 아니고 그의 나이 어린 제자에 의해서.

    북리세가와 독고세가가 연합을 해서 두 무가의 모든 무인이 쳐들어왔다면 모를까 이건 어떻게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뇌기가 줄기줄기 일어나 그들 각자의 몸으로 파고들었다는 거였다.

    열두 명의 몸을 동시에 노리면서 그 강도도 정확히 조절한 듯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들을 제압한 후에 아진이 하는 짓이었다.

    그는 그들의 손을 잡아 손바닥과 손등을 뒤집어 보며 일일이 살폈다.

    손을 살펴보고는 짜증이 나는 것처럼 손을 던지듯 놔 버렸는데 그러던 아진의 눈이 한 사람의 앞에서 빛났다.

    “좋은 손이네.”

    그러면서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을 잡고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걸 쓸모 있게 만들어줄게.”

    “……!”

    쓰러져 있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다가오지 말라고, 저리 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이미 그의 목구멍은 터져나갈 것처럼 비명으로 가득 찼는데도 그랬다.

    우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즈거어어억-.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렇게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 여기까지는 피부에 흠이 생기면 안 되는 거지?”

    아진은 혼잣말을 하더니 품을 뒤져 칼을 꺼냈다.

    북리세가의 야장에게 부탁해 만든 메스 모양의 칼이었다.

    그 틈을 타서 검은 구슬이 나와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자기가 해치워도 되는지 눈치를 보던 구슬은 옆에서 쓰러진 가주의 진기를 시험 삼아 빨아들이다가 아진이 제지하지 않는 걸 보고 그때부터 신나게 빨아들였다.

    “이 사람은 건드리지 마. 이 사람 팔은 아버지한테 가져다드려야 하니까.”

    아진은 구슬이 하는 짓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다가 그건 확실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했다.

    메스가 지나간 자리에서 피부가 깨끗하게 도려 내졌다.

    돌아보았을 때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빠르게 진기를 빨아들인 구슬이 아진을 따라왔다.

    진기를 빨린 창천십이대는 가주와 운명을 같이했다.

    아진의 시선이 구슬에 잠시 머물렀다.

    ‘대체 이건 뭘까.’

    창천십이대를 향해 뇌기를 폭사한 것은 아진이었지만 아진은 그것이 온전히 자신만의 힘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창천십이대에 대해서는 그도 들은 바가 있었다.

    한두 사람이나 제압할 수 있을까 하면서 뇌기를 뿌렸고 그것이 줄기줄기 뻗어 나가 열두 명 모두를 관통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뇌기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해서 아진 자신도 놀랐던 것이다.

    구슬도 이유가 있어서 도운 것이겠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달렸다.

    다음은 내원이었다.

    도종에게 이식해 줄 팔을 찾기 위해 아이에게서 팔을 뺏는 것은 아진에게도 불편한 일이었다.

    남궁세가가 먼저 잘못했고 배 속의 동생까지 죽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세가의 가주와 무인들이 책임져야 할 일일 뿐, 그곳의 아이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문에 내원으로 향하는 걸음에서 몇 번이나 힘이 빠졌다.

    ‘그래. 이건 안 돼. 이러는 건 정당화되지 않아.’

    찾아보면 도종의 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발견하지 못한다면 도종의 손은 포기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이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죽이란 말이다! 그래야 네가 소가주가 될 수 있어. 지금이 기회야. 네 형제들의 호위가 전부 자리를 비우는 때가 또 올 것 같아? 이것까지 네 어미에게 맡길 생각이니?”

    그제야 아진은 내원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혈향이 진하게 섞인 것을 깨달았다.

    ‘……골육상쟁인 건가? 우리가 한 짓이라고 뒤집어씌우고 소가주가 되려고 형제들을 죽인 거야?’

    아진은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걸어갔다.

    포기하려고 했던 곳에서 누군가 희망을 이어붙인 것이다.

    “내가 산공독을 썼다. 지금이라면 네가 이길 수 있어! 첫째 가모의 씨만 다 죽여. 그러면 소가주의 자리는 네 것이 된다.”

    “어머니…….”

    “무엇이냐.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안 되겠다고? 못하겠다고? 이 배로 너를 낳은 것을 수치스럽게 만들 작정이냐? 네놈이 지금껏 제대로 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내 영화를 위해서 너에게 이러는 것이냐?”

    목소리는 점점 격앙됐고 결국 그녀는 설득에 성공한 듯했다.

    서걱-.

    서걱-.

    인륜에 눈을 감기로 정한 듯 누군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진이 전각에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진은 두 팔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고 그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얼마나 소름 끼치게 보일지 알고 있었다.

    “너…… 너는…….”

    눈앞에 선 사람은 서른이 조금 되지 않아 보였다.

