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50화
형.
그가 묶여있던, 그를 묶어놓고 있던 형.
북리의천은 서서히 그것을 놓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고 어차피 북리의천의 것이 아니라는 말.
결국 북리의천은 자신의 검을 새롭게 찾아야 하는 거였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검에 내공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갔다.
첩첩으로 그의 주위를 에워싸던 사람들은 북리의천의 기세가 바뀐 것을 알아차렸다.
“……조심해라! 사이한 방법을 쓰고 있다!”
누군가 외쳤고 북리의천의 검은 맹수처럼 그자를 향해 강기를 내뿜었다.
폭포에 던져진 물방울의 운명이 그와 같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주가 형체도 없이 수천 조각으로 찢겨 투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충격은 컸다.
아무리 잊자고 생각하고 눈앞의 전투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해도 대주의 살이 바닥에서 밟히며 물컹거리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북리의천은 그제야 보이지 않는 천장을 뚫은 듯이 한없이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들 중에는 북리세가의 검법을 알고 있던 자들도 있었고 북리의천의 검을 견식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북리의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그 순간에는 해가 되었다.
북리의천은 더 이상 예전의 북리의천이 아니었고 그의 검도 예전의 그 검이 아니었다.
표홀하게 몸을 날린 북리의천이 아진을 향해 쏘아지듯 달려나갔다.
아진은 이미 뇌옥으로 사라진 후였다.
* * *
버드나무를 지나 뇌옥을 발견했을 때 아진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그의 삶이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뇌옥을 지키던 자들은 아진을 보고 깜짝 놀란 채 검을 빼 들었다.
아진은 간단히 주먹을 날려 무인을 쓰러뜨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검을 든 채 앞을 막아서는 이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구슬은 포식을 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나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포식이 즐거운 듯 묵빛이 일렁였다.
“아버지! 형님!”
타다다닷 달려가며 아진이 소리쳐 불렀다.
“아…… 아진아…… 아진아…….”
그 목소리가 심해에서 나오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아버지!”
수많은 죄수가 갇힌 방을 지나 아진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어쩌면 그가 들은 소리는 환청이었을지도 몰랐다.
살려달라고, 자기들을 꺼내달라고 외치는 자들 속에서 그 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진은 복도를 달려가 그 끝에 이르렀다.
“아버지…….”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알지 못한 채 아진은 문을 열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아진의 손에서 그것은 흙덩이처럼 부서져 나갔다.
문이 열렸을 때 정작 처음에는 어떤 광경인지 인식이 되지 않았다.
어둡기도 했지만 아진 자신이 그 안의 상황을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아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뇌옥으로 들어온 북리의천은 그들이 밖으로 나가 소란을 일으키기를 바라면서 뇌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무슨 이유로 갇혔건 그곳에 갇힌 이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재주를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문을 부수고 왔을 때 아진은 피바다 속에 앉아 있었다.
북리의천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서종욱과 도종의 몸에서 구속구를 떼어 냈다.
“전각으로 가자. 너라면 살릴 수 있지 않으냐. 아진아. 정신 차려라. 정신만 차리면 너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북리의천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아진이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돼서 말했다.
아진에게 들려온 그 목소리는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주었다.
온통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현실감을 일깨워 주는 목소리.
그 소리를 듣고 아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형. 제가 왔어요. 제가 스승님과 왔어요.”
아진은 말을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에게서 떨어진 손을 찾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손이 북리세가로 온 것을 기억했다.
‘여기에 없지…….’
도종의 손도 보이지 않았다.
아진은 한숨을 내쉬고 그들의 몸을 부축하려 했다.
그러자 북리의천이 두 사람을 어깨에 걸치고 먼저 경공을 펼쳤다.
아진도 그의 뒤를 따랐다.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데 안전한 곳까지 갈 시간이 없었다.
북리의천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그 옆에 있는 외당 무사들의 전각으로 갔다.
“비켜라!”
그들은 설마하니 그곳에서 북리의천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곳에 있던 자들은 전투에 바로 투입되지 않은 대기 인력이었다.
그러던 그들의 앞에 북리의천이 나타난 것이다.
북리의천은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침상을 찾아가 그곳에 두 사람을 눕혔다.
아진은 북리의천이 아버지와 도종을 내려놓자마자 아버지의 몸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내가 할 일은 없느냐. 아진아.”
북리의천이 물었지만 그 말에 따로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밖에서 수많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북리의천이 곧 그들을 베어 넘겨야 했던 것이다.
“들어와 보거라. 나를 뚫고 지나갈 자신이 있으면 들어오라는 말이다!”
문을 지키고 서서 북리의천은 검을 휘둘렀다.
전각이 부서지고 벽이 날아가는 동안 아진은 계속해서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버지를 고치는 동안 시선은 도종에게 향했다.
마음이 급해서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진은 그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른 손을 도종의 몸에 얹었다.
그러자 마나가 두 사람의 몸에 동시에 들어갔다.