    그 옆에 서서 살인을 재촉하던 여인은 비수를 들고 있었다.

    아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손으로라도 일을 성사시킬 생각인 듯했다.

    “누, 누구냐…… 너는 누군데 여기에…… 혹시 네가…….”

    여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막아라. 혁아. 저놈이 이 어미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해라!”

    아진은 그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서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혁이라 불린 남자의 검에서 짙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산공독을 썼다고 하더니 쓰러진 이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검을 맞은 듯했다.

    아진은 그가 뭐라고 할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을 건조한 시선으로 훑을 뿐이었다.

    급히 움직이던 눈이 마침내 한 아이의 시신에 멈췄다.

    “미안하다. 대신 장례는 잘 치러 줄게.”

    많아도 열 살이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아이의 시신 앞에서 아진이 말하고 시신을 어깨에 들춰 맨 채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신형이 사라진 후에도 남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으로 이가 부딪치며 아닥아닥 소리를 냈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렸다.

    * * *

    “아진아!”

    북리의천은 아진이 돌아오기 전에 두 사람이 잘못될까 봐 가슴을 졸이고 있다가 아진이 돌아온 것을 보고 감격하며 그를 불렀다.

    그러다가 아진이 어린 공자의 시신을 내려놓는 것을 보며 기함했다.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들고 있는 게 뭔가 하다가 그것이 사람의 팔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북리의천은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할 뻔했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고 사람을 직접 죽이기까지 했던 그에게도 그것은 견디기 쉬운 광경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도종도 어느 정도 의식을 차린 상태였는데 아진을 보고는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했다.

    “스승님. 부탁드릴게요.”

    아진은 자세한 말은 생략한 채 창천십이대 무인의 두 팔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손목만 이어붙이면 따로 노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질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아예 팔을 이식하려고 해요. 외관상으로도 이게 나을 거예요.”

    “이러려고…… 사람을 죽인 거냐. 아진아.”

    “이 사람은 창천십이대 대원이에요. 가주랑 같이 있다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죽이고 보니까 팔이 있길래…… 그리고 이제는 팔을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가져왔고요.”

    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진은 아버지의 혈을 짚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수술을 시작했다.

    서종욱은 그런 수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아진에게 가르쳐준 기억도 없었다.

    이식이라고 했다.

    그 말을 정말 자연스럽게 했다.

    “제가 잘못한 거…… 아니죠. 아버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지 아진이 물었다.

    아버지만큼은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 없이 물었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죽이려는데 멍청하게 당하고 있으면 안 되지. 어느 아비가 나무라겠느냐.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아진아.”

    “…….”

    아진은 안도하며 그때부터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해 나갔다.

    이어진 부위에 마나를 불어넣자 혈관이 저절로 연결되고 근육이 붙었다.

    흡사 재생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진아…… 혹시 저 사람도 너를 죽이려고 했어?”

    도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저 사람은 내가 죽인 게 아니고.”

    아진은 자기 앞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사람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래도 팔을 의미 있게 써 주고 앞으로 그 팔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좋지 않을까?”

    도종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빚을 졌네.”

    “버텨 줘서 고마워. 형님.”

    그들은 아직 적진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북리의천이 미리 분리해 준 팔을 도종에게 이식했다.

    수술이 먼저 끝난 후에 서종욱은 손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인다…….’

    그는 손목이 잘려나간 순간 자신이 그동안 이루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다시는 환자를 진맥할 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침을 하는 것도 더 이상 꿈꾸기도 어렵겠다고 여기며 오래 수련을 하면 혹시 입으로라도 시침을 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보기는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디 하나하나가.

    손끝에서 예민하게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옆에 있는 이불과 침상 끝의 나무를 문질러 보았다.

    그 각각의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그러던 그가 벌떡 일어섰다.

    “아진아. 본가에는 가 봤느냐. 어머니는 어떻더냐. 어머니는 무사하더냐.”

    아진은 차마 아이가 죽었을 거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제수씨는 보지 못하고 왔네. 이곳에 오는 게 급할 것 같아서 말이야.”

    입을 열지 못하는 아진을 대신해 북리의천이 말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형님.”

    그때부터 서종욱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아진은 끈기를 갖고 수술을 마쳤다.

    도종도 일어나 앉아서 손을 움직여 보았다.

    “아진아.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 북리세가에서 배웠어?”

    “응?”

    아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내 제자는 정말 특별하지. 검술도 내가 아진이에게 배우고 있단다. 아진이는 자기가 아는 걸 답습하지 않고 그걸 가지고 매 순간 새로운 걸 추구하지. 이것도 마찬가지일 거다.”

    “정말입니까, 형님?”

    서종욱은 아진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게 좋아서 얼굴을 밝혔다가 금세 아내의 걱정이 되는 듯 아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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