그것은 아진도 이전에 시도해 보지 않았을 정도로 복잡한 일이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마나는 순순히 아진의 명령에 복종했고 두 사람의 몸속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치료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눈을 뜬 것은 거의 일각 가량이 지난 후였다.
“아지…… 아진아…….”
바짝 말라붙은 입술이 움직였다.
“스승님. 물 좀 가져다주세요.”
아진의 말에 북리의천은 싸우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제자가 하는 말을 들었느냐. 나는 내 제자의 심부름을 해야 하니까 네놈들은 이제 다 꺼지는 것으로 하자.”
말을 하는 동안 검강이 그의 키를 훌쩍 넘어서 천장까지 솟구쳤고, 겁에 질려 도망치려는 무인들의 뒤로 일격이 가해졌다.
쿠콰콰콰쾅-!
그것은 북리의천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검강에 휘말려 대여섯 명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검을 휘둘렀는데 결과적으로 스무 명 남짓의 무인들이 몸이 양단된 채로 쓰러진 것이다.
“스승님. 어서요.”
북리의천은 감격할 틈도 없이 재촉을 받고 달려나갔다.
북리의천이 돌아왔을 때 그는 물동이를 들고 있었다.
“스승님. 아버지와 형님에게 물을 주세요. 천에 적셔서 입술에 묻혀 주시고 어느 정도 마실 수 있게 되면 혀에 물을 짜서 주세요.”
“그래. 아진아. 그런데 왜 네가 안 하고?”
왜 네가 하지 않고 나에게 시키냐는 질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그 일을 시켜놓고 위험한 일을 하러 가려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껴서 물은 것이다.
“손을 구해 와야죠. 어차피 지금은 손을 찾는다고 해도 쓰기 어려울 거예요.”
북리의천은 아진이 사라진 곳을 보면서 그 말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손을 구한다고?
손을 찾는다고 해도 쓰기 어려울 거라고?
‘잘린 손을 찾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무래도 그 뜻이 아닌 것 같았는데 그 뜻이 아니라면 또 무슨 뜻인 건지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갈수록 더욱 미궁에 빠진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는 서둘러 천을 물에 담갔다.
다른 놈들이 와서 방해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물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 * *
아진이 가주전으로 그를 찾아가고 있을 때 창천십이대는 가주의 곁을 지켰다.
가주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남궁세가 최정예 중의 최정예.
그들 중 셋이 무림 십이성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 모습을 보는 것도 어려운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리세가의 다른 무인도 없이 북리의천과 아진만이 왔다는 것을 듣고 처음에 그들은 일이 금방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북리의천이 말년에 얻은 제자 때문에 그 제자와 함께 황천길에 오르게 될 거라며 웃기도 했다.
산본의가를 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진작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그랬다.
가주는 한동안 흐뭇했었다.
북리의천과 아진이 세가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세가에 온 것이 그들 둘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주는 오늘에야말로 앓던 이가 빠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들려오는 소리는 참담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칠십 명이 넘는 세가의 무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단순히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고 죽었다고 했다.
70명의 무인이면 무가로 일가를 이루고도 남았다.
대부분이 이류였고 그중에는 간간이 일류도 끼어 있었다.
그런 자들이 제대로 손도 못 써보고 겨우 그 두 사람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창천십이대는 이제 자기들이 나서야 하지 않나 했지만 가주는 그들에게 출격을 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순간 가주에게 적잖이 실망했다.
가주에게는 세가 무인들이 죽는 것보다 자신의 안위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자신이 살아 있어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가주가 할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창천십이대와 가주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저희가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주님. 명을 내려주십시오.”
대주가 지극히 예외적으로 입을 열어 말했지만 가주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주님!”
“나는 이미 명을 내렸다.”
대주가 고집스럽게 재차 말하자 가주가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입니다!”
밖에서 누군가 외쳤고 그와 거의 동시에 그 목소리가 끔찍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표홀히 바닥을 차고 다가오는 소리.
그것은 바람의 노래와도 같았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냐! 고작 그 두 놈에게 남궁세가가! 이 남궁세가가……!’
가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검좌대에 올려진 검을 들었다.
그는 그렇게 여유를 부리지 않는 것이 좋았을 터였다.
“서두르지 그랬어.”
터무니없이 어리기만 한 목소리가 가주의 뒤에서 들렸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었다.
목소리가 들린 것과 가슴이 뚫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전신에 퍼지는 복잡한 통증을 느끼며 가주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해 보려 애썼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발끝이 오금을 걷어찼고, 다리가 풀려 몸이 무너지는 틈을 타 손끝이 명문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제 심장을 스치고 나온 붉은 손을 보고 있었다.
흙장난이나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조그만 손이었다.
그 손끝이 어떤 날카로운 창끝보다도 예리하게 서 있었다.
“아이가 뭘 잘못 했다고.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뭘 했다고 아이를 죽여.”
아진의 목소리는 오히려 처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머릿속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어차피 여기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머니…….
소은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어머니를 얼마나 잘 돌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소은도 다친 것은 아닌지.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